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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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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풍지를 비집는 살바람에 뱃고동소리가 묻어 들어온다. 밤이 되면서 드세진 바람 탓일까? 울려오는 고동소리가 여늬 때보다 더 아득하다. 영식은 뒤척이던 몸을 슬금 일으켜 창문을 삐금 열었다. 배를 그리며 무심곁에 내다 봤지만 총총한 방범 창살 사이로 보이는 건 때 지난 시장의 을씨년스레 펄럭이는 천막들 뿐이다.

  ‘참, 부두는 창문과 반대 쪽이지..’

  자신의 어이없는 착각에 그만 창문을 닫으려던 영식은 골목 모퉁이 불빛 밑에서 무언가 움직거리는 그림자를 발견하곤 혹 박씨가 아닐까 눈빛을 모았다. 허나 그림자는 한 잔 술에 비틀거리는 낯선 사내였다. 영식은 씁쓸히 지워지는 웃음 속에 그만 허탈한 한숨을 쉬고 만다.

  ‘벌써 올 리가 없지..’

  짠내를 듬뿍 머금은 찬 바람이 방 안을 하릴없이 맴돌단 웅크린 영식의 몸 구석구석을 훑는다.

  예순 두서넛 되었을까. 지금은 쭈글쭈글한 노인네에 불과하지만 박씨의 떡 벌어진 어깨며 가마솥 뚜껑같이 큰 손은 그가 한 때 힘깨나 썼을 법한 일꾼이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케 해주었다.

  그는 영식이 머물고 있는 맞은 편 방에 묵고 있었다. 박씨와 영식이 통성명을 하게 된 것은 영식이 이 곳에 온 지 나흘째 되던 날이다. 그날은 한낮부터 진눈깨비가 내렸는데 쏟아지는 품새가 우산을 써야 되나 말이야 되니 어정쩡해지는 울가망스러운 저녁이었다. 그날 가끔 먼 발치에서 눈빛만 스치던 박씨를 불쑥 그의 방을 찾아온 것이다.

  “청년, 심란한데 술이나 한 잔 하지!”

  며칠 째 자신을 찾는 사람을 기다리던 영식은 훅하니 술 냄새를 풍기는 그가 몹시 반가웠다. 나이도 웬만큼 됐다 싶은 박씨에게 혹 일자리에 대한 정보라도 얻을 수 있을까 해서이다. 영식은 이곳 인천 연안부두로 배를 타러 왔다. 하지만 벌써 여러 날이 지났지만 어쩌다 어부를 구하러 온 갑판장이며 선주들은 영식을 보자마자 고개를 흔들고 가 버렸다. 한쪽 다리를 저는 영식이 뱃일에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잔 한잔 비워져 가는 술잔과 함께 박씨는 영식이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먼 바다에 대해 얘기했고, 고대고리니 독고다이는 듣도 보도 못한 배 이름과 위험스러워썬 고기잡이 일들을 자랑스레 늘어놓았다.

  영식은 바다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게 없었다. 그럼에도 영식은 바다를 몹시 동경했고 그리워 했다. 바다! 끝없이 펼쳐진, 아무 것도 거칠 것이 없는 바다. 그 곳엔 모든 게 다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아무 것도 없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영식이 진정 바라는 것은 사람들의 눈길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곳인 것이다.

  박씨는 감탄스레 자신을 쳐다보는 영식을 보고 뜻모를 웃음을 입가에 슬쩍 베어 물었.

 “일자리 안 나지?”

 “.... 네.”

  “쯧쯔... 몸이 그러니 쉽지 않지, 쉽지 않아... 하지만 이제 날 알았으니 걱정말게나. 아, o가 데리고 타겠다는데 어느 놈이 안 태운데?”

  “예? 정말 그렇게 해 주시겠어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영식이 반색을 하며 되묻자 박씨는 걱정 말라는 듯 자신의 가슴을 툭툭 친다.

