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인이 되려면 이성을 가져라(?) > 문화


우주인이 되려면 이성을 가져라(?)

홍윤기의 철학 단상(마지막) - 이성의 느낌

본문

  처음 이 철학단상은 태양을 맨눈으로 재려던 사내 얘기로 시작했다. 그런데 아낙시메네스가 태양을 나뭇잎 한 장만 하다고 한 뒤 50년 정도 지나면서 태양의 크기는 대략 15cm 정도 커졌다.

  앞에서 얘기한 헤라클레이토스가 재보니(?) 태양은 자기 발바닥만 하다지? 지금 우리가 아는 태양의 크기는 이보다 훨씬 크다. 반지름만 69.6만km이니 2천년동안 자라도 한참 자란 것이다.

  그렇다면 태양의 온도는 얼마나 될까? 아무리 맨눈으로 태양을 재려고 했다지만 온도까지 재볼 엄두는 나지 않았던지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기록이 없다. 이 태양의 온도를 잰 것은 현대의 과학자들인데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태양의 온도는 절대온도로 약 6천도, 섭씨로는 약 5천7백50도이다. 그런데 잘 보자. 과학자들은 어떻게 이 온도를 쟀을까?

  아이들한테 물어보면 물어본 사람이 당장 바보가 된다. “어! 아저씨 봐. 그거야 체온계 갖고 해한테 가서 해야, 아! 하고 입벌려라, 니 체온 좀 재게, 하면 되잖아요.” 초등학생한테 물으면 대답이 좀 달라지려나? “에이, 아저씨. 그거야 우주선 타고 태양까지 가서 온도계 딱 대보면 되죠.”

  그런데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쯤 되면 얘기는 아주 달라진다. “교수님, 과학사전 찾아보세요. 교수님이 그것도 모르세요? 아니면 물리 선생님한테 물어 보든지요.” 원, 젠장. 요새 애들이란... 하고 말다가는 ‘어이구, 노땅은 할 수 없어’하고 손가락질 당할까봐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태양이 하늘에 떠 있기는 하지만 내 앞의 식탁이나 내 손에 든 야구공과 똑같은 물체임은 분명하다. 물체란 원칙적으로 인간이 자신의 천부적 감각으로 직접 경험하여 파악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점에서 정신적인 대상과는 일단 구별된다. 그러함에도 인간이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자기 감각으로 직접 파악한 태양을 진짜 태양이라고 우길 사람은 - 적어도 현대를 사는 교육받은 성인들 가운데는 - 아무도 없을 것이다. 원칙적으로 아무리 감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물체라도 그 물체의 전체적 특성이나, 아니면 구식 사고방식에 따라, 그 물체의 ‘진짜’ 특성을 대라고 하면 감각으로는 아무래도 역부족이다.

  우리가 항상 대하는 ‘물(水)만 하더라도 '진짜 물' 이라고 했을 때는 수소 분자 2개와 산소 분자 1개가 결합한 합성물질을 가리키는데, 물의 이런 분자구조를 단지 감각만으로 알아냈다고 한다면 그건 내가 좋아하는 김국진 ․ 서경석 씨의 『테마게임』이나 서세원 씨의 개그 소재감이다. (이 말 들으면 펄쩍 뛸 분이 『함께걸음』기자들이다. ‘아니, 코미디 볼 시간은 있어도 『철학단상』제 때 마감시킬 시간이 없었다니!’하고.)

  인간이 지구에 앉아 태양을 직접 만져본다던가(초능력의 소유자라면 가능하다), 아니면 하다못해 태양까지 날아가서 직접 온도계로 측정한다(초과학이 발전하면 가능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태양의 온도는 우리 인간이 실험적으로 확보한 경험자료들을 기초로 하여 전적으로 우리의 생각으로 추론해낸 논리적 사고의 결론이다. 따라서 약간의 과장을 보태면 태양의 온도는 전적으로 우리 ‘머리’로 잰 것이다. (이렇다면 앞으로 이발소나 미용실에 갈 때 자기 머리를 지금처럼 함부로 남에게 맡길 일이 아니다!)

