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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는 또 다른 나의 다리일 뿐! 병약함의 상징에서 자존심과 자유의 상징으로 탈바꿈한 휠체어

[번역 연재] 미국 장애우 운동사(20) 동정은 싫다 제 7장 선정적인 네온 휠체어(The screaming Neon Wheelchair)

본문

저자: 조셉 피 쉐피로-미국의 대표적 일간지인 유에스월드앤리포트 기자로서
      사회정책에 관한 다수의 기사를 썼다. 그는 미국 알리샤 페터슨 재단의 장학금을
      받아 미국장애우 인권운동을 연구해서 이 책을 썼다.
역자: 서동명-서울대사회복지학과 대학원에 재학하고 있다.

크고 무거워 불편해 보이던 기존 휠체어 모델은 휠체어를 탄 장애우가 몹시 ‘아픈’사람이라는, 그 사람의 병약함을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자신의 장애를 적극적으로 극복하고 장애를 갖기 전과 같이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즐겁게 살아가려는 장애우 당사자의 필요에 의해 휠체어에 대한 그런 인식은 깨져 나갔다. 조금씩 발달된 부대 산업의 덕분으로 휠체어는 즐겁고 산뜻한 것으로 재창조되었다. 장애에 대한 자존심의 상징으로 변모되면서 더 가볍고 편리한 휠체어들이 장애우들을 자유롭게 했다.

  스텐레스 발을 가진 공룡은 싫어!

  장애권리운동사의 한 페이지에 마릴린 해밀턴의 이야기도 당당히 일정 부분을 차지할 수 있다. 그 이야기는 해밀턴이 캘리포니아의 산등성이를 행글라이더를 타고 비행하던 중 불행한 사고로 곤두박질쳤던 1978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사고로 그녀는 척추가 부러졌으며, 하반신마비 장애우가 되었다.

  해밀턴은 3주만에, 다른 사람 같으면 적어도 세 달은 걸렸을 만한 재활치료를 소화해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의사가 제공해준 거대한 휠체어를 만나게 됐다. 나중에 이것을 해밀턴을 ‘스텐레스 발을 가진 공룡’이라고 불렀는데 커다란 덩치 때문에 그녀의 날렵한 발이 되기에는 매우 불편한 점이 많았다.

  해밀턴은 운동을 매우 좋아했으나 이 휠체어는 너무나 무거워서 테니스 코트에서도 발길을 돌리게 만들었다. 이건 안 되겠다 싶어 해밀턴은 예전 행글라이딩을 함께 했던 동료인 돈 헬만과 짐 오카모토를 찾아 나섰다. 해밀턴의 사정 얘기를 들은 그들은 한 농장의 오두막에서 달라진 그녀의 신체조건에 알맞은 휠체어를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행글라이더에도 탈 수 있는 초경량 휠체어를 만들어달라고 해밀턴이 부탁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 두 사람이 내놓은 것이 26파운드짜리의 가볍고 튼튼한 휠체어였다. 일반적인 휠체어가 50파운드인데 비해서 그 절반 무게밖에 안 나가는데다 보면 탐이 날 정도로 멋진 모습이었다. 다른 일반 휠체어들이 크고 모서리가 각진 것인데 해밀턴의 ‘스카이블루 휠체어’는 매끄럽고, 산뜻한 모습이었다. 마치 경주용 자전거와 같이 날렵했다.

  해밀턴, 헬만, 그리고 오카모토의 이 소박한 시도는 휠체어산업에 한 획을 긋는 것이었다. 경량의 소형 휠체어 제조사업에 뛰어들어 이들이 내놓은 ‘퀵키(Quickie) 휠체어’(상표명)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어서 만드는 즉시 날개돋힌 듯 팔리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해밀턴은 자신이 첫 번째 만난 스텐레스 휠체어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기묘한 반응을 증오하였다. “나는 예전과 전혀 다르지 않다. 다만, 움직이는 방식이 약간 다를 뿐이다”라고 실제로 그녀 자신은 생각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연스럽게 그러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크고 번쩍이는 휠체어는 보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으며, 그녀와 보통 사람들 사이를 결정적으로 가라놓는 장벽이 되어 가로막고 있었다. 친구들은 그 기묘한 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녀를 보고 또 그녀의 앞날을 떠올리며 어두운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해밀턴의 얼굴은 언제나 그 반대였으며, 자신에 찬 모습으로 도리어 그들을 격려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퀵키휠체어는 그런 그녀의 표정에 잘 어울리는 몸의 일부처럼 되었다.

