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로 쓴 일기장 > 문화


노래로 쓴 일기장

[서기자의 변죽 때리는 소리] 하이 미스터 메모리

본문

  undefined  
   
소년은 밤이 싫었다. 텔레비전에선 애국가가 나오는데, 엄마 아빠는 아직도 안 오고. 또 혼자 이불 뒤집어쓰고 훌쩍이다 보면 어느새 아침에 눈뜨겠구나. 

소년은 밤이 싫었다. 텔레비전에선 애국가가 나오는데, 엄마 아빠는 아직도 안 오고. 또 혼자 이불 뒤집어쓰고 훌쩍이다 보면 어느새 아침에 눈뜨겠구나.

밤아 밤아 오지마라 네가 오면은/ 딱지먹기 하던 용기도 구슬치기 하던 동석이도/ 저 해 너머 집으로 가잖니// 밤아 밤아 오지마라 네가 오면은/ 밤이 찾아와도 가지 않겠다며 새끼손가락 약속한 주연이도/ 걔네 엄마 손에 이끌려 울며 불며 가버리잖니// 밤아 밤아 오지마라 네 하늘/ 초승달 님도 외로워 까만 네 하늘에/ 반짝이는 눈물을 뿌리잖니// 텔레비전에는 동해물과 백두산이 노래를 부르는데/ 엄마도 아빠도 아직 오질 않았네 또 울다 잠이 들겠네(초승달)

고3이 된 소년은 그 때를 떠올리며 곡을 썼다. 기억을 고스란히 기타 선율에, 목소리에 실었다. 그리고 14년이 흐른 뒤, 소년은 그토록 바라던 첫 앨범을 냈다. 자신의 기억 조각들을 오롯이 담아. 소년은 자신을 ‘ㄱ’이라고 했다. 박기혁의 ‘기혁’은 그렇게 ‘기억’이 됐다. 그리고 하이, 미스터 메모리(Hi, Mr. Memory). 우리말이 서툰 교포 친구가 그를 그렇게 불렀단다. 결국 그의 또 다른 이름이 됐다. <안녕, 기억씨…>는 그의 첫 앨범 제목이다. 이쯤 되면 기억의 종합선물세트쯤이라도 되려나?

그는 중2 때부터 일기를 써왔다고 했다. 그의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인 창고다. 모래내 개천에서 동네 형과 기타 치고 하모니카 불며 노래 부르던 기억, 안양예고에 붙었지만 부모님 반대로 입학을 포기한 기억, 억지로 일반 고등학교에 갔더니 칠판 글씨가 눈에 잘 안 들어와 그만둔 기억, 검정고시 보고 대학 문예창작과에 합격한 뒤 우연히 보게 된 <고도를 기다리며> 연극에 푹 빠진 기억, 극단 산울림에 오디션 보고 들어갔지만 1년 넘게 정식 무대엔 못 서본 기억…. 모두 일기장에 차곡차곡 쌓아뒀다.

군대에 다녀온 그는 개천에서 함께 노래하던 그 형을 다시 만났다. “기혁아, 우리 음악 하자.” 형은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기타를 메고 신촌 거리를 헤매었다. 홍대앞에선 라이브 클럽 바람이 한창이었지만, 그들의 머릿속에선 아직도 라이브 하면 신촌이었다. 1980년대 동아기획이 주름잡던 그 시절 그 신촌. ‘라이브’라고 적힌 간판을 보고 들어가 오디션을 봤다. 합격. 무대에 섰다. 추억을 더듬는 술손님들의 신청곡을 불러댔다. 그렇게 흘러흘러 백마 카페촌에도 가고, 호텔 바에도 가고…. 벌이는 꽤 짭짤했다. 그래도 ‘우리가 왜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이 가끔씩 들쑤시는 건 견디기 힘들었다. 3년 만에 이 생활을 접었다. 그 형은 웹 디자이너가 됐다.

