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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화를 위한 탈시설화의 시작

번역 연재 미국 장애우 운동사 (18) 시나브로 그러나 태풍처럼 퍼져나간 자기권리주장운동의 모습

본문

동정은 싫다  6장: 사람이 먼저다 (People First)
  자기권리주창자들의 목소리는 처음 기대하였던 것 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퍼져나갔다.
  이것이 탈시설화 운동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자기권리주장사상은 아직도 정신지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생소한 것이며, 법은 기본적인 선택에 대한 권리를 계속해서 제한하고 있다.
  1974년 미국 주의회가 그 때까지 일반화되어 있던 정신지체를 가지고 있는 여성에 대한 불임수술도 계속 자행되고 있었고, 결혼도 금지됐다.
  그러나 정신지체를 가진 사람들은 서서히 스스로 결정하는 법과 토의하는 법을 훈련받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시설의 뒤에 숨어 있었던 사람들을 일반학교, 집, 그리고 지역사회에서 직업을 가지는 주류화(mainstream)의 물결을 일으켰다.


 “나는 안되나 봐요”

  사람들의 인생은 성공과 실패의 연속이다. 그러나 정신지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둘다 조절할 수 없는 것으로 사람들은 생각한다고 먼로는 불평하였다.

  자기권리주장은 물론 어느 정도의 위험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주장이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 “어린아이가 처음으로 자전거를 탔을 때는 많이 넘어지고 다치기도 한다. 당신은 이럴 때 아이에게 자전거에서 내리라고 하겠는가? 아니다. 당신은 올바로 탈 수 있도록 뒤에서 잡아주면서 가르칠 것이다. 이것이 사람이 배우는 방식이다.”

  먼로 자신의 삶은 성공과 실패로 인한 가르침으로 가득 차 있다. 그가 수많은 집회에 참석할 때마다, 자기권리주장자들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들었다.

  신체적으로 그는 바웬사와 닮았다. 그는 약간은 사나운, 그러면서도 준수한 용모를 가지고 있었으며 절대 권위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친숙한 넓은 턱수염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힘차게 연설을 했으며, 연설할 때 많은 제스처를 사용하였다. 짙은 회색의 줄무늬 양복에 하얀색 와이셔츠와 붉은 색 넥타이를 즐겨 입는, 포용력이 넓고 개방된 사람이었다. 그는 미국 파퓰리즘의 영웅이었으며, 자기주창자들의 역할모델이었다.

  물론 그에게도 어두운 면이 있었다. 그는 8살 때부터 11년 동안 사우스베리의 훈련학교에서 지냈는데, 그곳에서 그는 수많은 학대를 당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12년 동안은 그룹홈에서 지냈었다.

  38살이 되었을 때, 그는 성공의 표식을 획득하였다. 하트포트에서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된 아파트를 소유하였으며, 선루프를 가지고 있는 멋진 자동차, 그리고 수의사 조수라는 전일제 직장도 갖고 있었다. 먼로는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 집회에 참석하기 수 주일 전에는 백악관에서 ADA(미국장애우법)가 승인되는 것을 목격하기 위해 초청을 받은 3천여 명의 활동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시설에서 지역사회로 옮겨진 그 자신의 삶의 변화로 때로는 불안해 했고, 때로는 실패로 인해 수없는 자살의 충동을 느끼곤 하였다.

  리포터 아일 메간은 먼로의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으로 나누어진 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공적인 삶의 먼로는 백악관에 초청될 정도로 자신만만한 활동가이며, ‘피플퍼스트(People First)’ 집회를 운영하는 위엄있고 당당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먼로 자신의 개인적인 삶은 문제투성이었다. 납기일이 이미 지난 청구서와 어질러진 아파트, 게다가 친구도 없고 가족도 없어서 외로움에 가득 차 있었다. 메간은 사회복지사와 함께 그의 부엌을 청소하고, 쓰레기를 버리고 그의 침대를 덮고 있는 수많은 옷들을 정리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먼로는 “거실에 뒤덮여 있는 더러운 것들 사이에서 잠 자는 대신 깔끔한 곳에서 잠들게 되었다. 침대에서의 잠은 사우스베리에서의 안좋은 기억들, 찬물을 끼얹으면서 잠을 깨우거나 혹은 그의 옆에서 잠을 자던 친구가 죽는 등의 기억 속으로 다시 돌아가게 했다.”

