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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봄과 여름 사이, 당신은 그때 거기에 있었나요?

[이영문의 영화읽기] 혁명과 기억에 대한 코미디 영화 ‘그때 거기에 있었습니까’

본문

요즘 지인들을 만나면 주고 받는 인사가 있습니다.
‘촛불집회에 다녀오셨습니까?’

마치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이야기와 같습니다.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일상의 이야기들을 드라마로 만든 것이 영화라면, 최근의 촛불집회는 연출되지 않은 다큐로서의 가치를 지닙니다. 먼 훗날 다시 세월이 흘러 ‘당신은 그때 거기에 있었나요?’라는 질문을 들었을 때 우리는 무어라 답을 할까요?

시간이라는 것은 우리를 모두 망각과 착각의 호수에 가두어 버리는 마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80년 5월과 87년의 6월, 2002년의 여름과 겨울, 2004년의 봄에 우리는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요?

   
오늘 소개할 영화는 혁명과 인간에 대한 유쾌한 코미디입니다. 차우세스쿠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1989년 12월, 루마니아 혁명에 대한 평범한 소시민들의 좌충우돌 기억을 다룬 영화 ‘그때 거기에 있었습니까’를 소개합니다.

동유럽의 몰락이 시작되던 1989년 당시,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시티로부터 멀리 떨어진 작은 도시에 과연 혁명이 존재하였는가를 묻는 엉터리 토크쇼가 기획됩니다. 20주년도 아닌 16주년을 기리기 위해(물론 이 도시에서는 지난 15년간 아무런 행사도 없었지요) 세 남자가 모입니다.

지역방송국을 경영하며 토크쇼 진행을 하고 있는 수준 이하의 방송인 ‘비질’이 우선입니다. 졸부근성으로 무장한 그가 토론자 섭외에 실패한 후, 급땜방(?)을 하게 된 역사교사 ‘마네스쿠’와 은퇴한 독거노인 ‘피스코치’가 그 다음입니다. ‘마네스쿠’는 알콜중독자에다 빚투성이로 살아가고 있고, ‘피스코치’는 산타크로스 아르바이트로 겨우 연명하는 중입니다.

1989년 12월 22일 밤 12시 8분(차우세스쿠가 항복하던 시간입니다), 그 시간에 4명의 다른 교사와 함께 시청광장에서 혁명 구호를 외쳤다는 ‘마네스쿠’의 주장에 시청자 제보 전화는 거짓이라고 쏘아붙이고, 일찌감치 12시 8분 이후에 광장에 나갔다는 ‘피스코치’ 사이에서 토크쇼는 엉망진창 흘러갑니다.

이 주제를 선택한 ‘비질’ 또한 우스꽝스럽기는 똑같습니다. 어설프게 헤로도투스의 ‘역사’를 인용하고 부하직원과 부적절한 관계 때문에 큰 소리 한번 못 칩니다.

역사 시험에 자신들의 혁명보다는 프랑스 혁명만을 적겠다는 학생들, 혁명 기념일에 폭죽만 터뜨리고 노는 꼬마들, 신화 사전을 찾는 남편에게 ‘수염달린 아저씨(플라톤 혹은 아리스토텔레스)’ 옆을 가리키는 아내, 땅만 비추는 카메라 맨. 이 영화 어디에도 혁명에 관심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토크쇼 주제는 혁명의 존재유무입니다.

혁명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이 영화는 전혀 무겁지 않게 진행됩니다.
주인공들의 평범한 일상이 폭로되고 자신들의 과거가 들추어지지만 영화는 여전히 즐겁습니다. 누가 혁명의 영웅인지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그때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각자의 방식으로 증명하고 그 기억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혁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시대를 살아갔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지요. 그들은 결코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술집에서 술을 먹었고, 크리스마스트리를 사러갔으며, 아내와 싸우고 난 뒤 화해를 했습니다.

혁명이 있었다는 것을 그들은 나중에 알게 되었고 술에 취한 채 광장으로 밀려왔으며, 아내에게 용감하게 보이려고 거리로 나섰던 것입니다.
회색빛 도시의 가로등이 하나 둘 빛을 발하는 것과 함께 눈이 내리고 질퍽해지는 거리를 비추며 영화는 끝납니다.

여전히 ‘비질’은 졸부근성으로 독백을 합니다. 그러나 엉터리 토크쇼를 통해 그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혁명의 존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억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바로 혁명의 기억이 그저 평화롭고 아름다웠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 속의 가로등은 요즘의 촛불을 연상시킵니다. 그 촛불이 어디를 향하든, 배후가 있건 없건, 이명박 대통령이 퇴진을 하든 안하든, 사람들의 기억이 여전히 남을 것입니다.

시민혁명의 유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재미있는 영화 관람을 하듯, 사람들은 신문이기를 포기한 현재의 수구언론들과 고.소.영 강.부.자로 구성된 관료들과 한국, 미국의 두 형님(?)에게 의존하는 이명박 대통령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혁명과 인간 사이에 촛불이 타고 있습니다. 친구들과 맥주도 한잔하고, 여자 친구와 포옹도 했으며, 즉석 반주에 맞추어 춤도 추었습니다. 오징어도 씹으며, 김밥을 꺼내 사람들과 나누어 먹기도 했고, ‘명박산성’에 올라간 최초의 사람이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먼 훗날 모두가 기억하는 것은 하나일 것입니다.
넘실되던 촛불이 참 평화스럽고 아름다웠다고. 혁명은 짧지만 사람의 기억은 오래 가는 법입니다.
다시 한 번 묻습니다. ‘2008년 봄과 여름 사이, 당신은 그때 거기에 있었습니까?’
여러분들의 건승을 빕니다.
작성자이영문 (아주대학교 인문사회의학과 교수)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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