  해밀턴이 새롭게 만들어낸 휠체어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과 그 주위의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였다. 크롬대신에, 해밀턴의 휠체어들은 따뜻한 색깔의 갖가지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휠체어를 사는 장애우들은 카나리아빛이나 사과빛, 번쩍거리는 형광색 등의 자신만의 색을 선택할 수 있었다. 만약 진한 분홍색을 요구한대도 기꺼이 진한 분홍색이 칠해진 휠체어가 배달됐다.

 

  병약함이 아닌 자존심의 상징으로

  ‘선정적인 네온 휠체어들’. 그녀는 자신이 선보이는 새 휠체어를 이렇게 불렀다.
Quickie 휠체어는 그것을 사용하는 장애우와 그런 장애우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하였다. 휠체어 사용자들이 병약하다든가 하는 사회 일반적인 생각도 자연스럽게 꺽어 놓았다. Quickie 휠체어 사용자들은 결코 병약하지도 않으며, 동정의 대상도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 자체로 보여주고 있었다.

  해밀턴의 휠체어들은 장애권리운동을 일으킨 원동력이 되었다. 1960년대에 약 50만 명 정도의 휠체어사용자가 있었으나 1980년대에는 1백20만 명 정도로 늘어났다. 그들 대부분은 20년 전에는 일반적이었던 수용시설이나 휴양소가 아닌 곳에서 살고 있었지만 보다 더 확대된, 최대한의 자립생활을 원했다. 그들은 인도와 차도 사이의 연석 제거, 버스 내 리프트설치, 장애우전용 주차 공간 등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대학에 가고 일자리를 잡았고, 결혼을 하고 새로운 가족을 형성하기를 기대하였다.

  해밀턴의 화려한 휠체어들은 더 이상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이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만들어 나가는데 일조하였다. 그 당시 화사들은 하반신마비 장애우들에게 닫혀있는 곳이 많았으며, 빌딩들도 여전히 휠체어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곳이 많았다.

  그러나 해밀턴의 Quickie 휠체어는 걷지 못하는 것이 동정의 대상이라거나, 다리를 잃어버린 것이 성생활의 끝을 의미한다는 잘못 된 생각을 조금씩 바로잡아 주었다.

  해밀턴은 휠체어를 재창조하였다. 그녀는 의료적인 장비를 사용하여 휠체어를 즐겁고 산뜻한 것으로 만들었다. 전 세계적으로 병약함의 상징으로 되어있는 휠체어를 장애에 대한 자존심의 상징으로 변모시킨 것이다.

  휠체어가 어떻게 ‘해방’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을 해밀턴에게 이해시킨 사람은 전신마비를 가지고 있는 친척 아저씨였다. 빌 아저씨가 고등학생일 때, 자동차 사고로 목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재활 의학은 단지 그의 신경을 조금 돌아오게 하는 정도의 회복만을 가져왔을 뿐이다.

  그런데 그 당시 나무와 버들가지로 만든 휠체어는 딱딱하고 사각형으로 각이 져 있었으며, 높은 등받이가 있었다. 게다가 너무나 폭이 넓어서 거의 모든 문을 지나갈 수가 없었으며, 이 때문에 장애우들은 사회에서 그다지 소용없는 성원들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 휠체어는 활동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집에 틀어박혀 있거나 시설 공간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으로만 적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90파운드의 무게가 나가는 빌의 첫 번째 휠체어는 너무나 무거워서 혼자 힘으로는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휠체어를 움직이게 하기 위해 누군가 다른 사람을 돈을 주고 고용해야만 했다. 해밀턴네 집안에서는 하루 24시간 그를 보조하기 위해서 시중드는 사람을 두 명이나 고용해야만 했다. 그래도 빌은 로스엔젤레스 대학과 법과대학원에 갔다.

  그리고 졸업 후 포도와 과일나무 농부들을 성공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어떻게 가족들의 지지가 그를 장애우로서 성공할 수 있도록 하는가 하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빌 해밀턴은 조카 마릴린을 환영하였다. 마릴린은 과일을 따는 동안에는 빌과 함께 일했으며, 매년 몇 개월 동안은 장애우 테니스 순회 강습을 하면서 살아갔다. 그 영역에서 그녀는 최근에 새롭게 부상하는 스타였으며, 모든 사람들은 그녀의 가벼운 휠체어에 대해서 고마워하고 있었다. Quickie 휠체어의 출현은 휠체어스포츠세계에서 그녀가 성공하도록 도와주었다.

 

  가벼운 휠체어=자유!!

  누구보다 휠체어 운동선수들이 해밀턴의 가벼운 휠체어를 가장 절실하게 원하는 사람들이었다. 접을 수 있는 Quickie 휠체어는 1984년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휠체어가 단지 스포츠선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휠체어가 가볍다는 것은 자유를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차를 운전하는 사람들이 쉽게 접어서 다른 도구없이 차에 실고, 운반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가벼웠다.