  사회복지사가 떠났을 때 그 아파트는 아주 조용하였고, 깔개는 부드러웠으며 침대와 부엌은 깔끔하게 되었다. “나는 내가 어떤 것도 할 수 없다고 느낀다. 그들은 와서 이러한 것을 한다. 그리고 나서 나도 그것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할수 없다.······ 누구도 어떻게 이것을 해야 하는지, 진정으로 가르쳐주지 않았다.”

  결국 그는 서투른 부엌솜씨를 외로움에 돌렸다. “왜 나는 아무도 오지 않으면 깨끗하게 되지 않는 것일까?” 외로움은 먼로의 삶에 끊임없는 불행감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자신을 부랑인으로 만든 정신지체라는 장애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것에 대해서는 증오를 나타냈다. 먼로는 자신의 깊은 슬픔, 그리고 가족이 없는 것에 대해서 쉽게 이야기하였다. 그는 단지 시설에 살고 있는 정신지체인중 한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과 그 상실감을 나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웨덴에서도 태동한 자기권리주장운동

  그가 16개월이었을 때, 먼로와 그의 4살 먹은 형인 레이몬드는 입양되었다. 그러나 그의 양아버지는 그를 환영하지 않았으며, 단지 그를 ‘어이, 괴물’ , 혹은 ‘바보’라고 부르곤 했다. 그가 6살이 되었을 때, 먼로는 그의 형이나 양부모와 떨어져 사우스베리의 훈련학교에 보내어졌다.

  그가 사우스베리에 막 도착한 지 얼마 후에, 사회복지사는 그에게 11살의 한 누나를 소개시켜 주었다. 페기는 역시 사우스베리에 살고 있었는데, 그 당시 1천7백여 개 모든 시설에서 여아와 남아를 분리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그곳의 영화관에서 보았었는데, 때로 직원들은 그들에게 짧은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거나 키스를 하고 포옹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었다. 먼로는 사회복지사가 형제와 자매를 찾아내는 것을 도와준 이후 메리 앤이라는 다른 누이의 존재도 알게 되었다. 사우스베리에서의 기록을 보면 먼로는 그의 잃어버린 가족들에 대해서 너무 얽매여 있었다고 적고 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하트포트의 어느 바에서 비디오 게임을 즐기고 있던 1988년 어느 날 밤, 그 순간까지 그는 부모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하였다. 그 때 이 바의 주인은 그에게 잃어버린 이모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에게 선뜻 다가오려 하지 않았고, 자신의 아들과의 새로운 만남에 대해서 흥분하지도 않았다. 먼로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키스도 포옹도 하지 않았다. 단지 나는 그녀와 악수를 하였다.”

  2주일이 지난 후, 먼로는 그의 누이인 매리 앤과 함께 워커베리로 다시 가서 어머니를 만났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들과 만나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빨리 그들에게서 떠나고자 하였다. 그녀는 차의 뒷자리에 앉아서 자신을 학대하고, 워터베리의 뒷골목에서 술 때문에 사망한 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다행히 이제 그녀는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새 남편과의 사이에 태어난 2명의 자식들이 있었다. 그녀는 다른 자식들을 결코 새로운 가족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먼로와 메리 앤이 떠나기를 원했다. “당신은 우리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결코 걱정하지 않았었죠?” 매리 앤은 다그치듯 물었다. “그래”. 그녀는 대답했다.  그러나 이 대답을 듣고 혼란과 괴로움, 그리고 먼로는 분노가 가슴 속에서 끓어올라 외쳐댔다. “왜 그렇죠? 우리들은 당신의 자식들인데요?”


