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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건게 장이 복작복작해”

장흥 대덕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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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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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닷가 어부들이 잡은 해산물을 펼쳐놓은 싱싱 어물전. ⓒ 김창헌 기자  
 
“바람이 우∼ 하믄 나오기도 싫어.”
도청리에서 온 한 할머니는 “차 타고 댕겨야(다녀야) 하는 거리”를 손수레 끌고 왔다. 새벽 3시에 문을 나섰다 한다. 대야가 두 개다. 당근과 깐 마늘.

시장 안에 켜진 불빛은 야박하다. 집안에서 쓰는 조그마한 전구 3개가 전부. 천장 높이 달린 불빛은 있으나마나다. “씨알때기(쓰잘 데) 없는 디(데)다 펑펑 쓸 줄이나 알제 우리 같은 사람들 거들떠보기나 하가니.” 볼멘소리가 터진다. “여섯 시 되믄 불 꺼져 불어. 시방 여섯 시믄 한밤중인디 자동으로 꺼져 불어.” “이불 속에 자고 있는 양반들이 안당가. 깨믄, 날 밝았네, 하제.”

군데군데 깡통불 타오르는 장터. 상인들은 어둠 속을 헤매며 하루를 풀어놓고 있다.
풋것들 한 봇짐, 뜯어온 바닷말 한 대야 머리에 이고 장으로 들어서는 할머니들. 엉거주춤 거리는 경운기 불빛, 손수레가 자리를 잡으려 왔다 갔다 한다. 새벽 5시 장흥 대덕장(5·10일)은 하루 ‘거사’ 준비에 여념이 없다.
누군가 또 전깃불 타령을 한다. “날이나 얼릉(얼른) 샜으믄 쓰겄네. 뵈도 않고 죽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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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숨벙기’. 어쩌다 잡히는 귀한 게다. ⓒ 김창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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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생이 바지락 고막. 바다를 팔고 있는 할머니. ⓒ 김창헌 기자  
 
물꼬를 튼 것은 싱그러운 매생이

대덕장의 시작은 어물전이었다. 물꼬를 튼 것은 싱그러운 매생이였다. 어민 몇이 상인들과 거래를 트고 있다.

“(한 재기에) 3천5백원, (내가) 앙거서(앉아서) 폴아불라네.” “어매, 시방 매산이(매생이) 4천원 한 디는 대한민국에 없어.” “광주나 서울서는 업자들이 매생이 구할라고(구하려고) 난리단디….”
갈수록 매생이 값이 떨어진다. 어민이나 상인이나 고달프다. 뒤엉킨 심사가 한 차례씩 더 오간다. “그라믄 광주, 서울 갖고 가서 팔제 그라까.” “내일 회진장인게 회진장으로 갖고갈라고만.”

그런데 ‘앙금’이 싹 풀렸다. 옆에 있던 한 상인의 끼여든 말 때문. “저 사람도 내일 회진장 간디. (둘이) 내일 또 싸우겄고만.” 거드는, 천하태평한 사람이 또 하나 있다. “오늘 결판을 내불고 내일은 사이좋게 지내.” 매생이 넘겨주고 넘겨받았다.

매생이보다 더 저렴하게 거래되는 것이 ‘반매생이’다. 해우(김)가 섞인 매생이. 양식할 때, 물 수위에 따라 엉기는 바닷말이 다른데 맨 위에 매생이가 자라고 그 아래 김, 맨 아래 파래가 자란다. 매생이와 김의 수위 차이가 크지 않아 벌어지는 일이다. 그러나 매생이보다 반매생이를 더 좋아라 하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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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 팔린게 묵어불라네.”ⓒ 김창헌 기자  
 
이 캄캄한 새벽에 장바구니 들고 나온 할머니들 하나 둘이 아니다. 김조화(72) 할머니는 “괴기(고기)장씨들이 일찍 출근한게 나도 일찍 출근한 거여.” 하며 돌아다닌다. 괴기장사들 출근 시간이 조금 지나니 어물전 거리는 정말 ‘출근 전쟁’이다. 택시에서 용달차에서 생선장사들이 쏟아져 나온다. 한쪽 빈 골목에 하나씩 자리잡으며 새 장터를 만들고야 만다. 망에서 뻘덕게(돌게)를 쏟아내고 바닷물을 대야마다 나누고, 고기 종류별로 분류하고…,