  이런 Quickie 휠체어는 인기를 끌 수밖에 없었고 10년 내에 Quickie는 1년에 4천만 불이 넘는 사업체로 성장했다. 1986년, 모든 휠체어회사들이 너도나도 Quickie의 가벼운 휠체어를 모방했다.

  휠체어 디자인의 변화가 장애우의 혁명적인 자아상을 형성하는데 어떻게 기여했는가 하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은 몇 가지 휠체어의 역사를 아는데 도움을 준다.

  1918년에 탄광사고로 하반신마비장애우가 된 한 남자는 캘리포니아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하는 친구를 찾아와서, 그에게 가벼운 휠체어를 디자인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1932년에 이 엔지니어는 접어서 차에 손쉽게 실을 수 있는 휠체어를 만들었다. 이것은 이들이 휠체어 제조회사를 시작한 이래로 가장 눈부신 발전이었다.

  하반신마비장애우인 허버트 에베레스트와 그의 친구 기계공학자 래리 제닝스도 디자인을 변경하여 90파운드의 무게가 나가던 기존의 휠체어의 무게를 50파운드로 낮추었다. ‘에베레스트 & 제닝스(E & J)’라는 이 회사는 이후 50년 동안 휠체어 시장을 독차지했다.

  1991년 이 회사의 새로운 사장인, 배르 로라바흐는 어느 늦은 금요일 저녁에 캘리포니아 카말리오의 넓은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창문 너머에는 벤츄라 고속도로가 쭉 뻗어 있었으며, 주말의 휴식을 위해 달려가는 멋진 차들의 행렬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당시 E & J는 어려운 시기에 봉착해 있었기 때문에 사장인 로라바흐는 회사 중역들과 함께 어떻게 회사의 파산을 말들 수 있을까에 대해서 심각하게 논의를 시작했다. E & J가 지난 2년 동안 본 적자 액수만 8천8백만 불에 달했으며, 직원 중 3분의 1을 이미 해고하였다.

  로라바흐는 보다 가벼운 휠체어를 디자인한 발명가인 하반신마비장애우 친구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면서 이러한 창조가 어떻게 휠체어의 대변혁을 가져오고, 그것이 어떻게 미국에 가장 각광받는 휠체어 회사인 E & J의 설립을 가져왔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로라바흐는 이후 자랑스러운 회사의 역사를 들려주며 마릴린 해밀턴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는 해밀턴의 성공으로부터 배운 것을 통하여 E & J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에 대해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즉 어떻게 하면 소비자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더 가벼운 플라스틱 소재를 이용하여 새로운 휠체어의 세대를 열어갈 수 있을 것인가를 얘기해보자는 것이었다. 1992년에 로라바흐가 파산상태로부터 E & J를 흑자로 돌려놓은 후에 이 회사는 새로운 시작을 위해 세인트루이스로 팔려서 이사를 하였다.

  스포츠 앤 스포큰(Sports' n Spoken, 휠체어 운동선수를 위한 잡지)의 편집장 클리프 크래이즈는 E & J 회사가 잘난 척하고, 휠체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요구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소홀히 하였기 때문에 참신함과 날카로움을 잃어버렸다고 지적하였다. 1970년대 후반에, 미국 법무성은 다른 회사와의 경쟁과 발전을 저해하고 가격을 올리는 현재의 독점체제를 금지하도록 하였다.

  “사람들은 가벼운 휠체어와 같은 혁신을 원한다는 의견을 말하면 E & J는 ‘그래? 좋아, 당신들이 한 번 해봐’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크래이즈는 이렇게 언급하였다. Quickie가 혁명적인 휠체어를 가져왔을 때 비로소 E & J는 경량 휠체어 시장에 뛰어 들었다. 그 때, Quickie와 다른 회사들은 휠체어시장의 가장 빠른 발전을 위해서 일종의 전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동휠체어도 더 가볍게 가볍게

  1980년대에 루스벨트와 처칠을 위한 휠체어를 만들던 그 회사가 더 이상 회사를 위해 새로운 제안을 해줄 장애우 관리자를 채용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E & J는 이제 새로운 일자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사회적인 복지서비스에 덜 의존하게 되는 독립적인 휠체어 사용자 세대의 수가 늘고 있으며 이들이 강력한 소비자집단을 구성한다는 사실을 간과하였다. 즉 이 장애우 소비자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쉽게 간과한 것이다.

  지금까지 다른 상품과 다르게, 휠체어는 사용자에게 직접 팔리는 물건이 아니었다. 직업재활전문가, 혹은 물리치료사 등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장애클라이언트와 소비자에게 추천해 줌으로써 시장에 유통되고 있었다.