라이브 카페를 돌아다니다 알게 된 또 다른 형이랑 한 석 달 정도 음악만 해보자, 하고 산골로 들어갔다. 뒤에는 산, 앞에는 호수. 낚시도 하고, 풀도 뜯어먹고. 생활비는 둘이서 번갈아가며 카드로 돌려막았다. 어느덧 8개월이 훌쩍 지났다. 100곡 정도 만들었다. 댄스, 랩, 프로그레시브, 헤비메탈, 컨트리…. 없는 장르가 없었다. 상경해서 보니 맘에 드는 곡이 딱 하나(안경이 필요없게 됐어)밖에 없었다. 남은 건 카드빚뿐. 아직도 갚고 있다. 그래도 그는 지금 그 시간들이 크나큰 자양분이 됐다고 자신한다. 당시 기억을 떠올리며 곡(아주 오래 전에, 아니, 그리 멀지 않은 어제)도 썼다. 그 형은 지금 잘나가는 세일즈맨이다.

산골에서 돌아온 뒤로, 라이브 카페로 다시 가기가 싫어졌다. 홍대앞에서 길거리 장사를 시작했다. 음악에 대한 갈증은 심장병 어린이 돕기 길거리 공연으로 풀었다. “노래가 좋으면 머무르고, 노래가 별로면 그냥 가버리는” 거리는 참 솔직하다고 그는 말했다. 몇 년 뒤 홍대앞 라이브 클럽에서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노래로 쓴 일기장’이랄 수 있는 첫 앨범을 내는 데까지 왔다. “노래로 밥 벌어 먹고 사는” 소박한 꿈을 이뤘다고 하기엔 아직도 생활이 빡빡하지만, 그래도 그 길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undefined  
 
“예전에 호텔 바에서 노래를 하는데, 허름한 차림의 아저씨 한 분이 들어오시는 거예요. 노래를 한참 들으시더니 저한테 다가와 쪽지를 건네주고 나가시더라고요. ‘사업도 망하고 세상을 버텨낼 기운도 없어 마지막으로 좋은 호텔에서 한 잔 마시고 죽으려 했습니다. 난 음악을 잘 모릅니다. 그런데 당신 음악을 듣다보니 왠지 모르게 아내와 아이들이 생각났습니다. 다시 돌아가렵니다.’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이었어요. 음악을 진심으로 하면 그 누구와도 통하는구나, 깨달았어요. 그 쪽지, 지금도 가지고 있어요. 지금도 음악하다 힘들 때면 가끔씩 펴봐요.” 

고3이 된 소년은 그 때를 떠올리며 곡을 썼다. 기억을 고스란히 기타 선율에, 목소리에 실었다. 그리고 14년이 흐른 뒤, 소년은 그토록 바라던 첫 앨범을 냈다. 자신의 기억 조각들을 오롯이 담아. 소년은 자신을 ‘ㄱ’이라고 했다. 박기혁의 ‘기혁’은 그렇게 ‘기억’이 됐다. 그리고 하이, 미스터 메모리(Hi, Mr. Memory). 우리말이 서툰 교포 친구가 그를 그렇게 불렀단다. 결국 그의 또 다른 이름이 됐다. <안녕, 기억씨…>는 그의 첫 앨범 제목이다. 이쯤 되면 기억의 종합선물세트쯤이라도 되려나?

그는 중2 때부터 일기를 써왔다고 했다. 그의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인 창고다. 모래내 개천에서 동네 형과 기타 치고 하모니카 불며 노래 부르던 기억, 안양예고에 붙었지만 부모님 반대로 입학을 포기한 기억, 억지로 일반 고등학교에 갔더니 칠판 글씨가 눈에 잘 안 들어와 그만둔 기억, 검정고시 보고 대학 문예창작과에 합격한 뒤 우연히 보게 된 <고도를 기다리며> 연극에 푹 빠진 기억, 극단 산울림에 오디션 보고 들어갔지만 1년 넘게 정식 무대엔 못 서본 기억…. 모두 일기장에 차곡차곡 쌓아뒀다.

