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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일기] 고향 어귀에 여전히 서 있는 느티나무가 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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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〇〇부모님께

  모두들 어렵다고 합니다. IMF 시대 창졸간에 맞게된 환란의 북새통에서 우리는 요즈음 직장동료, 심지어 부모 형제들 간의 결별도 마다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도시의 매몰차고 사나운 이별의 모습들을 봅니다....

  아픈 시름, 바쁜 일상에서 잠시 손 놓으시고 제1회 파랑새 캠프에 참여해 주세요. 집에선 늘 갓난아이였을 내 자녀가 복지관에선 얼마나 의젓하게 잘 하는지 지켜보시고, 그동안 고생하는 아내에게 내색 못하셨던 마음을 이번에 어깨 한번 다독거려 주셔서 진한 감동을 주세요. 밤새 술을 마셔도 토해내지 못했던 가슴 속 깊은 곳의 가슴앓이를 아버님들끼리 술  한잔 권하며 서로 상처를 나누어 보세요....’

  초대의 글 서두에서처럼 어렵고 힘든 시기여서 아버님들의 참여도가 미지수인 체트캠프는 시작되었고 저녁 8시, ‘가정에서의 아버지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보호자 교육을 진행하기 위해 강당에 들어선 순간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더러는 낯익은, 더러는 낯선 분들이 아이와 함께 혹은 쑥스러워 한쪽 모퉁이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계시는 아버님들을 뵈면서 난 속으로 ‘초대의 글이 성공했나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자녀를 두신 아버님, 감사합니다’ 환호를 외쳤다. 그래도 80년대와 90년대에 눈에 띄게 달라진 모습 중에 하나가 아이들을 직접 데리고 내관하는 아버님들이 많아졌다는 점이다.

  개관 10년 만에 처음 시도한 이번 캠프의 의미에 맞춰 개관 초에 다녔던 익용이 아버님이 강사로 초대되어 유익한 시간이 되었다. 내 개인적으로는 내가 지도했던 아이가 저렇게 성장하여 고등학교 1학년의 어엿한 모습으로 아버지, 어머니를 따라 옛 자리를 찾아 와 있는 것으로도 충분한 감동이었다. 날 몹시 당황하고 힘들게 했던 아이, 대신에 오래 기억나게 했던 아이, 상담할 때 자주 선례로 이야기 했던 아이. 그랬다. 내 곁을 떠나 있는 사람들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관심 기울이고자 했던 노력 — 살아가면서 꼭 지키고자 했던 자신과의 약속이었고 특히 복지관 언어치료실을 이용하였던 많은 아이들을 가능하면 다 기억하고 추수지도 하고자 수시로 명단을 뒤적이며 이름들을 상기하곤 했다.

  그래도 새로이 명단이 늘어가는 만큼 연락이 되지 않는 아이들의 수도 점점 늘어가고 있다. 오늘 이렇게 장대비 속에도 기꺼이 와 주신 익용이 부모님께 감사를 드린다. 어린이날 어버이날에 전화 한통, 편지 한 통의 챙김이 꾸준한 연결의 고리를 만들어 준 것 같다. 가끔은 삐뚤빼뚤 써 보낸 카드, 아이를 대신한 어머니의 전화들이 내게 더 할 수 없는 힘이 되기도 한다.

  92년 겨울, 아침 9시면 잠도 깨지 않은 얼굴로 치료실에 떠밀려 들어와 내내 칭얼거리던 4살의 언어발달지체였던 기태는 이제 방학이면 꼭 장미 한 다발을 들고 찾아오는 제자가 되었다. 어쩜 평생을 어눌하게 살 뻔 했던 아이를 사람 만들어 주었으니 그 은혜를 잊어선 안된다고 1년 6개월의 과정을 마치고 종결한 이후 1년에 두 번씩 온 가족이 함께 찾아오신다. 지각이나 결석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아 선생님이 무서워서 결석을 못했고 선생님이 무서워서 가정과제를 꼬박했던 때문에 종결이 앞당겨졌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낸 후 그렇게도 고마웠다고 말씀하신다. 적당히 다녔으면 아마 그 땐 편했어도 지금쯤 후회할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내 계획에 열심히 협조해 주셨던 부모님들로 기억되는 분이다.

  지난 해 9월에 개장한 수영장은 많은 역할을 한다. 장애우와 비장애우가 서로를 인식하는 매우 자연스러운 매개체 역할을 한다. 함께 수영하고 함께 차를 타고 함께 대화를 나누며 서로 가까워져서 곳곳에서 매우 흐뭇한 모습을 보게 된다. 전에 복지관을 이용했던 아이들, 부모님들이 수영장에 오셨다가 본관에 들러 어떤 선생님이 남아 있나 찾아보게 되고 나는 요즘 그분들을 맞이하는 새로운 역할을 하는 셈이다. 한 우물을 판 몫을 하는 셈인가. 고향에 가보니 여전히 서 있는 느티나무의 역할 같은 것...

  요즘 우리 언어치료실은 사랑의 향기와 눈물로 홍수가 날 정도다. 이번에 들어오신 신규 선생님들은 유난히 아이들을 더 예뻐해 아이들을 안고 다니고 업고 다니고 뽀뽀하고 엄마가 우울하면 같이 동화되어 울고 아이가 좋아지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울고... 타성에 젖거나 지쳐 있는 내게는 더할 수 없는 신선한 충격과 자극이 되고 있다. 그래 바로 그거야, 특수교사란 마치 대단한 인물처럼 바라보거나 스스로 자만심 갖는 경우가 많은데 보다 중요한 건 그거야. 아이들을 정성껏 사랑하고 진솔한 것, 정성을 다하는 것, 자만하지 않는 것.

  둘째 오빠는 조카들에게 고모가 하는 일이 왜 값진가를 이렇게 표현하셨단다. ‘사람이 상대방과 대화를 하려면 상대방의 반응이 있어야 신이 나고 의미가 있는 거라고. 쉽게 반응하지 않는 아이를 붙잡고 저렇게 신나서 가르치는 건 대단한 인내가 필요하거든.’

  2~3개월 만에 한 번씩 앓아내는 우울증, 가슴앓이, 그런 직업병(?) 같은 걸 앓고 있다는 걸 아마도 헤아리셨나 보다. 지난 주말에는 백양사에 다녀왔다. 백양사는 계단이 높지 않고 절 옆에 작은 찻집이 있어 자주 찾는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산사에서 마음을 비워 내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아이들한테 부렸던 욕심들, 좀체로 변화되지 않는 아이한테 느끼는 답답함, 엄마들의 아픔의 전이, 삶의 무게가 버거워지는 엄살 등을 비우느라고.


글/ 백순이 (전북장애인종합복지관 교사)

작성자백순이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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