 “그들도 자유롭게 토론을 나누더라”

  자기권리주장운동의 움직임은 스웨덴에서도 전해 들려왔다. 이 운동의 시작은 정확히 1968년 스웨덴 정신지체아동을 위한 부모협회 회장이었던 벤그트 니르제가 정신지체 성인집단 성원과의 대화를 시작할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니르제는 정신지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다른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일하고 휴식하는, 그런 일상적인 삶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개발시켰다. 이것은 단순하지만, 아주 변혁적인 ‘정상화(normalization)’라는 개념으로 알려진 것이다.

  정신지체남녀의 한 집단과 대화를 하면서, 그는 그 어떤 사회복지사나 전문가들 보다도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모임을 통해서 그는 통찰력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정신지체를 가진 사람들도 그들 자신의 선택에 의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제 명백해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동시에 심리학자들은 정신지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분별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의사결정을 하도록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들은 무조건 시설에 보내져야 하고, 그곳에서 의사나 혹은 다른 직원들이 모든 의사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하였다. 실제로 가족과 함께 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도 부모들에 의해 대부분 의사결정을 내리도록 의지하고 있었다.

  니르제는 정신지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지원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의사결정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니르제는 장애를 가진 남녀 한 집단을 그들이 자신들에 대한 처우와 훈련방식에 대해서 선택하는 것을 스스로 토의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첫 번째 자기권리주창자들이었다.

  정상화는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다루는데 일대 혁신을 일으켰다. 시설의 뒤에 숨어 있었던 사람들을 일반학교, 집, 그리고 지역사회에서 직업을 가지는 주류화(mainstream)의 물결을 일으켰다.

  그러나 정작 정상화를 후원한 것은 부모들과 전문가들이었다. 이것은 정신지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위한 권리주장을 시작하기 몇 년 전부터 일어났다.

  1973년 11월에 정신지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캐나다 지지집단이 스웨덴의 자기권리주장운동에 고무되어서, 이러한 집단을 어떻게 결성할 것인가에 대한 대규모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는 브리티시 콜럼비아주의 밴쿠버섬에서 개최되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는 오레곤에서 이 회의에 관한 소책자가 이 주의 가장 커다란 시설장의 책상에 놓여져 있었다. 페어뷰병원과 훈련센터의 관리자인 래리 로팅콘은 그들의 시설을 ‘소형화’ 하도록 하는 아주 특이한 종류의 사람이었다. 토킹톤은 이 소책자를 그의 젊은 사회복지사중 한 사람인 데니스히스에게 보여주었다.

  히스와 세 명의 정신지체인은 브리티시콜럼비아까지 가서 그 캐나다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 보고 왔다.

  히스는 그 모임을 실패작이라고 기억하였다. 사회복지사, 교사, 그리고 부모들은 앞에 서서 정신지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줄까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청중으로서 1백여 명의 정신지체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말을 할 수 있도록 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레곤에 돌아와서 자기권리주장이 중요하다고 설득시키고자 하였다.

  가을에, 첫 번째 ‘피플퍼스트’ 집회가 오레곤에서 있었다. 2백여명의 자기권리주창자들이 올 것이라고 기대하였지만, 약 5백60여명이 모였다.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는 방법과 누군가가 그들을 정신지체인이라고 부를 때 어떻게 대해야 하는 지에 대한 워크숍이 열렸다.

  본회의중 청중석에서 마이크를 가지고 일어나서 자유롭게 이야기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슈퍼스타였으며, 또한 리더였다. 마이크에는 힘이 있었다. 일단 그들이 마이크를 잡자, 그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의 음성이 들릴 수 있도록 하였다. 그들은 의견을 나눌 수 있었으며, 새로운 역동성을 배울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은 화 내지 않고 자신과 다른 의견에 대해 듣고, 나누고 협상하는 것에 대해서 배웠다.” 히스는 이후 자신이 목격한 바를 이야기했다.

