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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속에서 영원을 봅니다

[이영문의 영화읽기] 영화 ‘박사가 사랑한 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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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이라는 공부를 25년간 하고 있지만 여전히 저는 자연과학 분야에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또한 정신과학이라는 학문은 자연과학과 더불어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기초하에 존재합니다. 학창시절 내내 저는 수학과 과학 분야에서 헤매는 학생이었고 대학입시에서도 평균점 이하를 받았지요.

조광조의 개혁이라든가 포에니 전쟁의 한니발 이야기, 한하운 선생과 김수영 시인의 시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지만, 사인, 코사인, 미분, 적분 등의 수학 공식은 완전히 낯선 객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영화를 보면서 수학에 대한 저의 편견이 세상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쿠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수제자인 고이즈미 타카시 감독이 연출한 ‘박사가 사랑한 수식(數式)’은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입니다. 교통사고로 인해 전행성 기억장애(anterograde amnesia : 의학용어)로 80분간의 기억만이 유지되는 수학자로 테라오 아키라(1980년대 그 유명한 가수입니다)가 출연하며 그를 돌보는 가정부 역으로 후카츠 에리가 열연합니다.

의학적으로 전행성 기억장애 환자들은 사고가 난 시점까지만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자신의 수학능력이나 공부했던 일들은 기억하지만 매일 일어나는 일들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새로운 자극을 받아들여 기억저장소에 넣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내일이나 어제가 없습니다. 그저 80분간의 그 순간만이 존재합니다. ‘메멘토’의 가이 피어스, ‘첫 키스만 50번째’의 드류 배리모어와 동일한 질환입니다.


영화는 루트라는 별명을 지닌 후카츠 에리의 아들이 19년 전을 회상하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합니다. 그에게 루트라는 별명을 붙여준 것도 박사이며 수학을 이해시키고 사랑하게 한 사람도 박사입니다. 저명한 수학자로서 테라오 아키라는 숫자로 모든 것을 인식합니다. 그에게 숫자는 단순한 수가 아닌 사람간의 소통방식인 것이지요. 후카츠 에리의 신발사이즈가 24임은 그에게 있어 4의 계승으로 인식이 되고, 그녀의 생일인 2월 20일(220)은 자신이 상으로 받은 시계의 일련번호인 284와 진약수를 더하면 동일한 숫자가 되는 우애수로 존재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그는 세상과 소통합니다. 박사가 가장 사랑한 숫자는 물론 소수들입니다.

1,3,5,7,11 등으로 나열되는 소수는 1과 자신의 수만으로만 나눌 수 있는 고결한 수들입니다. 하늘의 별들처럼 독립된 존재로서 소수는 다름 아닌 우리 개개인의 존엄성을 일컫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과 당신이 살아가는 방식이 서로 다르며 존중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줍니다.

 
 

박사가 붙여준 별명인 루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루트는 모든 수를 자신 속에 포용할 수 있는 너그러움으로 다가옵니다. A4에 그린 직선이 유한성을 의미한다면, 이 직선을 연결한 루트(√)는 무한성을 내포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눈에 보이는 세계를 감싸 안고 있는 것이지요. 루트와 자연수와의 관계를 박사는 그렇게 이해합니다. 단순한 숫자가 아닌 세상과 소통하는 존재로서의 숫자들이 나열됩니다.

박사가 사랑하는 운동 또한 수학적 이해가 가장 필요한 야구입니다. 그는 지난 시절 한신 타이거즈의 열렬한 팬이었고 전설적인 투수인 에나츠 유타카를 좋아합니다. 그의 백넘버인 28은 진약수의 합과 일치하는 완전수이기도 합니다. 한신 타이거즈의 영구 결번인 28번 유니폼을 입은 박사는 루트에게 야구를 가르치고 루트는 훗날 수학선생님이 되어 학생들에게 박사의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서 저는 생각을 해봅니다. 80분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인간이 과연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기억과 감정의 퇴적물이라고 믿는 저에게 이것은 큰 의문이었습니다. 아무리 영화라는 장르를 이용한다고 하더라도 과장이 아닌 진정한 사랑이 느껴질 것인가라는 당위적 질문 말입니다. 윌리엄 브레이크의 ‘순수의 전조’라는 시를 통해 루트가 그 답을 줍니다.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

 
 

그렇습니다.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한 죄를 박사는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간다고 믿는 저에게 ‘시간은 흘러가지 않는다’라는 명제는 참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순간 속에서 영원을 느낀다는 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 자체가 하나 속에 전체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믿음과도 통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사 받아들입니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 왜 오일러 공식(무리수 파이(π)와 무리수 e, 허수를 곱한 무한 수에 1을 더하면 0(無)이 되는공식)인지를 느낍니다.

무한과 유한이 합쳐지고 하나와 전체가 모이고 사랑과 미움과 한데 어울려 우리는 살아갑니다. 자신의 사랑이 영원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분들에게 이 영화를 권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그 순간을 느끼실 겁니다. 물론 수학을 사랑하는 분들은 당연히 보셔야지요. 저도 앞으로 수학과 순간을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그렇다고 수능시험을 다시 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건강하세요.

작성자이영문 (아주대학교 정신과 교수)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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