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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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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말이 있지.
태어날 때 실 한 자락을 붙잡고 세상에 나와서 그 실자락을 따라가며 살아가는 게 인생이라는 말도 있어, 그 말이 맞다면 모르긴 해도 내가 엄마 뱃속에서 붙잡고 있던 실자락은 하나가 아니라 수천 수 만개 였던 것 같아. 생각해 봐.

실 한 자락 붙잡고 사는 것도 버거운 게 인생인데 나는 태어날 때부터 수천 수 만개의 엉킨 실들을 붙잡고 있었으니 내게 있어서 삶은 지옥 그 자체였지. 사는 게 고행이고 고생길이 훤히 열려 있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지.

 
ⓒ이상윤  
씨받이란 말 들어봤나?
아이를 낳지 못하는 집에 팔려가서 대신 아이를 낳아주는 여자를 일컬어 속칭 씨받이라고 한다고 해. 오랜 옛날부터 돈푼깨나 있는 집에 남자 아이가 없어 후사를 잇지 못하면 씨받이를 들이곤 했다지. 내가 내 몸속에서 키워 내보낸 자식을 자식이라고 제대로 단 한 번 불러보지도 못하고, 평생을 식모살이만 해야 했던 그 씨받이로 팔려간 건 내 나이 스무 살 때였어.

그 전에, 나를 옭아매고 있던 실 한 자락을 얘기하면 그건 바로 나의 장애였어. 나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볼 수 없었지. 원하지 않았는데 시각장애를 갖고 세상에 나온 거야. 그 때문에 평생을 살면서 보지 못하는 병신 주제에 라는 모욕적인 말을 수 천 수 만 번도 넘게 들어야 했어.

마치 보지 못하면 사람이 아니라는 듯이, 심지어 가까운 식구들조차 내 장애를 들먹이며 나를 철저히 무시했지. 이해할 수 있겠나? 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거기다 여성이라는 신분이 더해지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겠나?

설상가상으로 나처럼 찢어지게 가난해서 보리밥도 제대로 먹기 힘든 집안에 여자로 그것도 보지 못하는 치명적인 장애를 갖고 있는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는 좋게 말해서 천덕꾸러기이고 나쁘게 말하면 어서 없어져야 할 짐짝 밖에 되지 않는 존재인 거야. 모르긴 해도 내 부모도 차마 자기 손으로 나를 죽이지는 못하고 내가 병이나 사고라는 우연을 가장해서 어서 죽어주기를 맘속으로 바라고 있었을 테지.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내가 여성과 장애라는 이중적인 장애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 가난한 집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씨받이로 팔려가는 건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는 걸 얘기하고 싶어서야.

기억하고 싶지도 않아 어린 시절은, 주는 밥 먹고 가만히 방에 있었던 게 전부였으니까, 유년시절 기억은 엄마가 내 나이 열두 살 때 병으로 돌아가셔서 그때 서럽게 울었던 기억만 생생하게 남아 있지. 내 위로 언니가 둘 있었거든. 엄마가 죽고 난 후 언니들을 의지하며 그럭저럭 살고 있었는데 내 나이 열아홉 살 때 아버지가 재혼했어. 나는 워낙 정에 굶주려 있었기 때문에 거부감 없이 새엄마를 엄마, 엄마 부르면서 잘 따랐다. 하지만 새엄마는 도무지 나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어. 입만 열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병신을 어찌할꼬 라며 한탄을 내뱉기 일쑤였고, 아버지가 보지 않는 데서 이유 없이 나를 쿡쿡 쥐어박기도 했지.

위로 두 언니가 돈 벌러 도시로 떠나면서 새엄마의 학대는 점점 더 심해졌어. 새엄마가 나에게 놀고먹지만 말고 밥도 하고 설거지도 하라며 부엌으로 떠밀었는데 보이지 않으니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지. 그걸 트집 잡아 새엄마는 또 식충이라고 욕을 하며 나를 구박했어.

