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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에 다시 들어가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어”

[번역 연재] 미국 장애우 운동사 (23) 젊은 장애우들의 시설 탈출하기

본문

  동정은 싫다
  제8장 요양원으로부터 나오기 (Up from the Nursing Home)

  사회에서 아무런 지원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가족들에게 부담이 된 장애우들은 시설로 보내졌다. 그러나 시설에서 인간다운 생활을 누리기란 불가능했다. 줄기찬 장애운동의 성과로 정부는 시설의 소규모화를 추진했고, 사회복지사가 장애우와 함께 생활하며 자립생활을 돕는 공동생활가정 모델도 하나둘씩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나는 인간인가?

  제프 군더슨의 목소리는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막 요양원으로 보내지려는 찰나였기 때문이다. 그 요양원은 뇌성마비 장애우인 그가 18세부터 27살이 될 때까지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2곳 중의 한 곳이었다.

  “내가 만약에 다시 그곳에 들어가게 된다면, 나는 차라리 죽어버리겠다”는 것이 솔직한 그의 심정이었다. 그곳에서 약 9년 동안 지냈지만, 다시 그 갈색 벽돌 건물로 돌아가는 것은 그에겐 악몽과 같았기 때문이다.

  군더슨은 부모가 이혼한 이후에 위스콘신의 베로이트 요양원으로 보내졌다. 그의 어머니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다 자란 아들까지 돌볼 수 없었다. 대신 그를 돌봐줄 사람을 고용하는 비용은 어떠한 보험에 의해서도 지원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사람 하나를 두는 것이 평범한 회사원인 그녀의 수입으로서는 벅찬 부담이었다.

  그런데 요양원에 들어서는 순간 군더슨 앞에는 앰블런스가 놓여 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누군가의 죽음이 눈앞에 다가와 있다는 나쁜 징조였다.

  군더슨이 살았던 2개의 요양원은 젊은이를 위한 요양원이 아니라 원래 노인들을 위한 시설이었다. 군더슨은 다른 환자나 노인들과 똑같은 관리를 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시설 직원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저녁 7시에는 잠자리에 들도록 강요받았고, 방을 함께 쓰는 80세 노인에게 음식도 맞춰야 했다. 그래서 그가 주로 먹었던 음식들은 부드럽기만 하지 간도 제대로 안맞춰진 죽 형태의 음식이 대부분이었다.

  군더슨은 그 두 시설에서 직원들에게 많은 체벌도 받았다고 토로한다. 어떤 때는 직원들이 그를 침대에 묶거나 찬물에 처넣기도 하였다. 뇌성마비 장애우인 그에게 추위는 근육을 더욱더 경직시키기 때문에 무엇보다 심한 고문이었다.

  또 어떨 때는 자신의 배설물들과 함께 누워 있어야 했다. 그러나 시설 직원들은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도 알지 못했다.

  “너무나도 자주 나는 자살을 꿈꿨다. 그리고 실제로 자살을 시행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고 그는 나중에서야 고백했다.

  요양원 안에는 방부제 같은 병원 냄새가 참을 수 없을 만큼 진동했고, 복도의 불빛도 너무 밝았다. 군더슨은 때로 “나를 기억하세요”하면서 반갑게 인사하는 직원들을 만나기도 했다. 병원침대에 쭈그러져 누워 있는 사람이 있는 한 어두운 방에서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군더슨은 도우미와 함께 지하로 내려갔지만, 예전에 방을 함께 썼던 조지라는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조지는 가버렸다고 그는 중얼거렸다. 아마도 그 사람은 더 이상 이곳에서 살고 있지 않은 것 같다면서.

  다시 밖에 나와서, 군더슨은 근처 식당에 가서 햄버거를 하나 먹으면서 쉬었다. 이 때 하얀 모자와 에메랄드빛 녹색 스웨터를 입은 노인이 한 명 들어왔는데, 이 사람이 조지의 아버지였다. 그는 매일 요양원에 와서, 아들에게 음식을 먹였다. 그리고 그것은 조지가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군더슨은 곧바로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조지는 라디오를 듣고 있던 바로 그 사람이었던 것이었다. 군더슨은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조지는 아마도 내가 그와 함께 지냈다는 것을 기억할 거예요”라고 그는 말했다.

