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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명함 1장 , "아니면 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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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지민
   

사업상의 소개로 어느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화려한 외모의 그가 건넨 명함에 찍힌 그룹의 로고만으로도 분위기가 확 바뀝니다. 누구나 선망하는 그룹의 비서실 간부라고 하네요. 대한민국 내부 차원이 아닌, 세계 유수의 그룹이기에 앞뒤를 재단하며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동안 치열하게 경쟁해왔던 다른 협상 후보자들은 일순간 전부 뒤로 넘겨버린 채, 서둘러 계약서에 서명하고 그와 함께 사업 진행을 시작하기로 했죠.

‘역시 모 그룹 비서실 간부답다!’는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올 만큼 그의 모습은 당당합니다.
최고의 외국 대학 출신 학력에 화려한 언변까지 갖춘 게 부러울 따름입니다. 다른 사업가들과 함께 어울리는 자리라 해도, 언제나 그가 중심이 되는 게 믿음직스럽습니다. 그로 인해 새로운 사업에 진출하기도 했고, 그를 위해 주위의 다른 사업자들을 연결해 주는 다리 역할도 담당해왔습니다. 왜 그를 그렇게 믿고 높이 평가하느냐고요? 그가 말한 출신 대학과 직장 이름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증명해 주니까요.

그렇게 행복한 밀월여행을 이어가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난데없이 그 사람의 명함 자체가 가짜라는 게 밝혀집니다. 박사 학위나 유학은커녕, 대학 자체를 간 적이 아예 없답니다. 해당 그룹에 문의한 결과, 그런 인물이 입사했다는 흔적조차 남아 있는 게 없다고 하네요. 그동안 진행됐던 사업 과정을 뒤늦게 따져 보니까, 이 기업 저 기업의 생산품과 유통망을 교묘하게 연결시키기만 했을 뿐입니다. 수많은 사업가들이 환호하며 높게 평가하던 그 명함의 주인공은 실체도 없던 허상이었음을 비로소 확인하며 깨닫게 되어버린 것이죠.

그래도 그를 이해하면서 기존의 사업을 계속 진행시키는 게 객관적으로도 옳은 일일까요?
명함과 학력 내용은 가짜라고 밝혀졌지만, 나름대로 능력 있고 사업 수완도 좋은 사람이라며 변함없이 감싸 줘야 할까요? 그 그룹에 근무한 적 없고 그런 대학을 나오지도 않았다는 게 명백해졌는데도, 그 사람을 믿고 따라야 한다며 주위 사업가들을 독려시키는 게 상식적인 해답이 될까요?

세상 누구나 ‘첫인상’이 중요하다는 건 당연한 일이겠죠.
사람들은 그가 내밀었던 명함을 믿었습니다. 그가 나왔다던 학교 이름을 기준으로 그의 능력을 판단하게 됐던 바 있습니다. 그가 몰고 다니던 고급 수입 차량과, 그와 만나던 최고급 와인 바의 중후함을 그의 능력인 양 신임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전부 거짓이랍니다. 기존에 거래해왔던 오랜 기업체들을 전부 배제시키며, 그와 함께 이룰 새로운 미래의 단꿈에 젖어 있었죠. 그런데 이제 와서 미안하다는 한마디 말로 모든 걸 무마시키려는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감해집니다.

깨끗이 용서해야 할까요? 사람은 누구나 그럴 수 있다며 어깨를 다독이는 게 인지상정일까요?
지난 일은 다 잊어버리는 게 서로에게 좋은 일이며, 그게 바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나 배려가 되는 걸까요? 이런 일이 여기저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데, 솔직히 저의 눈에는 그 명함 1장 때문에 일찌감치 배제됐던 기존의 다른 거래처 협상 후보자들의 입장과 처지가 끊임없이 악몽처럼 떠오릅니다. 그런 까닭은 무엇일까요?

‘기존의 오랜 거래처’들을 배제했다는 것은 아주 단순하면서도 직접적인 의미로 남습니다.
그건 미래의 꿈을 설계하던 젊은이들의 탈락일 수 있고, 가정을 책임져야 했던 가장들의 좌절이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죠. 정당한 노력과 피나는 훈련을 거듭했던 전문 지망생들의 자포자기와 절망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젊은이들과 집안 가장 및 지망생들이 잘못한 건 무엇일까요?
상대적으로 ‘가짜 명함’을 만들지 않았다는 게 원인이랍니다. 성공하려면, 흔한 말로 ‘뜨기 위해선’ 그 정도의 위조는 공공연한 비밀로 치부된답니다. 그런 방법론이 분명히 존재하는데도, 위조 하나 제대로 못하면서 뒤로 밀린 사람들만 바보가 되는 게 우리나라의 현실이라는 것이죠.

쉽게 용서하고 쉽게 잊어버리며 쉽게 넘어가는 세상이기에, 당분간 이런 일은 계속 발생하고 악순환처럼 반복이 될 겁니다. 그런데 ‘대강대강 넘어가자’는 분위기가 많다는 데 솔직히 당혹감을 느낍니다. 정당하게 노력하고 진솔하게 스스로를 밝히며, 실력 자체로 승부를 걸면서 최선을 다했던 이들의 쓸쓸한 뒷모습은 어떡해야 할까요?

여담 같은 한 대목을 언급하며 마무리를 해야겠네요.
저와 아주 마음 가까운 극작가님 한 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특정 주제의 작품을 적어달라는 같은 대학 출신의 ‘유명한’ 연출가 선배 의견에 따라, 1년 넘는 각고의 노력을 쏟아 부으며 원고를 완성했답니다. 그런데 선배 연출가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다시 적으라고 했다 하네요. 그래서 다시 고쳐 적고 또다시 퇴짜 받으며 계속 다듬기를 2년 넘게 흘려보냈습니다.

정말 빼어난 작품 원고임이 분명한데도, 극작가의 근본적인 자존심까지 상하게 만들었던 그 선배는…… 그 대학을 나온 적이 없다고 자백하며 홀연히 사라져버렸답니다. 같은 대학 선배가 아닌 사람한테 일방적인 후배 취급을 받으며, 2년 넘는 시간을 원고 작업에 희생당했다는 것이죠.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저도 그런 기준으로 따져 보니까, 정말 더 늦기 전에 ‘그럴싸한’ 로고 새긴 명함을 만들어서,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고 커다란 판을 벌여야 정당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야만 사회적 성공과 명예가 보장된다니까, 당연히 그렇게 뛰어들어야 순진하다는 뒷소리를 듣진 않겠죠. 나중에 들키면…… 뭐, 간단하게 해결되고 무마된답니다. 미안하다고 밝히기만 하면 된다고 하니까요.

그런데 뭘 위조해야 할까요?
위조해야 할 게 뭔지를 고민부터 해야 하는 걸 보니, 저 역시도 별 수 없는 소시민 중 하나인 모양입니다. 외국의 유명 대학원 박사 학위를 하나 추가할까요? 아니면 쓴 적도 없는 책 제목 몇 개를 저의 약력 안에 삽입하는 게 나을까요? 그냥 씁쓸하게 웃고 말아야 하는 저의 모양새가 우스워지네요. 사진 속 어느 동물의 몸짓처럼, 세상이 잠잠해질 때까지 머리 숙이며 가만히 기다리는 게 그들한테는 ‘장땡’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머리와 목과 허리가 좀 많이 아프겠지만…….

작성자채지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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