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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만 보여달라고? 함께 팀을 만들면 어때”

[번역 연재] 동정은 싫다 (5장) 통합: 그늘진 곳에서 밝은 곳으로

본문

투쟁적인 장애우들은 사회 각 분야에 걸쳐 끊임없이 완전한 사회통합을 요구하였다.
그러한 그들의 관심이 체육 분야에까지 확대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68년부터 계속 되고 있던 정신지체인을 위한 특수올림픽에 대해 일반 언론에서 관심을 갖는 부분은 손상된 신체기능에도 불구하고 혼신을 다해 기록을 갱신하는 장애우의 감동적인 드라마와 축제 같은 분위기 뿐 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장애우들만의 잔치였다. 따라서 91년 대회를 기점으로 분리된 대회 개최 자체를 반대하는 움직임이 서서히 일기 시작했다. 그 결과 장애우와 비장애우가 하나의 팀을 결성해 눈에 띄는 발전을 보이는 성과를 보이면서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여 나가는 등의 새로운 변화가 일러나기 시작했다.


 “정신지체인은 수영 못해”

 완전한 사회통합을 요구하는 장애우와 그 가족들의 요구는 사회 각 분야에 걸쳐 끊임없이 계속 되었다. 특수올림픽(정신지체인을 위해 마련된 국제 체육대회로서 1968년에 처음으로 시작되었으며, 지금은 4년에 한 번씩 미국에서 개최되고 있다. 한국에는 1977년 대한성공회 김성수 주교에 의해서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되었으며, 1978년 제5회 대회부터 출전하고 있다. -역자 주)을 보는 시선에 있어서도 요구가 발생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94개국 6천 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미니애폴리스에서의 특수올림픽은 1991년에 벌어진 세계적으로 가장 큰 스포츠행사였다. 축제의 장인 개회식에는 4만5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개회식을 지켜보았으며, 75개 단체에서 수백만 달러를 후원하여 주었다.

 이것은 1968년에 처음으로 있었던 특수올림픽에 비해 더 거대한 행사였다. 1968년 당시에 의사들은 이 행사의 창시자인 유니스 케네디 슈라이버에게 이 올림픽 참석자들의 심장이 너무나 약하기 때문에 4백 야드 이상의 달리기를 할 수 없다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미니애폴리스에서 사바스 비켈리스는 땀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13.1마일의 하프마라톤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후에 자신의 그리스 국기를 온 몸에 감싸고 감격에 겨워 운동장을 돌았다.

 1968년경 전문가들은 정신지체장애우는 수영을 할 수 없다고 경고했었다. 그 대표적인 사르겐트 슈리버는 이렇게 답변했다. “그들은 신체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수영장의 바닥에 가라앉게 될 것이다. 그래서 1968년 첫 번째 경기에는 12명의 구조원들이 수영장 주위에 배치해 두었다. 우리는 아이들이 물에 가라앉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는 약간은 빈정대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구조원들을 배치하는 것이 최소한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다르게 생각했다. 자신이 숙달된 운동선수였기 때문에, 그녀는 슈리버하우스의 뒤에 있는 풀장에서 정신지체를 가지고 있는 어른들과 아이들에게 수영을 가르치는 여름캠프를 1963년 시작했다.
 여러 전문가들이 수용한 지식을 반박하기 위해서, 그의 가족들과 장애우들이 장애우운동을 이끌고 있었다. 존F.케네디의 여동생이면서 특수올림픽의 창시자인 유니스 슈라이버는 이러한 것을 폭로한 사람 중의 한명이었다. 요셉P.케네디 주니어는 정신지체인에게 교육을 제공하는 새로운 방법에 대해서 연구했다.

 그녀가 최선이라는 것은 바로 특수올림픽이었다. 이 행사는 그 당시에 방에 틀어박혀 있고, 공포의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방식으로의 변화를 보여주었다. 정신지체에 대한 신화와 두려움을 없애줌으로써 슈라이버는 영웅이 되었으며, 특수올림픽은 일정한 지위를 획득하였다.