  후에, 전화상으로 조지의 아버지는 아들이 태어나면서부터 병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조지의 어머니는 사회복지사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 그들이 사회복지사와 함께 아들을 가정에서 돌볼 수는 없었을까? 그러나 그 어머니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아들은 옷도 일일이 입혀주어야 할 정도로 혼자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의사소통도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요양원의 직원들이 아들을 매우 잘 돌보아준다고 칭찬했다.

  그러나 단지 어머니와 몇몇 사회복지사들만이 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한 간호사는 최근에서야 그림을 이용해서 그와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조지는 물을 마시고 싶으면 물을, 음악을 듣고 싶으면 라디오를 가리킬 수 있었다. 반면에 치료사는 조지에게 공을 굴려주고, 그에게 색깔이 있는 블록을 주었다. “그들은 아직도 아이들과 같은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다”고 조지의 어머니는 말했다. 그러나 조지는 그 때 마흔 다섯 살이었다.

  군더슨은 36살. 그는 이제 방 두 개가 딸린 아파트에서 정부 보조금으로 살고 있다. 그는 일주일에 3일은 시설에서 박스를 접는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생활지도사와 아파트를 함께 사용하는데, 도우미인 샤운 보이드는 그가 옷을 입고, 목욕을 하고, 화장실을 사용하고, 음식을 만들어 먹고, 집안일을 하고 시내에 나가는 등의 모든 일을 도와주었다. 보이드는 군더슨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그들은 함께 밥을 먹고, 보이드의 중고차로 나가서 밤늦은 시간까지 함께 영화를 보았다.

 

 요양원으로 다시 옮겨지는 젊은 장애우들

  18세에서 64세까지의 연령대의 장애우들은 요양원 원생 중 10%를 차지하고 있다. 정부 당국의 발표만 해도 1987년의 경우 약 14만 8천명 정도나 된다.

  “요양원에서 그들은 어디에 살 것인가, 누구와 살 것인가, 무엇을 먹을 것인가, 언제 먹을 것인가 하는, 보통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기본적인 권리를 잃어버리고 살고 있다”고 위스콘신의 지지자연합의 탐 흘라바섹은 주장하고 있다.

  “만약 이러한 일이 일반인들에게 일어난다면, 우리는 끔찍한 지옥이라고 소리지르면서 당장 법원으로 찾아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언제나 이렇게 대하고 있으며, 그들이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것이 정당하다고 느끼고 있다.”

  요양원은 장애를 가진 젊은이들에게 절망과 고립을 상징하는 새로운 블랙홀이 되고 있다. 오늘날 주립시설보다도 2배나 많은 젊은이들이 요양원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시민권적인 보호나 태도의 변화를 얻어내기 위해 애써 온 장애권리운동의 싸움들을 비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요양원에서 생활하고 있는 대부분의 장애우들은 정신지체와 뇌성마비와 같은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새로운 거주자 집단은 의료적인 기술이 덜 발달한 몇 십 년 전이라면 벌써 죽었을 정도로 심한 장애를 가지고 있는 젊은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1970년대에 정부는 주립시설의 열악함 등의 여러 가지 문제가 신문과 소송사건을 통해서 이슈화가 되자, 대형 시설을 폐쇄하고 시설의 소규모화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원생들은 그냥 다른 요양원에 옮겨지기도 했다. 주립시설 발달장애우의 수는 71년 19만 5천 명에서 90년에는 8만 8천 명으로 수가 급격히 떨어졌지만 요양원에 있는 18세에서 64세까지의 젊은 발달장애우들은 같은 기간에 3배나 증가했다는 사실도 그 증거가 될 것이다.

