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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의 철학 단상(1)] 맨눈으로 태양을 잰 사내들 철학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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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이 무엇으로 시작했느냐고 물으면 사람들은 보통 생각하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았겠냐고 대답한다. 결코 틀린 답이 아니다. 철학자 하면 열에 여덟은 골치 아픈 사람, 쓸 데 없는 생각에 혼자 골머리 앓는 사람, 재미없는 사람 등을 머리에 떠올린다.

  사정이 그러하니 철학자를 생각하는 사람 정도로 알아주는 것은 그래도 괜찮은 대접이다. 하지만 이런 대답에는 철학자를 그 무슨 별종으로 보는 심리가 짙게 깔려 있다. 철학을 하거나 아니면 아직 철학을 공부하는 이들이 들으면 상당히 머쓱한 기분이 들게 될 말이다. 내가 그렇게 이상하게 보이나 속으로 자문하면서.

  그런데 이것도 사실 보통 사람들이 옳다. 왜냐하면 분명히 철학하는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것은 우선 그 사람들의 ‘말’이 이상하다는 뜻이다. 그 때문에 그들이 하는 짓을 유심히 살피면 하는 ‘짓’도 이상하다. 그래서 캐묻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이상한 ‘생각’이 술술 흘러나와 묻는 사람 골을 때린다. 문제는 처음 들을 때는 골 때리면 (아니면 골 꼬집던) 말들이 차츰 그들 따라 생각하다 보면 어느 새 그 생각에 물들어 고개를 끄덕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령 서양에서 철학이 처음 시작되었다고 하는 기원전 6세가. 지금부터 약 2500년 전의 그리스 어느 섬 마을 밀레토스라는 곳에서 태어난 한 사내의 말을 들어보자. 그의 이름은 탈레스(B.C.636? 624?~546)라고 하는데, 철학의 역사를 공부할 때면 지겹게도 그 첫 시간에 꼭 듣게 되는 이름이다. 그리고 참, 철학사 첫 시간에는 철학이라는 말의 유럽쪽 단어인 필로소피(philosophy)의 어원이 그리스어에서 ‘사랑’ 또는 친밀한 애정을 뜻하는 ‘필로스’(philos)와 ― 지식이 아니라 ― ‘지혜’를 뜻하는 ‘소피아’(sophia), 두 단어를 합친 것이라는 말도 빠짐없이 듣게 된다. 그래서 철학의 본 뜻은 지혜를 사랑함이라던가.

  그런데 이 좋게만 들리는 철학이라는 것을 처음 시작했다는 탈레스의 말은 아무르 곱씹어도 그리 지혜롭게 들리지 않는다. 보통 그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해서 여러 나라 철학 개론책에 빠짐없이 실리는 인물이 되었다.

  원 세상에. 아무리 말하는 데 돈들 일이 없기로소니 그런 하찮은 말 한 마디로 역사에 영원히 남을 이름을 드날리다니. 지금은 초등학교 자연 학습 시간에 맨날 빵점만 맞거나 물리나 화학과 아예 담쌓기로 작심한 돌머리 학생이라도 이 세상이 물 천지라는 이 말이 엉터리라는 것쯤을 금새 알아챈다.

  만약 탈레스의 말이 그렇게 훌륭하다면 내가 잘못 태어난 이 지겨운 현재를 벗어나 타임 머신을 타고 머신을 타고 탈레스가 살던 밀레토스 마을로 갈 일이다. 그리고 그 엉터리 수작을 한 탈레스의 머리를 쥐어 박으면서 멋지게 한 수 가르칠 일이다.

  “야, 탈레스 임마, 이 세상 모든 사물의 근원은 (내가 좋아하는) 소주야. 너 그거 먹어 본 적 있어? 먹고 나면 세상이 얼마나 좋게 보이는데.”

  그리스 시대에 소주가 있을 턱이 없으니, 탈레스 자기가 지혜를 사랑한다면, 자기가 모르는 소주라는 것을 지껄이는 내 앞에 무릎 꿇고는 나를 사부님으로 모실지도 모른다.

  하기야 이 사내는 자기가 모르는 것을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당시에는 그리스 보다 훨씬 선진국이었던 이집트까지 배 타고 지중해 바다를 건너 신전마다 찾아다니며 신관들의 지식을 얻어 들었다고 한다. 요즘 세상으로 치면 미국으로 유학간 셈이다. 그리고 공부를 썩 잘 했던 모양이다.

  전설로 전해지는 얘기로는 이 탈레스가 진짜 유명해진 두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그 하나는 직각삼각형의 원리를 이용해 피라미드가 드리운 그림자의 길이에서 피라미드의 높이를 계산해낸 것이다. 또 하나는 일식을 정확하게 예측하여 마술로 잔재주 부리던 이집트 신관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든 일이다.