  대아마비증에 걸려 말도 못하고 운신도 못하는 상태에서 이 우주의 역사가 대폭발(빅뱅)로부터 시작했다는 이론을 내놓아 창조주 하느님 이래 처음으로 이 우주가 시작한 순간을 알려준 장애우 스티븐 호킹 박사는 타임머신을 타고 우주가 시작한 순간까지 시간여행을 하여 그 순간을 직접 보고 생중계한 것이 아니다. 그의 비틀어진 머리통안에서 이루어지는, 보통 ‘생각’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정신적 과정이 성한 사람의 두 발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이 우주의 창조점으로 그를 날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주의 역사 뿐만 아니라 우주의 크기도 재고 있다. 지구에서 우주의 끝까지 줄자를 대어보고 재는 것이 아님은 너무나 분명하다. 어떤 대상의 크기를 재려면 우리는 그 대상의 바깥에서 그 대상 전체를 내려다 보고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크기를 재려면 크기를 재는 사람이 크기를 재려는 대상 ‘밖’에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내가 있는 방의 크기도 나의 의식이 방 전체를 대상으로 놓고, 그 밖에서 방을 보는 모습을 ‘머리’에서 그릴 수 있을 때만 이른바 ‘크기’라는 것을 잴 엄두가 나는 것이다. 방 안에 완전히 갇혀 있으면 우리는 그 방의 크기를 재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주를 재고자 할 때 무엇이 우리를 우주 밖으로 날게 하는가?

  자질구레한 일에 얽매인 생각씀씀이로는 지구는 고사하고라도 내 매일매일의 생활 밖으로 나갈 생각도 전혀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루, 아니 한 시간이 멀다하고 바뀌는 내 일상의 감각에서 한 번쯤은 탈출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때 당장 몸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생각만이라도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의 생각 안에는 들어있다는 것을 발견한 철학자가 있다. 사실 철학자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근거는 이른바 생활이라는 것을 애시당초 반쯤 접어둔 그 게으른(?) - 따라서 이것 저것 하기에 바쁜 사람이 보면 울화가 치미는 - 태평함 덕분이다. 그런데 더욱 분통을 터뜨리게 하는 것은 이 철학한다는 작자들이 그런 태평함에 아주 그럴듯한 이유를 대는데 그걸 반박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앞에 얘기했던 고대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 철학을 했다고는 하면서도 그리스 본토에서 태어나지는 않았던 파르메니데스(기원전 515~475)는 일상생활에 매달리지 않는 자신의 태평함을 미안하게 여기기는커녕 오히려 일상에 얽매여 바쁘게 살아가는 자세가 이 세상의 ‘진짜 모습’, 즉 진짜 세상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평범한 사람들을 탓하였다. 그래서 그는 보통 사람들이 보는 세상을 ‘변화무쌍한 생성의 세계’라고 이름까지 붙여주면서 그것은 ‘가짜 세상’이고, 그것을 벗어난 자기야말로 ‘진짜 세계’인 “있는 그대로의 존재의 세계”를 안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진짜) 세계란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이다”는 것이다. 그 말 하고 입이나 다물었으면 괜찮았으련만 그 이유가 그럴 듯하다.
 

(1.) 있는 것은 있다. (이거 아니라고 할 사람있나? 라고 파르메니데스가 말해도, 원!)
(1.1.) 있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다. (말장난이니 상대를 말까?)
(2.) 없는 것은 없다. (갈수록 이쁜 소리만 하네!)
(2.1.) 없는 것은 있는 것이 아니다. (한 마디만 더 참자!)
(3.) 있는 것이 없게 되고, 없는 것이 있게 되는 것을 '변화‘라고 한다. (누가 모르나?)
 ‘(3.1.) (3)에 따르면 (1.~2.1.)의 얘기는 ‘이 세상에 변화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약간 꼬이는데?)
 (결론) 따라서 이 세상은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이다. (아니 어쩌다 이렇게 됐지!)

