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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감독에 대하여

사람은 사람에 의해 용서받고 구원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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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태의연한 옛날이야기를 먼저 하겠습니다. ‘모든 세상의 일은 무의식의 결정에 의해 의식세계로 움직여간다’라고 프로이트는 100년 전에 이야기 하였지요. 물론 이 가설에 대해 여러분들은 전적으로 동의하지 못하시겠지요. 그러나 수많은 지식인들이 이 가설의 허상을 파헤치려고 지금까지 노력하였지만 프로이트의 그 말이 틀렸다는 것을 아직 증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프로이트는 논쟁의 화두를 먼저 점령하는 공격적 본능에 의해 정신분석학을 체계화 하였습니다. 당시의 프로이트는 정신의학계의 이단아였고 오스트리아를 떠나 다른 유럽국가와 미국에서 학문의 가치를 인정받게 됩니다. 역설적으로 거칠고 원색적인 비난이 정신분석학의 내공을 쌓게 한 것입니다. 당시의 아류들과는 달리 프로이트는 지금도 정신의학과 영화와 문학, 미학 등에 살아 숨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긴 서두를 끄집어내는 것은 김기덕 감독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최근 들어 봉준호 감독의 ‘괴물’과 김기덕 감독의 ‘시간’에 대한 비교 글들이 많고 논쟁의 초점에는 한국관객의 수준에 대한 폄하도 있고 배급구조를 가진 힘 있는 자들에 의해 영화제작이 영향을 받는 것부터 스트린 쿼터를 둘러싼 애국주의까지 다양합니다. 저는 그런 논쟁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김기덕에 대한 관심만 있습니다. 그의 영화가 아닌 그 영화를 만드는 김기덕이라는 사람에 대한 관심 말입니다. 결국 영화라는 장르는 감독에 의해 형상화되는 창조물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1996년 ‘악어’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13편의 영화를 만들어 왔습니다. 만드는 영화마다 논란이 없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지요. 다른 감독들이 비교적 균형있는 비판을 골고루 받은 것에 비하면 김기덕 감독에 대한 것은 비난일색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해외언론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오늘의 김기덕을 만들어왔습니다. 단순히 미학에 대한 동서양의 차이를 넘어 무언가가 우리 내부에 존재함이 틀림없습니다. 제도권 영화공부를 하지 못한 사람, 정통 시나리오를 써보지도 않은 사람, 충무로의 계보를 성실하게 따라가지 않은 사람, 노골적 섹슈엘러티로 밥 먹으려고 하는 사람, 기존의 제작, 배급 방식에 불만을 가진 사람 등으로 그는 묘사되어 왔습니다. 기껏해야 일련의 평론가들이 찬사위주로 그를 위로하며 살아왔지요

제가 생각하고 느끼는 김기덕의 영화는 일관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깨달음과 구원에 대한 구도적 영화를 그는 시종일관 유지하고 있습니다(여기서 종교적 논쟁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1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그의 모든 작품은 선과 악이 불분명한 구도속에 사람에 의해 사람이 용서받고 구원되는 화두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표현하면 성인자아를 표방하는 여성에 의해 소아병적 자아를 지닌 남성들은 구원됩니다. 이번에 개봉한 ‘시간’도 이 구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성형수술이라는 현대적 의학개념을 빌려왔지만 핵심은 인간의 내면이 변하지 않고 외형만을 바꾸려는 불완전한 자아변형 문제를 다룬 것입니다. 소아병적으로 싫증내고 사랑을 외면하려는 한 남자를 위해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여성(성현아)에 대한 슬픈 코미디 영화입니다. 왜 코미디 영화냐구요? 갑자기 사라진 옛 애인을 못 잊으면서도 다른 여자와 섹스하는 가련한 남자 주인공(하정우) 모습이 바로 현대 우리사회의 남성들과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김기덕 감독이 바라보는 우리 사회는 바로 이러한 일상의 깨달음에서 오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보기 싫지만 늘 지겹게 반복되어 들려오는 자살, 배신, 죽음, 노숙인, 매춘, 가정폭력, 원조교제 그리고 최근의 바다이야기까지. 우리네 삶속에 들려오는 이야기는 온통 이러한 내용들이지만 우리는 늘 현실을 부정하고 미화하려는 환상에 사로잡힙니다. 이런 점을 헤집고 다니는 사람들이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거대한 자본이 형성됩니다. 결국 한국 영화를 보는 관객의 수준이 모자란 것이 아니라 관객들에게 헛된 영상과 어설픈 희망을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자본화된 영화계가 문제인 것이지요. 자본화된 영화계는 공약을 남발하는 정치판과 정확하게 닮은 꼴입니다. 어떻게 하루 아침에 조폭들이 개과천선해서 사회사업가로 변신할 수 있겠습니까? 최근 김기덕 감독은 뉴욕타임즈와의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였습니다.

‘흔히 검다는 것, 악이라는 것에 대한 이해는 희다는 것, 선에 대한 이해를 이끌어 낸다. 그 둘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김기덕 감독은 분명 읽었을 것으로 저는 확신합니다. 극도로 자본화한 영화계가 앞으로 김기덕 감독과 같은 부류의 사람(고집세고 주류와 타협하지 않으려는 비사회적 성격을 가진 사람)들과 어떻게 살아가는 가를 지켜보려고 합니다. 가을의 문턱에서 문득 상상해봅니다. 김기덕 감독의 다음 작품에 송강호와 최민식이 출연하고 씨네마서비스가 그 영화를 제작, 배급하며 조선일보가 영화평을 대서특필하면,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탈 수 있을까요? 그저 웃자고 한 이야기입니다. 건강하십시오.

작성자이영문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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