  그런데 이 사내가 주로 한 일이었다는 게 무엇이던가. 그것은 ‘끊임없이 보는 것’이었다.

  ‘쳐다 보고, 살펴 보고, 들여다 보고, 내다 보고, 지켜 보고’. 그리고 그것도 ‘맨눈으로’. 참 볼 일이 많은 사람이었다. 특히 그는 쉴 새 없이 밤낮으로 하늘을 쳐다 보았다고 한다. 요즘에는 어디랄 것 없이 공기가 오염되어 웬만큼 도시에서 떨어진 첩첩산중에서, 그것도 엄청나게 성능 좋은 천체 망원경을 써야 간신히 보일까 말까 하는 하늘이다. 하지만 2500년 전의 그리스 하늘은 오염될 이유가 없으니 그야말로 ‘별’ 볼 일이 많았던 것같다.

  그래서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어느 날 밤엔가도 이 탈레스 선생은 어두운 길을 가면서도 고개를 쳐들고 별을 따라 갔다고 한다. 그러다가 발을 헛디뎌 길 가의 개천에 빠졌다. 지나가던 마을 처녀 하나가 (제 갈 길이나 가지 않고) 그 광경을 보고는 까르르 웃었다. 어디 웃을 일인가. 존경스러운 선생님이 곤란한 일을 당했으면 얼른 달려가 도울 일이지.

  그러나 웃을 이유가 있었다. “저 멀리 하늘을 잘 보는 사람이 바로 자기 발 밑은 못보다니.” 이런 점에서 탈레스는 심오한 진리는 잘 알면서도 가까운 자기 주변은 잘 모르는 것으로 되어 있는 전형적인 철학자의 원조쯤 된다. 어쨌든 당시에는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 탈레스가 모르는 일은 없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렇다면 탈레스는 왜 그렇게 ‘볼’ 일이 많았을까? 끊임없이, 이런 저런 방식으로, 가리지 않고, 그것도 하나하나, 유심하게, 보는 것은 ‘무엇인가 꼭 찾아내려는’ 사람들에게 서나 볼 수 있는 태도이다. 그런데 무엇인가를 꼭 찾으려고 한다면 찾아내려는 ‘그 무엇’이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더라도 (사실 그러니까 찾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

  가령 우리가 부산에 있다고 하자. 우리가 거기에서 서울로 가려면 서울로 가는 교통편을 찾는다. 그 교통편이 택시가 될 지, 고속버스가 될 지, 기차가 될 지, 비행기가 될 지, 아니면 하다못해 (그럴 리는 결코 없지만) 배가 될 지는 찾아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찾는 것이 ‘서울 가는 교통편’이라는 점은 미리 알고 찾아 나선다. 무조건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타고 나서야 내가 왜 이 차를 탔는지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너무 일직 철학의 전문용어를 동원해 필자로서는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하지만, 여기에서 ‘서울 가는 교통편’에 대해서는 그것이 우리가 찾는 <그 무엇>의 ‘특성’(特性)이라고 하며, 바로 <그 무엇>은 그 특성에 해당되는 ‘사물’(事物)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어떤 특성을 바탕으로 그에 해당하는 사물을 찾는 탐색작업’을 ‘추정(推定)한다’고 말한다.

  탈레스가 어떤 것을 찾았는지 그 자신이 말한 기록은 전혀 없다. 그가 몇 권의 책을 쓴 것은 확실하지만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확실히 그가 했다는 말 한 마디만 남아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 그 엉터리 같은 흰소리이다. 그런데 그 경구의 원문은 그가 무엇을 찾았는지를 충분히 짐작케 해준다.

  “사람들 사이에 많이 거론되는 네 가지 실체들 가운데 으뜸은 물(水)이다. 물이야말로 모든 것을 지금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만드는 원물이다. 이 네 실체들이 결합하고, 굳어지고, 응고하면서 서로 섞이는 것이다.”(강조 필자)

이 원래의 구절을 면밀하게 살피면 사람들을 편하게 하려고 간단하게 만든다는 것이 본래의 뜻을 얼마나 난폭하게 왜곡시킬 수 있는 지 여실하게 드러난다. 윗 구절에서 ‘실체’(實體)라는 말은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 그로부터 유래하는 ‘궁극적 기초’를 가리킨다.

  그리스 사람들은 인간을 포함하여 존재하는 것은 물, 불, 공기, 흙이라는 4가지 기본물질이 배합되어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 하였다. 현대 화학으로 보면 이 네 물질은 원소에 해당된다. 위 구절에서 ‘원물’(原物)이라고 번역한 그리스어의 ‘아르케’(arche)는 단지 모든 사물의 기초가 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사물들이 존재해야 하는 형태와 방식까지도 담고 있는 일종의 모범 물질이다.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아르케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담은 소프트 웨어이다.

