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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자의 변죽 때리는 소리] 밴드 불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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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싸조의 2집 앨범커버 ⓒ불싸조  
 
1. 음반매장
CD를 사러 음반매장에 간 당신. 우거진 수풀을 두발로 딛고 선 이의 검은 실루엣이 박힌 그림 하나가 눈에 꽂힌다. 갱지처럼 보이는 누런 종이 위에 펜으로 찍찍 그린 듯한…. 그림 말고는 아무 글자도 적혀있지 않다.

 뭐야, 이건? CD 케이스를 뒤집어본다. 비슷한 그림이 또 있다. 그림 한가운데 조그마한 글씨들이 눈에 띈다.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잠언 1:26)’ 이 글귀 말고는 역시 아무것도 없다. 당신이라면 이 CD를 사겠는가?

2. 집
CD를 사들고 집에 온 당신. 안에는 뭔가 있겠지. 비닐을 뜯고 CD 케이스를 연다. 아뿔싸! 해설지고 가사집이고 아무것도 없다. 보물찾기라도 하듯 케이스를 샅샅이 살핀다.

CD를 들어내고 검은색 받침대를 케이스에서 떼어내니 깨알같은 글씨들이 숨어있다. 곡명 목록이다. 어라? 노래 제목들, 범상치 않다.

1. Born To Fuck(#1) 2. Fuck To Fuck(#2) 3. Too Big To Fuck(#3) 4. 이 개가 미쳤나 5. 신용불량자 6. 앗싸라비아 콜럼비아 7. 섹시 한가(韓家)-벌써 썅년 8. 어줍잖은 스탭 9. 밥시간 10. 정리해고 11. Rise and Fall of Music Industry 12. 형사입건 13. 배신이 춤을 추네 14. Public Motherfucker #1 15. Time : The Donut Of The Heart.

마음을 굳게 먹고 CD를 오디오에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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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싸조  
 
3. 플레이 버튼
오디오 플레이 버튼을 누른 당신. 서정적인 기타선율이 흐른다. 뜻밖이다. 곡명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운드. 그럼 노랫말은? 미성의 보컬이 부르는 노래 소리는 다른 악기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는다. 노랫말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짐작조차 힘들다.

중간중간에 옛날 영화 대사 같은 것들도 툭툭 튀어나온다. 이 앨범,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데 계속 듣다보니, 묘하게 끌린다. 거칠고 투박하면서도 아기자기하고 예쁜 사운드, 귀에 꽂힌다. 노랫말이 잘 안들리는 게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런 음악 위로 곡명처럼 엽기적인 노랫말이 얹혀져 들려온다면 얼마나 당황스럽겠는가?

4. 불싸조
밴드가 결성된 건 2005년이다. 애초 밴드 이름은 없었다. 이름이 없다는 뜻인 ‘언타이틀’이라 붙이려 했는데, 90년대 중반을 풍미했던 댄스듀오가 이미 선점한 이름이었다. 공연을 하러 봉고차를 타고 가다 갑자기 붙인 이름이 ‘불싸조’다.

불사조와는 아무 상관없는, 아무 뜻도 없는 이름이란다. 지금도 밴드 이름은 없는 상태라고 리더 한상철(기타 보컬)은 귀띔한다. 그해 1집 앨범을 냈지만, 홍보 따윈 전혀 관심 없었다. 공연 때도 1집 곡들은 무대에 전혀 올리지 않았다. 앨범에 실린 곡은 듣기도 민망하고 연주하기도 민망하다는 이유에서다. 무대에선 새로 만든 곡들만 연주했다.

2006년 10월, 그동안 만들어온 곡들을 담은 2집 앨범을 냈다. ‘너희가 재앙을…’이다. 앨범 제목을 안붙이려다 그냥 생각나는 성경 문구를 달았다. 역시 아무 이유 없단다. 앨범 표지에 아무 이름도 안박은 점, 곡명 목록을 숨겨놓은 점, 가사집마저 안넣은 점 등등 따져물으니 돌아온 건 이 한마디다.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게 좋아서요.”

 
▲ ⓒ불싸조  
2집을 낸 직후 새 진용을 갖췄다. 서명훈(베이스), 고영일(드럼)과 함께 무대 위에 오른다. 이번에도 공연 땐 2집 곡들을 연주하지 않는다. 이젠 노랫말도 잊어버렸다. 노랫말을 적어놓은 종이도 버렸단다. 2집 곡들의 노랫말은 이 세상 누구도 모르는 존재가 돼버렸다.

 “요즘은 노래를 아예 안불러요. 노래하는 게 귀찮아졌거든요.” 공연 때는 노래 없이 연주만 한다. 3집 앨범을 낸다면 이런 연주곡들로만 채울 거란다.

아무리 대화를 이어가도 도무지 밴드의 정체를 알 수 없다. 어쩌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밴드의 이름처럼 이들의 참모습 자체도 없는 게 아닐까? 어떤 음악평론가는 음악에 대한 이들의 태도가 진지하지 못해 아쉽다고 말한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음악에 대한 진지함’이 천연기념물처럼 돼버린 주류 음악시장의 대안으로 기대를 모으는 밴드이기에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거 하나만은 확실하다. 이들이 내놓은 앨범 속에 담긴 음악, 이들이 공연장에서 온몸을 던져 쏟아내는 음악, 그 자체가 진지함을 넘어서는 뭔가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그들은 “아무 이유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지만.

진짜 음악인들은 음악으로 말하는 법이다.


(불싸조의 음악이 듣고싶은 분은 플레이 버튼을 눌러주세요)

작성자서정민 (한겨레신문사 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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