  이런 진짜 세상을 모르고 변화무쌍한 세상이 진짜 세상인 줄 아는 사람들은 뭘 모르는 인간들이라고 가엾기 짝이 없다는 것이 그 잘난 파르메니데스 선생의 설교이다. 여기에다 이 작자는 자기가 이 진짜 세계를 다스리는 진리의 여신까지 직접 만나보고 이 얘기를 들었다고 그곳에 갔다온 얘기까지 여섯 줄 시로 남겼다. 어디 그런 여신이 있는지 직접 보기나 하자고 했을 때 이 선생은 아주 교묘하게 빠져나간다. “그것을 보자면 인간은 육신에 달린 인간의 감각기관이 아니라 로고스의 능력을 가져야 하니라.” 이 로고스의 능력을 훗날 현대인은 ‘이성(理性)’이라는 말로 번역했다. 좀 신비적인 요소가 다분하지만 파르메니데스는 인간이 천부적으로 타고난 이성능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가장 분명하게 느끼게 만든 최초의 철학자로 - 그러나 철학자들 사이에서만 - 존중받는 인물이 되었다.

  변화무쌍한 세계를 눈앞에 두고도 이 세계가 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헛소리가 거짓말이 아님을 실제로 보여주겠다고 그 제자인 제논이 나섰다. 사람들에게 이 세계가 변화한다는 느낌을 가장 실감있게 만드는 것은 사물들의 운동을 일상적으로 겪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로서는 가장 빠르게 운동하는 물체라고 생각되었던 날아가는 화살을 두고 제논은 “날으는 화살은 날지 않는다”는 엄청난 주장을 해댔다. 스승은 미쳤다면 제자는 아예 사기꾼 취급을 받았다. 제논의 주장은 이렇다.


(1) 화살은 그것이 있지 않는 곳에서는 움직일 수 없다.
(2) 하지만 화살은 그것이 있는 곳에서도 움직일 수 없다.
(2.1.) 화살이 있는 곳은 화살이 그 자체와 동일한 곳이기 때문이다.
(3) 모든 사물은 자기 자체와 동일한 곳에 있을 때 언제나 정지한다.
(4) ‘그러나 날아가는 화살도 언제나 그것이 있는 곳에 있다’
(결론) 따라서 날아가는 화살은 날지 않는다.
 

  이른바 제논의 역설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런 주장을 그리스의 대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선생은 ‘궤변’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단지 궤변이라고 불렀을 뿐 그 당시 뿐만 아니라 근 2천년 동안 제논의 역설은 효과적으로 거의 반박되지 못했다. (이 문제 푸는데 관심 있는 분은 『함께걸음』편집부로 연락하세요 : 필자) 인간이 ‘생각’하는 존재인 한 눈 앞의 경험을 부정할 수 있는 이런 능력이 인간의 생각 안에 있다는 것은 놀라운 발견이었다.

  이성은 경험의 울타리를 벗어나 인간에게 경험 안에서는 경험하지 못하는 인간의 가능성을 일깨우는 아주 귀중한 능력이다. 그러나 이성을 잘못 사용할 경우 인간은 경험이 가르쳐 주는 지혜를 무시하고 경험보다 훨씬 위험한 세계로 빠질 위험성이 항상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이성의 위험을 고쳐줄 유일한 방책은 이성 뿐이라고 할 때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태도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겸손함 뿐이라면 철학 해봤자 더 똑똑해질 것은 없다는 느낌을 주고, 따라서 철학 공부한 나로서는 밥줄이 끊기지 않을까 항상 초조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철학이 시작된지 근 2천5백년 지난 지금 초기 철학자들의 후손인 현대 철학자들에게는 일이 한가지 더 늘어난 것만은 분명하다. 즉 철학이란 철학함에서 오는 자기불안을 치료하는 학문이라는.


글/ 홍윤기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특별연구원)

작성자홍윤기  webmaster@cowalknews.co.kr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함께걸음 인스타그램 바로가기
함께걸음 페이스북 바로가기
함께걸음 과월호 모아보기

제호 : 디지털 함께걸음
주소 : 우)07236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22, 이룸센터 3층 303호
대표전화 : (02) 2675-8672  /  Fax : (02) 2675-8675
등록번호 : 서울아00388  /  등록(발행)일 : 2007년 6월 26일
발행 : (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  발행인 : 김성재 
편집인 : 이미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노태호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함께걸음'이 생산한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4.0 국제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by
Copyright © 2021 함께걸음. All rights reserved. Supported by 푸른아이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