  “그럼, 그럼. 이 비철에 나같이 그물일 잘하는 사람 구하는 건 하늘에 별따기야, 별, 용을 사오 백씩 싸 앵겨도 사람이 없다구, 없어. 아. 안강망, 대구리, 돼지그물, 그물이란 그물은 모조리 꾸미는 데야 어떤 놈의 선주가 마다해, 마다길. 자네 하나 쯤이야 그냥 데리고 가는 거지.”

  그날은 둘은 한 방을 쓰게 되었다. 일을 구할 때까지 경비를 아끼자는 박씨의 제안에서다.

  물론 영식도 여인숙에 주민등증을 맡기고 외상으로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던 처지라 두말없이 승낙했다.

  그러나 박씨는 처음 말과는 달리 영식을 데리고 낮이고 밤이고 술만 퍼먹으러 다녔다. 음식값과 술값은 죄다 영식의 몫으로 달아놓고 또 엿새가 훌렁 지나가 버렸다.

  미덥지 못한 영식에게 잠자리와 먹을 것들을 대주던 여인숙과 밥집, 술집 들이 슬슬 눈을치켜뜨기 시작했다.

  오늘도 영식은 집으로 좇아가야 될 판이라며 을러대는 밥집 주인 영자의 잔소리를 들으며 저녁을 한 술 뜨고 들어와 있던 참이다. 하지만 영식이 믿을 사람은 박씨밖에 없기에 아침 나절에 나가 아직 소식이 없는 박씨만을 눈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며 바람결에 묻어 들어오는 파도소리가 더욱 가깝게 들릴 때 박씨가 들어왔다. 그는 애타는 영식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덥잖은 낯빛으로 혀 꼬부라진 소리를 퉁하니 뱉아 낸다.

  “일자린 됐는데.. 배 타기 전까진.. 자네 몸이 그렇단느 걸 알게 해선 안돼. 끅!”

  “예?”

  “용만 받으면 지놈들이 알든 말든 상관이 없단 말야. 아. 식구미 사고 밀린 외상값 다 갚아버렸다면.. 끅... 지 놈들이 죽일 꺼야, 살릴 꺼야 허니까 인사두 앉아서 하구. 내 알아서 적당히 바람을 잡을 테니까 어쨌든 일어서는 짓까진 몰라두 절대로 걸어선 안돼 만일 용받기 전에 들통나면 죄 도로아미타불이니깐. 젠장. 어떻게 된 게 요즘은 선원이 남아 돈다는 거 아냐. 재수가 없을래니까... 여튼 배 탈래면 내 말 명심해야돼. 그리고 말하기 좋게 자넬를 내 조카라 했으니깐 실수없도록 하고. 내가 자네 외숙이란 말일세. 알아들었나. 끄윽!”

  가슴을 졸였던 열 며칠의 시간은 이미 영식의 선택권을 갈가리 찢어 버렸다. 자신을 보고 되돌아가는 사람들의 경멸에 찬 표정과 야유에 성치 못한 몸뚱아리를 깊은 바다에 던져버리고 싶었던 영식은 거침없는 박씨의 말에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이튿 날, 영식이 박씨가 이끈 낯선 술집에 엉덩일 붙이고 앉아 박씨와 술 한 병을 다 비워갈 무렵 사십 중반쯤 된 사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틈틈이 문 쪽을 살피던 박씨는 기다렸다는 듯 후다닥 일어나 누가 끼어들세라 셀레를 놓으며 사내를 술좌석에 끌어다 앉혔다.

  “자, 갑판장님. 우선 목부터 축이시구. 하여튼 갑판장님은 대단혀. 요 며칠동안 오과부집서 살았대며?”

  “그깟 이삼 일 날새는 거야 우습지, 우스워, 아, 기집 못 본지가 얼만데?”

  “허, 오과불 아에 안방에 들어 앉히시지?”

  “글쎄! 지금 그럴까 생각 중인께 넘보지 말드라고!”