  그러나 Quickie는 비장애전문가들의 손에서 떨어져, 이제 자기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휠체어사용자들에게 직접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 상품의 팜플렛들은 사무실에서, 농구코트에서, 디스코텍에서, 그리고 예배당에서 활동적인 사람들이 당당하게 휠체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까지 E & J 회사는 병원에서 휠체어에 앉아 있는 장애우의 사진만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행글라이더 사고 후 12년이 지난 후에, 해밀턴이 당한 또 다른 사고는 보다 거벼운 전동휠체어를 위한 디자인의 발전을 가져왔다. 1990년, 차의 측면을 부딪히는 사고를 당한 후에 해밀턴은 손목과 다리가 부러졌다. 즉시 옛 친구 오카모토는 멋진 전동휠체어를 제작하였다. 해밀턴의 산뜻하고 가벼운 기존 휠체어에 임시변통으로 모터를 부착하였던 것이다.

  처음에 해밀턴은 전동휠체어를 타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장애는 이전보다 너무 심해져서, 전동휠체어에 의존해서도 독립적인 삶을 영위하는 일에 한계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석달 동안의 시간을 통해서 그녀는 빠르게 그리고 자유롭게 되고 싶다는 갈망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차에 실을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전동휠체어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휠체어메이커로서의 커다란 장점이었다. 지금까지의 모델들은 1백파운드가 넘는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전동휠체어는 차 뒤에 싣거나 접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 컸고 다루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언덕도 천천히 올랐고, 교통신호가 노란불일 때 재빨리 길을 건너갈 수 있는 능력도 없었다. 제조업자들은 더 강한 힘과 빠른 속도가 사고를 일으킬 수 있다는 법률적인 책임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소비자의 요구에 천천히 반응할 수밖에 없다고 휠체어 사용자인 메리 로 블레슬린(장애활동가)은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실제 전동휠체어 사용자들은 밧데리를 2개를 달던가, 혹은 또 다른 개조를 함으로써 마력을 높여서 더 빠르고 더 강하게 만들었다.

 

  “휠체어는 낙인이 아니다”

  가볍고, 멋지고, 빠르고 강하면서도 너무 비싸지 않은 것을 개발하여야 한다는 난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모션 디자인/퀵키(Motion Designs/Quickie)라고 명명된 그 회사는 오카모토의 원형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일반적인 휠체어의 모습이 아니라 이미 1970년대에 자동차에 가깝게 디자인한 디자이너 고돈 스토트를 고용하였다.

  캘리포니아는 휠체어의 발전을 위해서 비옥한 토대를 가지고 있었다. 새로운 생각과 눈에 도드라지는 행동을 참아낼 수 있는 주정부가 있었으며, 휠체어의 사용을 쉽게 하는 맑고 좋은 날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이 시장에는 오하이오에 기반을 둔 휠체어 메이커의 선두에 서서 전동휠체어의 판매고 1위를 달리고 있는 회사가 존재하고 있었다.

  휠체어 사용자들의 변하는 가치관에 대한 해밀턴 자신의 이해는 결과적으로 상당한 이익을 가져오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경제적으로도 풍족한 수입을 올리며 여유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해밀턴은 스키리조트가 있는 미국 시에라산맥 꼭대기의 경치 좋은 콘도미니멈에서 주말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그녀만을 위해서 제작된 스키를 타고 슬로프를 내려왔다.

  이 콘도미니엄의 엘리베이터는 다른 가족들이 살고 있는 집과는 다르게 휠체어를 타고 쉽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크리스마스와 주말에 다른 모든 사람들을 이곳으로 초청하기를 즐겼다.

  이 리조트의 바로 뒤편이 그녀가 행글라이더사고를 당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그 사고에 대해서 스스럼없이 이야기하였다. 사고 이후 15년 동안 해밀턴은 다시 걸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처음에, 그녀는 걷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인정한다는 것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심지어 지금도 그녀는 휠체어 없이 살 수 있는 생활을 꿈꾸곤 하였다.

  모든 증거들이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모든 하반신마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다시 걸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장애라는 낙인을 감추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들 중 대부분은 걸을 수 없다는 수치심에 사로 잡혀서 매일 매일을 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녀가 장애를 입은 사고 후 수년 동안, 그녀는 자신이 걸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마음 보다 다시 걷게 되기를 너무나 간절하게 갈망하고 있었다. 이것은 휠체어를 사용한다는 일종의 낙인을 가지고 있던 마릴린 해밀턴이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유일한 권리였다.(계속)

작성자서동명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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