  이렇게 젊은 장애우 중 일부는 스스로 혹은 다른 가족이 그곳을 더 좋아하기 때문에 여전히 요양원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다고 낸시 한센은 생각한다. 그는 군더슨과 같은 사람들이 자신의 아파트에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심지어 대부분의 중증 장애우들은 요양원 밖에서 다른 사람들의 지원을 받아서 요양원을 경영하기도 한다고 그는 밝히고 있다. 전동휠체어와 혁신적인 공동생활가정, 그리고 일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은 이제 지금까지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독립적인 삶을 허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건강하다면 필요없는 값비싼 의사들과 간호사들을 요양원이 고용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독립적으로 사는 것이 실제로는 예산이 덜 든다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군더슨은 요양원에서 외롭고 비참한 9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는 한 시설에서 영원히 있다가 이대로 죽으리라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던 지난 1981년 3월에 한 지역사회 사회복지사는 그에게 다가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최초의 장애우가 되기를 원하세요? 그런 프로그램이 있는데”하고 제의했다.

  이런 질문을 받고 군더슨이 첫 번째로 느낀 것은 두려움이었다. 그 때까지 의사들이나 사회복지사, 그리고 가족들이 여러 차례 말해왔던 것처럼 스스로 시설 밖에서는 결코 살 수 없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내가 늘 내보내 달라고 요구는 했지만 절대 나가서는 살 수 없고,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왔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도 이러한 의구심을 증폭시켜 나갔다. 요양원에 있는 한 사회복지사는 그에게 집보다 시설이 더 좋다고 말해 다른 사회복지사와 말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군더슨이 시설 밖으로 나가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정신적으로 지지받기를 원했을 때, 요양원의 심리학자도 그에게 회의적인 말을 했다. “당신은 결코 혼자의 힘으로는 어떠한 일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그러나 군더슨이 밖으로 나오는 것을 누구보다 못마땅하게 생각한 사람은 그의 어머니였다. 그녀의 눈에, 아들은 언제나 의존적이고 태어날 때 비극적으로 뇌신경이 손상된 아이였다. 그녀는 자활할 수 있는 아들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군더슨이 그의 아파트에서 살게 된 지 몇 년이 지난 후의 어느 날, 저녁 식사 시간에 그녀는 고기를 일일이 썰어 포크로 찍어서 그의 입에 넣어주려고 했다. 그러나 군더슨은 그가 혼자서도 먹을 수 있다고 말했다.

  군더슨은 장애우와 노인들이 요양원을 나와서 자신의 아파트나 공동생활가정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적으로 한 위스콘신 지역사회 선택 프로그램의 첫 번째 이용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성과가 가장 성공적이었다. 약 1만 8천 명의 장애우들이 이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았다. 그러나 아직 5천 8백 명이나 되는 대기자가 가족과 함께 살면서, 혹은 시설에 살면서 자신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라리 달로 이사가고 싶어”

  또 한 사람, 제임스 리는 휠체어를 사용해야 할 정도의 심한 뇌성마비 장애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공무원들에게 일정 정도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가족이나 친구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그가 있었던 밀워키의 요양원은 1977년에 개원한 시설이었는데 새벽에 일어났는데도 그를 도와줄 인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침대에서 내려오기 위해서 정오까지 기다리는 일도 있었다.

  13살부터 리는 주립시설과 요양원에서 살았다. 밀워키 요양원의 몇 명 안되는 젊은이 중의 한 명이기도 했지만 리는 그곳에서 떠나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이 빙고를 너무 많이 해”라고 리는 불평하였는데, 그는 다른 사람이 옮겨주지 않는다면 게임장면을 계속 지켜봐야만 했었기 때문이다.

  또 밤에도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간호사들은 80세 노인인 룸메이트 때문에 밤새 들락날락거렸기 때문이다. 리는 옷의 대부분을 도둑맞기도 해서 기부물품 가운데 들어온 옷을 입어야 했다. 리는 “나는 달로 이사가고 싶어”라고 하소연하곤 했다. 그러나 그가 독립을 할 수 있으려면 침대에 들어가고 나오고 식사를 준비하고 집안을 청소할 때 도와주는 도우미를 필요로 한 것이 사실이다. 결국 1985년에 그는 아파트를 분양받을 수 있는 대기자 명단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밀워키 같은 큰 주에는 독립적인 삶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아파트를 분양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였다. 밀워키 주 공무원인 마리아 레드거는 일단 이런 아파트에 들어가면 그 사람들은 죽기 전에는 거의 이곳을 떠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주의 재정상 장애우들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이기 어려웠으며, 휠체어가 접근 가능한 아파트도 거의 드물었다.

