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흐림
노순택의 사진이 사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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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것을 해방 후 이승만 정권이 1958년부터 복개공사를 재개하고, 박정희 정권이 1963년 12월에 공사를 마무리했다. 이어 1966년 ‘불도저’란 별명으로 유명했던 김현옥 서울시장이 청계고가를 건설하면서 청계천은 지하의 하수와 지상의 도로, 그 위의 고가도로라는 오늘날의 3층 구조를 갖추게 됐다. 일본의 시나리오가 그대로 적중한 셈이다.
청계천 주변은 그 뒤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서민들의 질퍽한 삶의 애환이 소통하는 ‘광장’의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청계천로를 중심으로 형성된 재래상가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사람과 상품의 오고감으로 바빴다.
늘 그렇지는 않지만, 가장 싼값의 물건 뒤에는 가장 싼값에 일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개발독재 시절 청계천 주변의 영세공장들은 저임금 고강도 노동의 신음터였다.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는 평범한 요구를 위해 제 몸을 불살랐던 청년 전태일 역시 청계천의 노동자였다. 그 스스로가 ‘또다른 전태일’이었던 청계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국노동운동의 기수가 된 ‘청계피복노조’가 꾸려지고, 군사독재를 긴장시킨 가열찬 투쟁이 벌어진 것은 그래서 당연한 일이다.
때문일까? 1990년대만 해도 청계천과 동대문 인근은 전민련, 전노협, 민가협, 전국노점상연합회 등 굵직한 운동단체들이 자리를 튼 ‘재야1번지’였다.
사람이 넘쳐나고, 물건이 넘쳐나기에 청계천에서는 “없는 것 빼놓고는 다 있다”는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다. 가장 대표적인 의류시장 외에도, 전기전자, 카메라, 헌 책, 골동품, 보석, 공구상가들이 구름처럼 모여있기에 ‘운집’이란 말이 딱 맞다.
한때 “청계천 전기수리 기사들만 단합하면 인공위성도 만들 수 있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였으니, 그 나름의 자신감도 만만찮았던 듯하다.
그러나 이 청계천의 풍경도 조만간 사그라들 운명에 놓였다. 대신 “맑은 강이 흐르는 생태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키겠다”고 한다. 이명박 서울시장의 ‘주장’이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한편 아쉬워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개발독재 시대를 대표했던 건설회사 ‘현대건설’의 회장님을 지낸 이 시장의 별명 ‘계엄사령관’에서 1966년 김현옥 시장의 별명 ‘불도저’가 연상되는 건 왜일까? 하긴 짓는 것도, 부수는 것도 ‘불도저’가 해야 할 일이긴 하다.
이 어설픔들...
청계고가 철거를 한 달여 앞둔 5월의 막바지. 차 없는 청계고가 위를 걷는 행사가 짧은 시간동안 열렸다. “곧 있으면 차량통제가 끝난다”는 경찰의 다그침에도 아랑곳 않고 한 노인이 의족과 지팡이에 기댄 채 청계천의 마지막 향수를 느끼며 느리게 걷고 있다. 노인은 끝내 경찰차에 ‘모셔져’ 앞쪽으로 ‘옮겨졌다’.
빠름아, 빠름아, 느림이 좀 놔두면 안되겠니?
노순택 / 다큐멘터리 사진가. imagepress.net 편집장
작성자노순택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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