아구가 큰 입을 쫙 벌리고 있다. 소금에 절여야할 아그대(젓대미)가 대야 가득 넘친다. 제사상에 놓은 가자메기(가자미), 이쁜 각시고기(노래미), 울퉁불퉁 못생긴 삼식이(쏨뱅이). 버득버득 말리면 맛있는 빨간 고기 승대, 이루꾸(멸치), 꿀(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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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검례 할머니가 주도한 술판. “친구야∼ 술잔을 높이 들어라.” ⓒ 김창헌 기자  
 
“관산장에서는 백만원 여그서는 만오천원”

“노력도가 조리섬이여. 돈을 막 건져. 바다에서 어물이 안 떠나. 막 나가기만 하믄 (어물이) 나와.”

어장이 좋아 ‘돈섬’이라는 노력도. 그 섬에서 온 아줌마들이 장 한쪽을 장악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배를 몰고 회진항으로 와서 택시 끄집어 타고 장에 왔는데 지금은 연륙교 공사가 끝나 ‘직통’으로 왔다. 밀물에 빠져나가지 못한 고기를 건져내는 ‘이강망’으로 잡은 고기를 풀어 내놓는다. 뚜머리(통발)로 잡은 꼼배장어(붕장어)가 많다. 한 아주머니가 잡아온 꼼배장어 한 마리는 팔뚝만하다. 눈독들이는 사람들이 많다.

“요 앞 관산장에도 요만한 놈 잡아다 폴았는디 요번에도 어찌게 대덕장날인 줄 알고 이런 놈이 잡혔네. 나는 요것만 폴믄 오늘 장사 끝이고만. 갖다가 영감 해 줘. 마늘 넣고 뻑뻑 과(고아) 줘.”
오늘 대덕장에서는 관산장에서보다 더 싸게 팔겠다는 아주머니. “관산장에서는 백만원 받았는디 여그서는 만오천원만 받을란게, 밑지고 폴아불란게.” 대신 에누리는 없단다. “예 말이요” 하며 자꾸 물어보던 할머니가 사갔다. 얼마나 힘이 센 놈인지 비닐봉지에 넣는데 봉지가 터져 버린다.

장이 한창인데 자리 털고 일어나는 할머니. 완도 고금도 가교리에서 온 정간심(74) 할머니다. 강진 마량까지 와서 버스 갈아타고 장에 왔다. 감태를 순식간에 팔아 해치웠다. ‘오지게’ 값이 쌌다. 한 재기에 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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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쥐 두더지 바퀴벌레 잡아요. 싹 잡아요. 냄새로 잡아요. 던져 놓으면 다 죽어요. 밖에 나가서 죽어요.” ⓒ 김창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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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톱 가는 할아버지. ⓒ 김창헌 기자  
 
“갯창에서 주서 온 건게, 싸게 줬어.” 다 팔고도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다. “감투(감태)지 담그기가 애라(어려워). 잘못 담으믄 쓰고 뻐쳐. 애기씨(아가씨) 하나가 사갔는디, (감태지 담그는 방법을) 갈쳐줬는디 잘 할란가 모르겄네.” 할머니에게 소금값 물어보는 사람이 있다. 할머니가 사는 가교리에는 ‘고금소금’으로 이름난 염전이 있다.

“정남진 갈치”라고 팔고 있는, 관산면 신동3구 사금마을에서 온 할머니. 풀치 크기의 갈치를 열댓 마리에 3천 원씩 팔고 있는데 ‘떨이 수법’으로 장사를 하고 있다. 뚜껑 덮어 대야 속 갈치 감춰두고 “떨이, 떨이, 3천원 떨이, 호박에 무쳐 묵어” 하며 판다. 할머니는 바지락과 꼬시래기, 파래도 함께 팔고 있는데 파래가 두 종류다. ‘포래(실파래)’와 ‘산포래(산파래)’. 다른 할머니는 ‘푸랭이’와 ‘산푸랭이’라고도 한다. 젊은 각시들은 산파래를 몰라 잘 사가지 않는다. “된장에다 무쳐 묵으믄 포래보다 더 맛나. 몰려 갖고 참기름 묻혀서 부식(간식)으로 묵어도 좋고.”