그랬지만, 새엄마의 학대가 날이 갈수록 심해졌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집을 떠나고 싶다는 마음을 먹지 않았다. 왜냐면 집이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의 전부였거든.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집밖을 벗어나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때 나는 집을 벗어나면 바로 죽는 줄로만 알고 있었어. 그래서 새엄마의 학대를 묵묵히 견디며 지낼 수밖에 없었지.

그러던 어느 날, 내 나이 스무 살이 됐을 때였어. 계절은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을 때였으니까 아마 가을이었던 것 같아. 같은 동네에 살던 친척집 아주머니가 집에 찾아왔어. 그 아주머니가 마루에 새엄마와 아버지를 앉혀 놓고 하는 말을 나는 방에 앉아서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지.

부탁한 혼처를 알아봤는데, 감내골에 사는 정서방이 병신이지만 받아 주겠대요. 정서방은 마누라와 딸만 셋 있는 양반인데 사는 형편이 괜찮아요. 그 집에 들어가 아들만 낳아주면 배불리 먹고 편히 살 수 있게 해준다니까 이보다 더 좋은 혼처가 어디 있겠어요. 마땅한 데 없으면 그리로 보내세요...

중요한 건 내가 시집을 가는 건데 내 의사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는 거야. 친척집 아주머니가 다녀간 후 아버지와 새엄마는 거의 매일 나를 불러서 네가 장애를 갖고 있고 한참 모자라기 때문에 마땅한 혼처가 나서지 않아서 걱정이었는데 이제 한시름 놨다. 너 죽어서 처녀귀신 되지 않으려면 데려가겠다고 임자가 나섰을 때 얼른 시집가야 한다며 내 등을 떠밀어 댔지.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내놓고 좋다 싫다는 의사표현도 할 수 없었지. 왜냐하면 그때쯤 나는 어렴풋이나마 장애를 가진 내가 부모의 큰 짐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죄인인 주제에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니.

부모의 성화에 떠밀려 신랑 될 사람 얼굴 한 번, 아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목소리 한 번 들어보지 못하고 시집이라는 걸 갔다. 그 날, 내가 생전 처음 집을 떠나던 날 하염없이 눈이 내리고 있었지. 옷가지가 든 보퉁이 하나를 가슴에 안고 눈을 맞으며 질펀한 시골길을 걸어가는데 자꾸 눈물이 나서 혼났어, 이제라도 아버지가 돌아오라고 부를까봐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보고 또 돌아봤지만 내 귀에 들리는 건 겨울 산새의 푸드득 날개 짓 소리 뿐이었지.

내가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시집을 갔는데 남편이라는 사람은 예순 한 살 노인이었다. 남편은 친정아버지보다 더 나이가 많았어. 그리고 더 기가 막혔던 것은 남편의 막내딸이 나와 동갑이었다는 거지. 그 사실을 시집가서 첫날밤을 치르고 난 후에 알았는데 그때 생전 처음 혀 깨물고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첩첩산중이라고 남편이라는 사람이 나를 속인 건 그뿐만이 아니었어.

 중매한 친척 아주머니가 남편에게 논과 밭이 넉넉하게 있어서 먹고 살만 하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그 말도 새빨간 거짓말이었어. 가보니 농사를 지어 다섯 식구가 먹고 살기에도 빠듯할 정도로 가난하고 궁핍한 집안이었어.

그때 내가 만약 볼 수 있었다면 한 걸음에 그 집을 뛰쳐나와 멀리 도망쳤을 거야. 하지만 앞을 볼 수 없으니 도망칠 수는 없었고, 한숨에 설움에 억장이 무너져서 몇 날 며칠을 식음을 전폐한 채로 울며 지냈지. 그러자 친정에서 아버지가 왔어. 내가 아버지에게 말했지. 아버지 제발 나를 데려가 주세요. 그때 아버지가 내 손을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집으로 오면 너 죽이고 나도 죽을 거다. 이유야 어떻든 한 번 시집을 갔으면 죽어서도 그 집 귀신이 되어야 하는 게 이 나라 법이다. 그리 알고, 아비 원망하지 말고 집에 올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아라.

