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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언어로 청각장애인 인권 말한다”

Ⅲ. 국내 유일 농영화 제작 중인 박재현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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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들이 문화를 통해 자신의 솔직한 욕구를 드러내고 있다.
사회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사회와의 적극적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그 움직임은 문화의 영역 중 연극, 영화를 통해 더욱 활발히 드러나고 있다.

장애인들의 이러한 움직임들은 21세기 들어 활개를 띠기 시작했는데, 장애인이 객체화되던 수준에서 장애인이 적극적 문화생산자로 나서면서 최근 장애인 문화가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장애인 문화라 일컬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최근 장애인들이 주체가 되어 생산하고 있는 문화 생산물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
<함께걸음>에서 장애인들의 연극, 영화 활동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도록 하겠다.

Ⅰ. 연극, 영상을 통해 본 장애인 문화 ①
Ⅰ. 연극, 영상을 통해 본 장애인 문화 ②
Ⅱ. 지적장애우가 만든 영화 ‘봉천 9동’
Ⅲ.국내 유일 농영화 제작 중인 박재현 감독
Ⅳ. 배우 6인이 말하는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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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진호 기자  
 
“나는 보이지 않은 목소리(음성언어)를 내지 못한다. 하지만 보이는 목소리(시각언어)를 내고 있다.”

지난 2007년 12월 17~21일까지 서울 종로3가에 위치한 수화사랑카페에서는 한 이동통신사 광고 출연으로 더욱 유명해진 박재현(27, 청각장애 1급) 감독의 영화 ‘이방인’ 상영회가 열렸다.

농인독립영상제작단인 데프미디어와 함께 꾸준히 ‘농영화’를 제작해오고 있는 박 감독이 ‘영화’라는 매체를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청각장애인 당사자로 살아가면서 청각장애인의 언어인 ‘수화’가 언어 취급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분노 때문.

농학교에서조차 수화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교사의 수가 소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듣지 못하는 것’을 질병 취급당하는 비장애인 중심의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인공와우 시술이나 구화교육을 받는 것이 수화를 배우는 것보다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으며, 강요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박재현 감독이 영화를 통해 ‘수화를 언어로 인정해 달라’고, ‘청각장애인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해 달라’고 외치기 시작한 이유는 바로 이런 청각장애인의 현실을 알려내고 바꿔나가기 위한 나름의 운동방법인 셈이다.

“취미가 직업으로 바뀔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아마 청각장애인이 아니었다면 영화 찍는 일에 매달리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어요.”

데프미디어의 열한 번째 영화 ‘이방인’의 마지막 상영회가 열린 자리에서 만난 박재현 감독의 얼굴은 의외로 담담했다. 영화판에 뛰어든 계기에 대해 묻는 질문에 박 감독은 “돈만 벌어서 사는 것 보다 뭔가 특별한 인생을 만들고 싶다는 욕구 때문에 이 길을 선택했다.”고 대답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지난 2005년 자조모임으로 출발한 ‘농인영화동호회’가 지금의 데프미디어로 탈바꿈해 본격적인 영화제작에 나선 것.

영상매체에 관심 있는 청각장애인들이 모여서 수화 중심의 영상을 만들고 있는 데프미디어는 박 감독을 비롯해 연출부 3명이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틈틈이 영화를 만들고 있으며, 제작부는 다른 회사에 다니면서 영화촬영이 있을 때마다 시간을 쪼개어 제작하는데 힘이 되고 있다고.

“‘농영화’ 통해 영상매체 이용한 시위를 해보자는 마음에서 시작했죠”

소리는 없다. 오로지 영상언어만으로 채워진 ‘농영화’가 데프미디어에 의해 국내에서 처음으로 선을 보이자 청각장애인들뿐만 아니라 비장애인들의 반응도 무척 뜨거웠다고.

“사실 청각장애인들에게 있어 농영화는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아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자라서인지, 무성영화시대처럼 살아서인지… 그냥 삶 그 자체죠. 일부 비장애인 관객 분들은 ‘소리가 없어서 답답했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지만, 오히려 집중할 수 있게 돼 잘 봤다고 이야기 해주시는 분들이 많아 뜻밖이었어요.”