“득량만이 한 마디로 바다 곳간이요”

덕도 신상리 대리마을에서 첫차 타고 온 문기례(64) 할머니와 이양자(54)씨는 가지고 나온 물건도 비슷하다. 아구 승대 물메기 멱(미역). 미역 인심이 좋다. 더 잘 자라도록 일부 미역을 따주는 ‘솎음질’을 해줘야 할 때다. 물메기를 ‘곰치’라고 하는데 안 팔릴까봐 걱정이라고 한다. “경상도 강원도에서는 귀한 고기인디 여그는 묵는 사람만 묵제, 안 묵어. 뼈가 부드론게(부드러우니까) 무 넣고 해묵으믄 시원한디….”

이양자씨 말에 따르면 물메기는 야행성 물고기다. “밤에 많이 잡힌게 내가 알어.” 재미난 사실이 있다. “요 곰치마냥 비늘 없고 미끌미끌한 고기는 야밤에 많이 걸려들어. 밤에 돌아다니는 놈들이제.” 비늘 없는 고기는 야생성일 확률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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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밥도 같이 묵고, 집에도 같이 가고, 우리는 그런 사이여.” ⓒ 김창헌 기자  
 
문기례 할머니는 털 복숭복숭하게 난 게 한 마리도 함께 팔고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귀한 기(게) 나왔네” 한다. “숨벙기, 이전에 저 섬 먼 데로 가믄 많이 잡혔는디 지금은 안 잡혀. 쪄 묵어도 좋고, 된장기 해갖고 게장 해도 좋고, 매운탕 해도 좋고. 시방 질(제일)로 여문 것인디 맛을 잊어 불었는가 안 나가네.”

대덕장 어물전은 ‘단결력’이 대단하다. 옆, 건너편 가게에 손님이 오면 자기 장사 바쁘더라도 장사 도움되는 말 한 마디씩 해준다. “아까는 만원 받드만 7천원만 받을라고.” “굵은 놈 막 줘부네. 남은 장사는 어찌게 할라고.” “뭐시든 비쌀 때가 맛있어. 뻘덕게 시방 안 묵으믄 못 묵어.”
손님이 값 깎으려고 하면 내남없이 기름 값 얘기를 한다. “다섯 드럼 띠(떼)었는디 한 달도 못 가.” 치솟은 고유가로 어업용 면세유도 감당 못하게 올랐다.

말린 장어를 파는 관산 우산리에서 온 정희엄마(63)는 봄에 다시 대덕장 와야 한단다. “득량만이 한 마디로 말해서 바다 곳간이요. 겨울인게 이 정도제 봄 되믄 쩌(저기)까지 쭉쭉 늘어져. 오징어 돔 낙지 오만천지 다 나와. 돌게도 많이 나오고.” 중개상인 유복수(52)씨도 “장어 바지락 꼬시래기 매생이 해우(김) 다 장흥 특산물이여. 바다가 건게(걸어서) 장흥 장들이 복작복작하제”라고 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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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순에 학교에 가서 혼자서 자전거를 배웠다는 할머니. “쌀가마니도 싣고 다녀.” ⓒ 김창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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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생이 ⓒ 김창헌 기자  
 
“좀 갑시다” 하는 말이 나올 만큼 붐비는 장

어부들이 연 싱싱한 어물전은 아침9시가 되니까 ‘종쳤다’. 다른 가게들은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 있다. 사람들 이 많아 대덕장에서는 “좀 갑시다” 하는 말이 나온다.
두부가 잘 나간다. 김장하고 나서 김치와 곁들여 먹기 때문이다.

한복자(70) 할머니 가게는 벌써 봄 냄새 난다. 보리와 냉이가 한 바가지다. 찹쌀로 떡 해 먹는 ‘제비쑥’도 한 바가지. “이것 냄새 한번 맡아봐” 하고 할머니가 내민 것은 ‘당귀’. “고기 꿔묵을 때 뜯어서 쌈 싸묵어.” 집에 가져가 화분에 심어 놓으라고 한다. “요 순이 쑥 올라오믄 파릇파릇 보기가 좋아.” 보기만 좋을까, 방안 가득 냄새도 향긋하겄다. 뭔지 몰라 물어본 것은 ‘유채나물’이다.

대덕 회진 관산에서는 유채를 많이 심는다고 한다. “이 동네 꽃피믄 냉년(내년)에는 저 동네 꽃피고 그려. (농민과 거래하는) 회사가 있는디 땅 힘들어 한게 2년, 3년 터울을 두고 (농민과) 계약을 해.”