 그런데 특수올림픽의 성과는 또 다른 결과를 이끌어냈다. 젊은 장애아부모들 중 일부가 장애우의 완전한 사회통합을 요구하는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시초가 된 것이다. 바바라 길과 그녀의 아들인 아마르처럼 많은 부모들은 이 행사를 보이코트 하였다. 바바라 길은 이렇게 일반 사람들과 분리된 장애우 만을 위한 특별한 행사가 아들이 자신과 비슷한 장애를 가진 아이들하고만 함께 있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면서 특수올림픽 자체를 반대하고 나섰다.

 “우리는 어두운 세계에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분리시켜 놓았었다. 올림픽은 단지 모방한 세계 일 뿐이고, 이것은 실제의 세계와 같은 의미를 가지거나 그만큼 의미 있을 수가 없다”고 바바라 길은 불평하였다. 이 특수올림픽은 어두운 세계 속에서 불평등한 장소로서의 하나의 분리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비켈리스가 금메달을 따기 일주일 전에, 정신지체인인 아마르 길과 다섯 명의 다른 12살 소년들은 미니애폴리스의 다른 연례축제행사에서 메달을 땄었다. 아마르는 그의 비장애우 친구들을 도와 프라스틱 우유 상자와 나무를 가지고 15피트의 긴 장식용 보트를 만들었다. 그는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노를 저었다. 바바라 길에게 이것은 아주 중요한 순간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가 누군가에게 수용된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끼고 자신이 그 팀의 한 구성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감동스럽지 않습니까. 국민 여러분”

 슈라이버가 특수올림픽을 시작했을 때에는 장애우를 위한 레크리에이션 활동은 거의 없었다. 당시 레크리에이션 치료전문가인 스튜어트 슈라이엔 교수는 정신지체아의 75%는 일주일에 1시간도 안되는 체육교육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늘날 길과 같은 부모들은 실질적인 통합프로그램을 창조하는 것을 저해하는 특수올림픽과 같은 분리된 행사가 존재하는 것에 대해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길은 친구인 슈 슈웬슨이 운동장에서 중복장애를 가지고 있는 아들 찰리를 도와서 그의 친구들과 함께 놀 수 있도록 할 것이며, 특수올림픽과 같이 분리된 프로그램에 그를 보내지 않겠다는 말을 들었다. “이것은 단지 동정심의 일시적인 감정일 뿐이고, 이것은 특별하기 때문에 분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스웬손은 불평하였다.

 슈라인은 레크리에이션 영역에서의 분리가 특별히 비논리적인 것이고. 신체적인 능력에 따라서 알맞은 장소가 따로 있으며, 심지어 다른 사람과 다르게 정신지체인에게 가장 알맞은 장소는 따로 있다고 주장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특수올림픽은 테이프를 끊기 위해 열심히 뛰어가는 다운증후군 아이들의 귀여운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지만 출전자 중에는 어른이나 동작이 어색한 사람도 있고, 운동선수와 같은 뛰어난 실력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정신지체가 반드시 신체장애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특수올림픽 선수들은 육상경기기록을 가지게도 되고 혹은 권투챔피언이 되기도 하고, 혹은 전국농구협회나 풋볼리그와 같은 곳에서 뛰게 되면서 명예를 얻게 되기도 한다.  이전에 특수올림픽 선수들은 오늘날 스포츠사에 그 이름이 널리 기억되는 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과거에도 그렇고 현재에도 그렇듯 특수올림픽 경기임원들이 각 선수의 기록을 측정할 것이지만 그들은 공적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분리된 경기대회에 참여했다는 낙인이 찍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이스주립대학의 잭 휴케이드는 특수올림픽이라는 것은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여러 가지 다양한 능력에 단지 마스크를 씌우는 것이라고 불평하였다. 그 이유는 이것이 분리된 행사이고, 난잡함을 보이는 어린아이와 같이 유치한데다 동정심에 호소하는 것이며, 선수들을 운반하기 위해서 노란색 학교버스를 사용하는 것처럼 노골적으로 사람들 눈에 띄도록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91년의 미니애폴리스의 경기에서 특수올림픽 조직위원들은 그러한 정형을 없애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자들은 두드러진 성적을 기록한 운동선수의 이야기 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예를 들어 23살의 앤드류 레오나르드는 몸무게의 4배가 넘는 무게를 들어올린다고나 혹은 보스턴마라톤을 비롯하여 20번 이상의 마라톤에 참여한 36살의 로레타 클라이본의 사연이 그것이다.