  따라서 물을 모든 사물의 원물이라고 한다면, 단순히 모든 사물의 궁극적인 재료가 물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 말은 모든 사물에 물이 섞여 들어 마치 물과 같은 방식으로, 그리고 물의 형태로 그 사물들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위의 구절은 적절하게 물을 부어가면서 진흙을 빚어 여러 가지 형체를 만드는 과정을 연상케 한다.

  어쨌든 위의 구절로 탈레스, 그리고 흔히 자연철학자들이라고 불리우는 그의 후배들이 어떤 것을 찾고 있었는지 비교적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들은 모든 사물이 <왜> <지금 있는 그대로의 상태>인지를 알고 싶어 했다. 왜 바다는 지금 그들이 보고 있는 그대로의 바다가 되었으며, 왜 하늘의 태양은 밤이면 지고 날이 새면 또 어제와 같은 그 자리에 떠 있는 되는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인간은 왜 지금대로 사지를 갖추고 움직이면서 서로 어울려 사랑과 우정, 미움과 싸움을 펼치는지 등등.

  이렇게 광활하게 눈에 들어오는 그 모든 다채로운 현상들의 압도적인 위세를 그들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이 지금 그대로 <제 자리>에 있다고 요약하면서 바로 그런 상태를 코스모스(cosmos), 즉 우주라는 개념으로 압축하였다.

  이런 발상 아래에서 현재 우리가 보면 대단히 특이한 다음과 같은 생각이 나타났다. 즉, 우선 인간은 그 자체로 이 우주의 한 식구라는 의미에서 다른 자연물들과 특출나게 구별되는 것은 아니었다. 우주의 질서는 그것이 곧 인간의 질서였다. 인간의 생명활동은 어떤 형태로든 우주의 생명활동과 통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다음, 이 서양의 첫 철학자들은 이 우주 질서의 핵심에 인간이 인간으로서 충분히 접근할 수 있다고 믿었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대단히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말들, 즉 만물의 원물을 물이다(탈레스), 공기이다(아낙시메네스), 불이다(해라클레이토스), 아니다 그 모두이다(엠페도클레스)라고 중구난방으로 떠들었던 이들의 생각 밑바닥에는 자신들의 경험하고 포착할 수 있는 우주 안의 물질 안에서 우주 전체를 다시 구성해 보겠다는 야심찬 구상이 도사리고 있었다.

  바로 이 때문에 내가 소주를 갖고는 나보다 아는 것이 적을지도 모르는 탈레스를 설득할 수는 없게 된다. 술 한 잔 걸치고 하는 말로 어떻게 이들의 야심을 잠재울 수 있겠는가?

  현재 보면 하찮게만 보이는 이런 발상은 자연현상 모두를 신들의 존재와 그 활동에다 결부시키고, 각 도시마다 자기 수호신에 바치는 신전을 운영하고 있던 당시 그리스 전체의 정치적 분위기를 감안하면 대단히 무모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신의 도움 없이 오로지 자신들의 가진 인간의 맨눈으로 우주의 현상들을 파악하고자 시도했다. 당연히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수없이 일어났다.

  예를 들자면, 이들에게 있어서 태양은 더 이상 태양의 신 헬리오트의 궁전이 있는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 감히 그 크기를 측정할 수 있는 자연대상이 되었다. 탈레스 바로 뒤에 철학을 했던 아낙시메네스(B.C.580년 중반~520년 중반)는 태양의 크기를 “나뭇잎 한 장만 하다”고 확정하였다. 아마 눈에다 나뭇잎을 대고 햇빛을 가린 경험이 그런 주장을 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선배 철학자들이 활약했던 밀레토스 인근 에페소스 명문가 출신의 헤라클레이토스(B.C. 535~475)는 태양의 크기를 “사람 발바닥만하다”고 주장하였다. 약 100년 동안 태양의 크기는 약 15cm 커졌다. 태양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크기를 갖기까지 약 2400년을 기다려야 했지만, 어쨌든 이들은 정직한 사람들이었고, 정직한 경험을 철학함의 바탕으로 세움으로써 철학의 발언에 결코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윤리적 무게가 실리게 만들었다.

  철학자는 소수의 괴짜 그룹이었지만, 이들은 당시로서는 아무나 가질 수 없다고 믿어진 정신적 자산, 즉 진리로서 자신의 존재근거를 착실하게 다지기 시작하였다.(계속)


이번 호부터 홍윤기의 철학단상을 연재합니다. 홍윤기 씨는 서울대 철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 현재 이대․숭실대에서 사회 및 역사철학을 강의하고 있으며 본지 편집자문위원입니다. 역서로 「이론과 실천」,「힌두교와 불교」,「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기초」가 있습니다.

작성자홍윤기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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