그때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니? 알겠어요. 아버지 말대로 할게요. 라고 선선히 대답했다. 내가 죄인이었으니까, 아버지가 보지 못하는 장애를 갖고 있는 나 때문에 그 동안 말은 없었지만 얼마나 많이 속이 상하셨으면 저렇게 냉정하게 딸을 대할까에 생각이 미치니까 나도 모르게 아버지가 한없이 불쌍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보낸 후 결국 나는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돼서 시집살이,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식모살이를 시작했다. 처음 남편과 본처는 없는 살림에도 내가 아들 하나만 낳아주면 뭐든지 다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랬던 남편과 본처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 나를 이년 저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병신을 데려다가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여기라며 쌍소리를 해대더니 그것도 모자라 아침에 눈만 뜨면, 보이지 않는 내게 풀 베어와라, 밥해서 대령해라, 빨래해라, 설거지해라 라며 닥치는 대로 일을 시켰다.

내가 일을 안 하면 욕을 해대니까 욕 듣기 싫어서 나는 죽어라고 일을 했지. 몸이 많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아들만 하나 낳아주면 대접이 달라지겠지 라는 소망을 품고 있었지. 그랬는데 남편과 본처가 원하는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아줬는데도 나는 식모살이를 면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전보다 마음의 고통이 더 심해졌지. 이유는 본처가 나를 시기했기 때문이었어.

첫 아이를 낳고 나서 미역국은커녕 보리밥 몇 숟가락 떠먹은 게 전부였지. 아이 낳고 삼 일만에 내 손으로 밥해먹고 들에 나가서 일했거든. 그랬더니 원기가 부족해서 앓아누웠다. 뼈만 남은 내 모습을 보고 남편이 밥 잘 먹는 물약을 사다 줬는데 그게 화근이 됐지. 본처가 자기는 이십 년을 남편하고 살았어도 약 한번 못 얻어먹어 봤다면서 내 눈에서 눈물 나게 하면 너 눈에서는 피눈물이 날거라면서 내게 죄받을 년이라고 욕설을 퍼붓더라고, 본처의 시기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지.

내가 아들을 둘 낳았거든. 그런데 내 뱃속에서 나온 아이들인데 본처가 보는 데서는 단 한 번도 아이들을 예쁘다고 쓰다듬거나 안아볼 수 없었어. 그랬다간 본처가 가만있지 않았지. 쌍욕을 하고 밥도 못 먹게 했거든. 그래서 아이들을 제대로 한 번 품에 안아보지도 못하고 멀리서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목소리를 듣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여기며 살아야 했지. 그렇게 가슴을 뜯으며 한 세월을 살았다.

나중에 두 아들을 결혼시킬 때도 나는 부모 자리에 앉지 못했지. 호적상 아이들 엄마는 따로 있었으니까, 그리고 남편과 본처가 창피하다고 오지 말라고 해서 결혼식장에도 가지 못했어. 지금 나는 보지 못하니까 바람결에 들려오는 풍문으로 아이들이 서울 가서 살고, 손자 손녀를 낳았고 손주들이 자라서 학교에 들어갔다는 얘기를 전해 듣지.

그것뿐이야. 밤에 자리에 누우면 그저 빨리 시간이 흘러가서 어서 이생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바람뿐이지. 다음 생에서 다시 사람으로 태어날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그때는 앞도 볼 수 있고, 좋은 남편 만나서 사랑받으면서 아이들에게 엄마라는 소리를 들으며 웃고 살고 싶은데, 그런 날이 올까 모르겠네.....

작성자이태곤 기자  a3527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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