소리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는 비장애인 관객을 보면서 영화라는 매체가 ‘수화라는 언어를 세상에 알리는데 효과적인 방법’임을 확신하게 됐다고.
“아직까지도 텔레비전과 한국영화에는 자막이 없잖아요. 또 청각장애인들이 직접 만든 영상매체가 없기 때문에 정보접근권에 미약할 수밖에 없고요. 이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영상매체를 통한 투쟁을 벌이게 된 거죠. 신상옥 감독이 만든 영화가 지금은 문화제가 된 것처럼 우리나라에서 하나뿐인 농영화를 우리 손으로 만들고 있다는데 큰 자긍심을 갖고 있어요. 언젠간 우리 영화가 후배들에게는 ‘수화문화유산’으로 남을 테니까요.”

장비 문제로 열한 번째 작품에서야 흑백이 아닌 컬러영화를 찍을 수 있을 정도로 돈도, 인원도 부족한 상황에서 영화를 만들어가고 있지만, 꾸준히 농영화를 만들고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영화 ‘이방인’ 통해 소통의 부재 그려

영화 ‘이방인’에서는 이전의 데프미디어 작품이 그랬듯 소통의 부재 때문에 겪는 청각장애인의 고민과 어려움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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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에 의해 구화(상대방의 입술 모양을 읽어 그 뜻을 알아듣고, 자신도 그렇게 소리 내 말하는 방식)로 소통해오던 한 대학생이 우연한 기회에 수화로 대화하는 청각장애인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는 게 내용이다.

영화 속에는 논란의 대상인 ‘인공와우’시술부터 ‘구화’와 ‘수화’사이에서 갈등하는 청각장애인의 현실을 진솔하게 그리고 있다.
영화 속에 삽입된 물고기들과도, 육지동물과도 함께할 수 없던 개구리 우화는 이런 청각장애인 사회의 고민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

“소리를 조금 들을 수 있는 이가 있는가 하면 전혀 듣지 못하는 이들도 존재하거든요. 소리를 조금 들을 수 있는 난청인들은 사회생활 하는데 불편함이 없겠지만, 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는 이들은 어떻게 살아갈까요?
구화교육을 받았다 하더라도 나이가 들면 결국 수화를 사용하게 되기 때문에 청각장애인들에게 있어 수화는 모국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어요.

결국 구화교육만을 강요하는 지금의 방식은 모국어에 대한 살인을 저지르는 것과 똑같지만, 아직까지 수화에 대한 전문교육을 받을만한 센터가 한 곳도 없을 정도로 인식이 부족해 청각장애인들의 정체성이 상실 돼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 역시 부모님이 수화대신 구화를 하라고 교육받았지만 계속 수화를 사용하고 있어요. 처음엔 뭐라 하셨지만 지금은 별 말씀 없으신데, 결국 부모님 역시 구화교육의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신 거죠.”

영화는 구화나 인공와우 등을 통해 자신의 장애를 숨기려 하지만 결국 청각장애인임을, 오히려 수화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청각장애인만의 문화를 당당하게 만들어가야 한다는 박 감독의 메시지가 담담하면서도, 강하게 담겨있다.

“20년 전만 하더라도 수화는 ‘필요 없는 도구’라는 생각에 문법도, 사용하는 이도 극소수였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수화에 대한 중요성을 뒤늦게 깨닫는 모습을 대학교에서 종종 접하는데, 일반학교에서 비장애인과 생활하며 수화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생활하다 뒤늦게 이를 접하고는 ‘자신의 모국어를 찾는 기분’으로 수화를 배우는 이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구화의 한계를 스스로 절감한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농학교에서는 여전히 구화교육을 강화하고 있는데, 이런 어이없는 현실을 보고 있노라면 비참한 심정이 들어요.”

비장애인처럼 소리 내 말하면서 세상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 결과적으로는 청각장애인의 정체성과 문화를 죽이고 있는 꼴로 되돌아오고 있다는 것.

하루빨리 수화전문 교육기관이 설립돼 수화가 언어로 인정받기를, 이를 바탕으로 청각장애인만의 소중한 문화를 가꿔갈 수 있기를, 다름을 인정하고 권리로서 존중받기를 바라는 박 감독의 소망이 영화 속 곳곳에 묻어나 있었다.
작지만,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기며 한발자국씩 진일보 해나가고 있는 박 감독의 꿈은 무엇일까.

“데프미디어센터를 세우는 게 제 꿈이에요. 청각장애인 당사자가 직접 방송을 만들고 영화를 제작하고, 운영할 수 있는 게 작은 소망입니다. 그런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바라기보다는 하나씩 이뤄나가고 싶어요. 지금처럼 변함없이 말이죠.”

‘청각장애인 권리 찾기’를 위해 박 감독과 데프미디어가 벌이는 운동의 씨앗이 탐스러운 열매로 돌아오는 그 날이 그리 멀지 않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작성자전진호 기자  016272962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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