군대에 다녀온 그는 개천에서 함께 노래하던 그 형을 다시 만났다. “기혁아, 우리 음악 하자.” 형은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기타를 메고 신촌 거리를 헤매었다. 홍대앞에선 라이브 클럽 바람이 한창이었지만, 그들의 머릿속에선 아직도 라이브 하면 신촌이었다. 1980년대 동아기획이 주름잡던 그 시절 그 신촌. ‘라이브’라고 적힌 간판을 보고 들어가 오디션을 봤다. 합격. 무대에 섰다. 추억을 더듬는 술손님들의 신청곡을 불러댔다. 그렇게 흘러흘러 백마 카페촌에도 가고, 호텔 바에도 가고…. 벌이는 꽤 짭짤했다. 그래도 ‘우리가 왜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이 가끔씩 들쑤시는 건 견디기 힘들었다. 3년 만에 이 생활을 접었다. 그 형은 웹 디자이너가 됐다.

라이브 카페를 돌아다니다 알게 된 또 다른 형이랑 한 석 달 정도 음악만 해보자, 하고 산골로 들어갔다. 뒤에는 산, 앞에는 호수. 낚시도 하고, 풀도 뜯어먹고. 생활비는 둘이서 번갈아가며 카드로 돌려막았다. 어느덧 8개월이 훌쩍 지났다. 100곡 정도 만들었다. 댄스, 랩, 프로그레시브, 헤비메탈, 컨트리…. 없는 장르가 없었다. 상경해서 보니 맘에 드는 곡이 딱 하나(안경이 필요없게 됐어)밖에 없었다. 남은 건 카드빚뿐. 아직도 갚고 있다. 그래도 그는 지금 그 시간들이 크나큰 자양분이 됐다고 자신한다. 당시 기억을 떠올리며 곡(아주 오래 전에, 아니, 그리 멀지 않은 어제)도 썼다. 그 형은 지금 잘나가는 세일즈맨이다.

산골에서 돌아온 뒤로, 라이브 카페로 다시 가기가 싫어졌다. 홍대앞에서 길거리 장사를 시작했다. 음악에 대한 갈증은 심장병 어린이 돕기 길거리 공연으로 풀었다. “노래가 좋으면 머무르고, 노래가 별로면 그냥 가버리는” 거리는 참 솔직하다고 그는 말했다. 몇 년 뒤 홍대앞 라이브 클럽에서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노래로 쓴 일기장’이랄 수 있는 첫 앨범을 내는 데까지 왔다. “노래로 밥 벌어 먹고 사는” 소박한 꿈을 이뤘다고 하기엔 아직도 생활이 빡빡하지만, 그래도 그 길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예전에 호텔 바에서 노래를 하는데, 허름한 차림의 아저씨 한 분이 들어오시는 거예요. 노래를 한참 들으시더니 저한테 다가와 쪽지를 건네주고 나가시더라고요. ‘사업도 망하고 세상을 버텨낼 기운도 없어 마지막으로 좋은 호텔에서 한 잔 마시고 죽으려 했습니다. 난 음악을 잘 모릅니다. 그런데 당신 음악을 듣다보니 왠지 모르게 아내와 아이들이 생각났습니다. 다시 돌아가렵니다.’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이었어요. 음악을 진심으로 하면 그 누구와도 통하는구나, 깨달았어요. 그 쪽지, 지금도 가지고 있어요. 지금도 음악하다 힘들 때면 가끔씩 펴봐요.”

-하이미스터메모리 '이런 날 이런 나를'

작성자서정민(한겨레신문)  webmaster@cowalknews.co.kr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함께걸음 과월호 모아보기
함께걸음 페이스북 바로가기

제호 : 디지털 함께걸음
주소 : 우)07236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22, 이룸센터 3층 303호
대표전화 : (02) 2675-8672  /  Fax : (02) 2675-8675
등록번호 : 서울아00388  /  등록(발행)일 : 2007년 6월 26일
발행 : (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  발행인 : 김성재 
편집인 : 이미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노태호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함께걸음'이 생산한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4.0 국제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by
Copyright © 2021 함께걸음. All rights reserved. Supported by 푸른아이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