  “아이구. 대단하셔. 참, 얘가 배 탈 내 조카여. 뭐 해. 인사드리지 않구!”

  “네. 저 이영식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엥? 그래. 그래. 쓸만한 것 같구만, 잘 해보자구.”

  “그럼. 그럼. 이만한 육덕이면 호랭이도 때려 잡지. 얜 고대고리도 탔었구, 대구리도 이년이나 탔다구. 주모-! 빨리 안주 갖고 와! 우리 갑판장님이 얼마나 바쁜 몸인디.-”

  술을 받는 사내는 이미 전주가 있었던 지 말할 때마다 혀가 안으로 말ㄹ려 들어갔다. 박씨의 설레발에 멋모르는 사내는 자기를 한껏 추켜주자 벌개진 목을 힘껏 치켜 세운다.

  박씨는 그런 갑판장에게 연신 술을 치다가 급기야 술이 꼭지까지 오른 갑판장이 영식의 주민등록증을 달라고 손을 내밀자 덥썩 그 손을 움켜 잡고는 너스레를 떤다.

  “아. 쯩은 여인숙 주인이 갖고 있지. 장사 한두 번 하요. 어여 일어나 나랑 가서 찾아옵시다.”

  “엉? 어 그렇지. 그런데 얼마나 밀려...있는...거야?”

  “아, 얼마든 어차피 용으로 나갈 긴데 뭘 따지나. 어서 계산하구 찾아오자구. 조칸 여기서 친구 만난다 했지. 내 갑판장님 모시구 금방 다녀올께.”

  “네네. 그렇게 하세요. 삼촌!”

  박씨의 정신 빼는 설레에 조심스럽게 일어난 영식도 한 마디 거들었다. 다시 보자는 듯 얼핏 손을 흔든 갑판장이란 사내가 곁에서 부추기는 박씨를 따라 비척비척 술집을 나서자, 잔뜩 긴장하고 있던 영식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리고 맘 편히 술 한 잔을 비웠다.

  창 밖에서 기웃기웃 몸을 트는 크고 작은 어선들 사이로 어둠이 내려 앉고 있었다. 금방 온다던 박씨는 기척도 없고 대체 뭐가 뭐지 세세한 바닷사정을 모르는 영식은 슬금 밀려드는 어둠처럼 켜켜이 쌓여가는 불안을 견디다 못해 주모에게 잠깐 여인숙에 다녀온다고 했다. 하지만 계산을 안한 상태여서 그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돈 한 푼 없는 그는 꼼짝없이 술집에 잡혀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박씨는 주점을 닫을 밤이 이슥한 때까지도 오지 않았다. 열이 머리 끝까지 오른 주모는 결국 영식의 허리춤을 움켜잡고 여인숙으로 갔다.

  “박씨? 주민증?”

  여인숙 주인이 아차하며 무릎을 친다. 박씨는 여인숙 주인에게 영식이 내일부터 갑판장의 배를 타니까 선원수첩 만들고 항만에 신고를 하려면 먼저 주어야 한다며 주민증을 받아다 갑판장을 준 것이다. 물론 갑판장에게선 조카의 식구미를 준비해야 한다며 용을 모조리 받아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밥집과 술집 주인들이 게거품을 물고 엉켜붙었다. 쏟아지는 발길질과 악다구니에 몸을 맡긴 영식의 귀에 아득히 뱃고동이 울리고 있었다.


* 고대고리 : 일본어에서 파생된 말로 소형(3,4인용) 저인망 어선, 갯가에서는 일상적으로 쓰고 있음.
* 독고다이 : 국어와 일본어가 합성된 말로 중국 영해나 일본 영해에 몰래 들어가 고기를 잡아오는 소형 쾌속 어선(3,4인용)
* 용 : 선금(계약금)
* 식구미 : 배에 타기 전 준비하는 일용품을 준비하는 돈

작성자원명희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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