아침부터 궁금했던 자리가 있었다. 매생이 장사도 홍대새비 장사도 할아버지 자리라고 남겨놓았던 자리. 그 자리에 연장 풀어놓고 있는 채동식(77) 할아버지. 톱 갈아주는 할아버지다. 이 자리에서 50년을 넘게 일했다. 바닷가 어민들 장화 수선해주다가 이 자리를 잡았다. 톱뿐만 아니라 솥 신발도 고친다. 옛날에는 일 많아 사람들이 일감 맡겨 두고 돌아온(다음) 장에 찾아가곤 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톱니의) 앞니는 위로 올림시롱 밀어주고 뒷니는 막 밀어줘야 한디 인자 일 없슨게 슬렁슬렁 해.”

황순실(68) 할머니 배추가게가 ‘야단법석’이다. 장본인은 댓병소주 들고 장에 온 교회집사 구검례(83) 할머니. 상인들한테 김치 두부 뺏어오고 황순실 할머니 배추 두 폭을 주인장 허락도 없이 반으로 갈라 버린다. 푸짐한 상차림 ‘입’을 모으기 시작한다.

“나는 기분파여”라고 말하는 할머니는 ‘폭군’이다. 술 안 마신다는 사람 기어이 먹인다. “술을 묵어야 동무가 돼제. 글안허믄 적이여.” 노래로도 강권한다. “친구야∼ 술잔을 높이 들어라, 우리가 살믄 백 살을 살겄느냐 어쩌겄느냐∼.” “뜨겁게 뜨겁게 사랑하다가 돌아서면은, 에라 모르겄다 술이나 퍼 마시자∼.”댓병소주 바닥 날 때쯤, 할머니의 ‘장터 강연’. “아무리 외로움이 가득 찼어도, 깝깝한(갑갑한) 일 있어도 즐겁게 살믄 돼. 가슴에 성가심 품고 사는 것이 제일 미련한 일이여 ….” 강연에 대한 반응이 있다. “인자 진짜 집사 다 돼불었네. 집사님, 술 받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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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운탕도 좋고 꿔(구워) 묵어도 좋고" 말린 꼼배장어를 팔고 있는 우산리 정희엄마. ⓒ 김창헌 기자  
 
“대덕장 가믄 개가 십원짜리 물고 다닌다고 했어”

“관산장은 죽천장이라 하고 대덕장은 대흥장이라고 했제.”
한동은(83) 할아버지 말처럼 대덕장은 예전에 ‘대흥장’이라 했다. 조선후기 1757년(영조 24년)의 장흥읍지 《정묘지》(丁卯誌)에 대덕읍은 ‘대흥방(大興坊)으로 적어져 있다. 《대덕읍지》에는 1867년 대덕장이 개설됐다고 나와있지만 조선 후기 1770년 간행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대흥장‘이 보인다. 1일로 끝나는 날 장이 서는 십일장이었다. 1830년에 간행된 《임원경
제지》(林園經濟志) 단계에 와서 5·10일 장이 서는 오일장으로 발전했다.

한동은 할아버지는 대덕장이 ‘큰 장’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넓은 들과 인구다. “대덕이 논으로 따지믄 장평 장흥 다음으로 넓고 밭으로 따지믄 질로(제일) 넓어. 둘이 합쳐노믄 1등이고. 옛날부터 사람이 많이 살았제.”

그러나 강현섭(73) 할아버지는 “넓어도 농사짓기가 힘들었어”라고 얘기한다. “평야지대라고 ‘번던들’이라고 하는디 수리시설이 없어 농사짓기 힘든게 ‘보잘 것 없는 번던들’이라고 했어. 저수지 생기고 쌀도 좀 나고 밭도 논으로 많이 개간을 했제. 일제 때 바다 막아 만든 서산농장 덕촌농장도 그때부터 논 구실을 하고. 물이 따라준게 박정희 정권 때 이북에서 온 김행서라는 사람이 깡패를 끄서다가(데려다가) 관덕농장 맨들고. 바다 막은 깡패들 땅 주고 살아라고 했는디 다 폴고 가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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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랜만에 만났다. 얘기가 길다. ⓒ 김창헌 기자  
 
대덕이 커 나가는 데 빠트릴 수 없는 게 김이다. 한동은 할아버지는 “여그는 일제 때부터 해태가 주산물이었어” 한다. “발장(김발) 치고 살 때는 대덕장이 직신덕신(흥청망청)했어. 대덕장 가믄 개가 십원짜리 물고 다닌다고 했어. 일제 때는 십원짜리가 큰돈이여. 장흥수산업협동조합 해태검사소가 대덕에 있고. 일본 사람이 검사소 소장이고. 대덕은 그때부터 김으로 묵고 살았다고 보믄 돼.”