  1974년의 회의를 계획하는 동안, 한 자기권리주창자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정신지체’, 그리고 ‘장애’라는 단어가 앞에 오는 것을 반대하였다. “나는 사람으로서 먼저 다루어지기를 원한다”라고 그는 이야기하였다.

  이러한 제안으로부터 ‘People First of Oregon'이라는 단체명이 만들어졌다.


 “우리가 고소하겠다”

  자기권리주장의 목소리를 처음의 지지자들이 기대하였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퍼져나갔다. 이것은 탈 시설화 운동의 시작이었다. 자기권리주장사상은 아직도 정신지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생소한 것이며, 그들의 부모들에게도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법은 기본적인 선택에 대한 권리를 계속해서 제한하고 있다.

  1974년 미국 주의회가 그 때까지 일반화되어 있던 정신지체 여성에 대한 불임수술에 대한 연방정부의 자금지원을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1980년에도 33개 주가 아직도 정신지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결혼을 금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15년간 장애권리운동은 계속해서 퍼져 나갔다. 그러나 독립된 삶을 위한 센터의 증가는 거의 정신지체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제공되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정신지체를 가진 사람들이 즉각적으로 거대한 운동으로 흡수되지는 않았다. 자기권리주장은 장애권리운동에 포함되어서 시도되었다.

  정신지체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 당시 사회적으로 취한 방식은 자기권리주장운동에 기름을 부었다. 시설에서 자라난 사람들이 그룹홈이나 아파트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집에서 가족들과 머물면서 통합교육을 받았다. 지역사회에서 정신지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결정내리도록 훈련받았다.

  이것은 정치적 권리주장에서 자신의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작은 발걸음이었다. 1992년, 연방정부는 처음으로 두 명의 People First 성원이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프로그램에 의사와 대학교 연구원의 팀에 함께 합류하도록 하였다. 이 자기권리주창자들은 프로그램의 복잡한 과학적이고 의학적인 활동을 사람들이 이해할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학자들과 의사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정신지체를 가진 이 성원들은 그 서비스가 제공되어지는 곳이 어느 곳이든지 간에 이것이 그들과 그들의 동료들에게 효과가 있는지를 판단하였다. 게다가 1993년에서 1996년까지 1백80만불을 지지프로그램에 제공해, 그들이 서비스를 위해서 어떻게 싸울 수 있는지를 자기권리주창자들과 부모들에게 제공되었다.

  여전히 자기권리주장운동의 일부 관찰자들은 단지 정신지체를 가진 사람들이 다른 장애집단과 함께 할 때 그리고 그들의 뒤에 조언을 제공하여 주는 비장애우전문가들이 있을 때만 성공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전문가들은 ‘진정한 자금과 권력과 통제권을 결코 나눌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People First와 덴버에 기반을 둔 장애권리 운동체로서 규칙을 위반하는 전술과 시설에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나가게 하고, 통행로에 접근이 가능하도록 하는 투쟁을 하였던 집단인 ADAPT의 일시적인 협력이 있었다. “나는 정신지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많이 알지 못한다. 다만 내가 배운 것은 정신지체를 가진다는 것은 청각장애우가 된다는 것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것이다”라고 ADAPT의 활동가인 스테파니 토마스는 이야기하였다.

  그들의 경우에 자기권리주창자들은 다른 장애우들이 조언자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테네시에서, ADAPT의 지도를 받으며 People First 성원들은 그들이 주립병원의 환경을 개선시키기 위해 주정부를 고소하였다. 이를 통해 완전한 독립을 위해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다. 테네시의 권리주창자들은 동시에 그들 자신에게 기금을 제공하는 정신지체부서를 고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기금에의 위험에 대한 감정적인 논쟁 후에 베스 시버스와 다른 자기권리주창자들은 자신들이 외쳐대는 것에 대해서 도덕적인 책임감이 있다는 것도 느끼게 했다. (계속)

작성자서동명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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