 이것들을 통해 방송매체들은 특수올림픽을 스포츠행사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한 편의 이야기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래서 별로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한 소녀의 경기모습을 보여주기 보다는 작은 국기의 물결과 뒤뚱거리는 몸과 흔들거리는 팔을 가지고 기쁘게 도약하는 것들에 카메라를 맞추었다.

 특수올림픽의 미래는 잠정적이나마 점차 통합을 수용하는 분위기를 가져오기에 이르렀다. 미니애폴리스에서 ‘통일된 스포츠’라고 불리는 개념이 국제적으로 처음 등장하게 되었다. 볼링, 배구, 농구 그리고 다른 종목에서도 팀성원 중 4%가 정신지체인이 아니었다. 평등한 운동선수의 능력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그 결과 80년대 초 매사츄세츠 소프트볼팀이 장애우와 비장애우가 통합된 팀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매서츄세츠팀의 거스 피아자는 처음으로 통합이라는 개념을 언급하였다. 장애운동선수들에게 기회를 주었으며, 친구로서 발전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팀에서는 미국의 여느 여학생 소프트볼팀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 이상의 기술향상이 발생했다. 피아자는 정신지체인인 팀 동료를 보고 “그들이 수줍음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으며, 사회적 혹은 신체적으로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전해에 특수올림픽 개최 제의를 거절했던, 소련을 비롯한 많은 동구권 국가들이 미니애폴리스대회에는 참가해서 이러한 통합된 행사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국으로 돌아가서 그러한 움직임의 확산을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얘기를 주고받았다.

 슈라인과 같은 일부 사람들은 이러한 특수올림픽이 통합된 스포츠가 올바른 방향으로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바바라 길과 같은 사람들은 아직 의심하고 있다. 그녀는 아들이 좀 더 현실적인 세계에서 살게 되는 것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과 장애를 가지고 있지 않은 그의 친구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리프트 버스? 10년만 기다려”

 장애우의 사회통합을 위한 법은 많지만 법만으로는 그것이 완전히 이루어지리라고 보장할 수 없다.

 1964년 시민권법이 제정된 이후에도 인종차별은 몇 십 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흑인과 비교할 때 장애우는 이점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일반인들이 그들을 볼 때 공포와 불쾌감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연민이나 자선의 반응도 함께 갖고 때문이었다. 그리고 적어도 7명중 한 명은 장애나 만성질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당수의 미국인들은 가족 중에 장애를 가진 사람을 누군가는 가지고 있게 되고, 그들에게 장애를 가지고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이해했다. 그러나 장애우의 통합과 비교할 때 흑인의 통합은 의식적으로 사회적인 목적으로 채택되어지고 있다. 소수민족에 대한 지원, 대학장학금, 그리고 여러 다른 기회의 제공 등의 긍정적인 작용을 하는 프로그램들이 있다.

 1975년 모든 장애아동들을 위한 교육법이 통과된 이후에도 학교체계는 계속해서 분리된 채로 운영되었다. 그들은 부모들에 의해서 고소되고, 심지어 법정에서 끊임없이 판결이 내려져야만 반응을 보였다. 오늘날 장애우들의 실업률은 66%이다. 단지 15%만이 중등과정 이후의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복지적 혜택에 의존하고 있다. 예를 들어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모든 수입의 65%를 공공자원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것은 모든 미국인들이 17%만을 의존하는 것과 비교해 볼 때 훨씬 더 많은 수치다. 발달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25%는 빈곤선 이하의 수입을 가진 가족들과 살고 있다.