1960년대 인공포자가 나오기 전만 해도 옹암에서 나는 자연산 김을 전국 최고로 알아줬다. 1970년대도 장목을 바다에 꽂고 대발 엮어 재배한 양식김은 완도김과 함께 전국 김 생산의 전부를 차지할 정도였다. “사람들이 해태로 돈 벌어갖고 장에서 쓴게 외지 상인들이 안 몰려들겄어.” 김 생산량은 많았지만 장에서는 거래가 이뤄지지 않았다. “일제 때부터 조합이 있어 갖고 장에 내다 폴믄 벌금을 믹(먹)여. 긍께 장에 못 갖고 나오제. 해태 빼놓고는 다 거래가 됐제. 천관산 밑에 사는 연지 연정 신월 도청리 사람들 나무 해갖고 오믄 금당도 금일도 완도 사람들 와서 사가고, 유치가 감 고장이라 유치 사람들 감 싣고 오고, (강진)대구 사람들 옹기 갖고고. 시방 오히려 산지에서 바로 광주 서울로 가제, 옛날에는 장 통해서 모든 것이 지역 밖으로 나갔제.”

대덕장이 앞으로도 다른 장에 비해 비교적 ‘큰장’으로 남을 이유가 있다.
“마량장 생기고 회진장 생기고 사람이 줄긴 줄었제. 고금도도 다리 연결되고 고금, 약산 사람들 마량장으로 가불고. 그려도 산 끼고 들 끼고 바다 끼고 사는 동넨디 장에 나오는 게 딴 장하고 다르제. 봄 돌아오믄 나물, 약초, 굵은 고기가 같이 쏟아져분디 사람들 발길이 끊기겄어.”

대덕장 특산물

“옛날에는 하늘에 별 보고 엿 만들었어”
대덕 오산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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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김창헌 기자  
 
“한 볼태기 해.”
대덕장에는 핀엿(갱엿) 파는 세 할머니가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먹어보라고 ‘조각엿’ 내민다. 모두 연지리 오산마을에 사는 할머니들이다.
옛날부터 오산마을은 엿 만드는 동네로 이름나 있었다. 현재 엿 만드는 집은 세 집, 대덕장에 나온 할머니들이다.

할머니들 주 손님은 아이와 노인. 엿판 앞에 서 있는 아이 얼른 끌어내는 각시가 밉고 이빨 안 좋다는 노인이 제일 싫다. 그러나 장흥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까지 소문날 대로 난 ‘오산엿’. 친척들 부탁 받고 사러 나온 사람들이 많다.

《대덕읍지》에 나온 오산엿 내용. “1959년 초반 나주택이란 부인이 관산 신평(新坪)에서 이주해와서 잡곡 조 보리 엿기름으로 엿을 만들어 소득을 올리자 마을의 2/3 정도가 동참 53호 중에 30호가 엿을 만들기 시작했다.”

약산도에서 오산마을로 시집 온 박창엽(71) 할머니도 이 때쯤부터 엿을 만들었다. 오산마을은 엿을 만들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다. 가난이다. “천관산 밑, 산골마을인게 논밭이 적어. 물이 귀한게 풍년보다 흉년이 더 많고. 긍께 너도나도 엿을 했제. 엿 만들라믄 장작 많이 필요한디, 산골이라 나무는 넉넉하게 있슨게.”

마을 사람 거의 대부분이 엿을 해 관산장 장흥장 마량장 칠량장 등에 내다 팔았다. 공산품 시대가 되며 엿 소비가 줄자 명절에나 맞춰 엿을 만들다가 그것마저 손을 떼버렸다.

“꼬두밥 쪄서 식혜물 짜고 나무 때서 가마솥에 졸이고, 심(힘)없는 사람은 허도 못해. 엿이 밤12시에 짜주고 새복3시에 불 때고 잠못 자는 일이여. 시방은 시계라도 나왔지만 옛날에는 하늘에 별보고 어디 만치 가믄 불 때고 했어. 다 요것만 안 하믄 살겄다 했어.”
그렇게 졸여서 졸여서 만든 오산엿. 달디 달다.


작성자김창헌 기자  gudu@jeonlad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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