  레드거가 리를 발견하고, 그가 38번째 생일을 맞기 전에 시설에서 나올 수 있게 하겠다는 약속을 받은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그러나 2년 동안 매일매일 이러한 진전사항을 확인해야 하는 인내력이 필요했다. 리가 있던 요양원이 아예 없어지게 되자 레드거는 리가 집이 없는 홈리스가 될 것 같은 절박한 상황 때문에 리의 이름을 대기자 명단의 가장 맨 위에 올려놓았다. 몇 년 동안 리스트를 기다리는 중에도 위급 상황은 이렇게 아파트 분양순서를 바꾸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때때로 냉정한 규정 때문에 요양원에 그냥 남아 있어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파멜라 에릭슨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에릭슨은 자신에게 적당한 휠체어를 얻을 때까지 요양원을 떠날 희망이 없었다. 그러나 뇌성마비장애우인 에릭슨은 생기발랄하고, 의사소통도 가능했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척추측곡(척추가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굽는 병 : 역자 주) 때문에 앉아 있는 자세를 똑바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휠체어가 필요하였다. 이 특별한 휠체어는 약 4천달러 정도 했다. 그런데 위스콘신 주의 의료보장제도는 일을 하거나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데 도움이 된다고 증명하지 않으면 요양원에 살고 있는 사람의 휠체어까지는 지급해 주지 않았다.
 


 “나도 사생활을 갖고 싶다”

  에릭슨은 커다란 바퀴가 달린 나무 수레에 누워서 장장 16년간을 요양원에서 보냈다. 이것은 그녀에게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필자가 밀워키의 요양원에서 에릭슨을 만난 날, 그 수레는 텔레비전 앞에 놓여 있었다. 다른 동료들은 대부분 식물원을 구경하러 갔는데, 그 수레는 너무 커서 밴에 실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가 갖고 있는 유일한 외출에 대한 기억은 5년 전 누군가 앰블런스를 불러서 밖에 데려갔을 때뿐이다. 그 밖에는 병원에 간 정도였다. 똑바로 앉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보내기 때문에, 에릭슨은 장이 막혀 있었다. 당시 의료보장세조 상으로는 그에게 필요한 휠체어를 제공해 주지 못한다면서도 보장구를 사용하지 못해 생긴 질환을 치료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은 또 지불하고 있었다.

  결국 1990년 11월, 법원은 의료보장제도에 따라 휠체어에 들어가는 비용을 지불하도록 명령했다. 이 결정은 곧 현재 살고 있는 이 장소를 떠날 수 있는 권리를 에릭슨에게 제공하는 것이었다. “에릭슨은 교회와 상점에 가고 싶어한다. 이것은 의미있는 삶을 위한 필수적인 권리다”라고. 심지어 가족과 함께 살던 장애우들조차 부모가 죽고 나면 시설에 들어가도록 강요받는 것과 투쟁해야 했다.

  암투병 중인 헬민은 자신이 죽고 나면 자식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걱정하고 있다.

  그녀를 돌보는 어머니 버지니아는 1층에 살고 있다. 집에서 살면서 리차드는 역시 뇌성마비 장애우인 여자친구와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고, 보호작업장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진정으로 존중한다. 나는 이 사랑을 버릴 수 없다. 그러나 이 일이 요양원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녀의 두려움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재키의 경우를 보면 고등학교도 졸업해서 읽고 쓰고 음식을 만들 수 있고, 혼자 버스도 탈 수 있었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9년 전에 죽자, 엄혹한 요양원에 보내졌다. 이 요양원에서 그녀는 도둑질, 학대, 원하지 않는 성접촉과 싸워야 했다.

  그런데 그녀가 이 시설을 떠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동생을 시설에서 나오도록 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그녀의 언니는 동생이 집에서 살 때 보다 못하는 것이 많아졌다고 분노했다.

  ‘나는 내 사생활과 자유를 가지고 싶다. 이곳에서 나가고 싶다“고 재키는 거듭 호소했다. (계속)

작성자서동명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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