 길게 보면, 통합은 사회적으로 비용이 덜 드는 것이다. 교육은 장애우들이 평생 국가적 세금의 짐이 되는 존재가 아니라 당당히 세금을 내고 일을 하는 시민으로 만든다. 그러나 당시 학교는 미래에도 학생들이 누군가의 짐이 되는 것을 예방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학교에 경사로를 설치하거나 심한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교사들을 훈련시키는 것을 피하고 있다.

 그러나 재정적인 현실을 인정할 때 장애인권운동은 완전통합을 획득하는 방향으로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척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리프트가 장착된 버스를 요구하고 있으나 단지 새로 구입하는 버스에만 이것이 장치되고 있다. 따라서 기존 오래된 버스들이 더 이상 사용될 수 없어 폐차될 때까지 10년 이상의 세월을 기다려야 어느 버스나 마음 놓고 탈 수 있는 것이다.

 고용과 공공 편의시설에서의 반차별을 보장하는 법률은 양육시설에서 살아가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장애아동들에게 거의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게 만든다. 그리고 새로운 집을 정부가 건설하도록 하는 법률에서도 휠체어로 접근할 수 있는 집이 거의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친구를 방문하거나 혹은 심지어 자신의 집의 가족들을 방문하는 것도 불가능 하게 되는 휠체어장애우들이 많다.

 그 결과 장애우들과 그의 가족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법률적인 보호를 받고 있다. 메릴랜드의 정신지체인을 위한 교육위원회의 부의장인 낸시 레드는 통합교육의 열렬한 지지자이다. 그녀는 학교가 사람들의 태도를 형성하게 하는 가장 최고의 공공기관이며 따라서 장애우를 통합 사회 속으로 섞여들게 만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날 자신의 아들 데이비드와 함께 가게에 간 레드는 무척 고통스러운 경험을 했다. 데이비드는 경증정신지체와 뇌성마비 장애를 가지고 있어 걸음걸이가 조금 이상하게 보이는 아이였다. 레드는 뒤에서 사람들의 냉담한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들이 학교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친절하고 친구들과의 사이도 좋은지를 알고 있었다. 레드는 완전히 통합되고 모두가 데이비드를 편안하게 생각하는 사회를 꿈꾸었지만, 현실 사회에서 데이비드를 일반 학교에 보낼 수가 없었다.

 데이비드가 18살일 때 일반학교에 갔었다. 그러나 그는 그 주에서 새롭게 시작된 수학과 읽기, 그리고 언어 영역에 대한 기본적인 기술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는 다시 분리된 특수학교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는 그의 예전 학교의 친구들과의 친밀성을 잃어버리게 된 점에 대해 슬퍼하고 있었으며, 그의 실행능력도 떨어지게 되었다. 이상적으로 CSAAC와 같은 지원프로그램이 지역사회에 존재하고 있기는 하지만, 데이비드는 메릴랜드에 존재하는 지원프로그램의 4천 여 명의 대기자중의 한사람이 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레드는 데이비드를 사립기숙학교에 보냈다.

 데이비드는 메릴랜드의 정신지체아 특수학교인 베네딕틴학교에 가게 되었는데, 이곳은 지역사회프로그램과 생활프로그램을 채택하고 있는 곳이었다. 학생들은 분리된 학급에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지만, 거기에서 CSAAC의 지역사회지원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그룹홈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베네딕틴학교에서 보낸 3년은 데이비드에게 좋은 직업기술과 사회적 기술을 제공하여 주었으며, 이것은 후에 그에게 그의 어머니의 집에서 수마일 떨어져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였고, 잔디 깎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는 그의 지역사회에서 활동적으로 살아가면서 지역사회도서관에서 지원활동가로, 다른 이웃사람들과 함께 지역사회활동가로 활동하였다.(계속)

 

역자: 서동명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대학원에 재학하고 있다)

 저자/ 조셉 피 쉐피로
  이 책을 쓴 조셉 피 쉐피로는 미국의 대표적 일간지인 유에스월드앤리포트지 기자로서 사회정책에 관한 다수의 기사를 썼다.  그는 미국 알리샤 페터슨 재단의 장학금을 받아 미국 장애우 인권운동을 연구해서  이 책을 썼다. 



작성자서동명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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