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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걸음 작은 기획/이영호의 영화이야기]서편제, 그 실패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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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편제, 그 실패의 미학

영화 "서편제"는 필자가 이 지면을 빌어서, 그 흥행상의 엄청난 성공에 대한 원인을 분석 한 바 있다. 오늘은 영화 자체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자. 임권택이라는 영화감독이 세인의 이목을 끌기 시작한 것은 그가 "만다라"를 연출한 후부터이다. 그가 어느 지면을 통하여 토로한 것처럼 "만다라" 이전의 작품들은 괄목할 만한 것들이 아니었다. 어쨌든 그는 이후 "안개마을" "씨받이" "길소뜸" "아제 아제 바라아제" 등의 영화들을 연출했다. 그러나 대부분 흥행에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국내의 영화제에서 어느 정도의 성과를 얻었다.
 "장군의 아들" 시리즈의 흥행 성공은 그의 소위 "흥행감독"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예상 외로 "깐느 영화제"에 출품하려고 만든 "서편제"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의 기대 (모 텔레비전 방송국의 밤 11시 뉴스에 초대되어 대담을 한 적이 있다.)와는 달리 본선에 진출하지 못하였다.
 그러면 우리 대통령께서도 또 김대중 선생께서도 극찬을 했던 (물론 이분들이 영화 전문가들은 아니지만) 또한 많은 한국의 영화평론가들에 의해 최고의 영화로 평가되었던 "서편제"가 어떤 영화였기에 임권택 감독이 그렇게 원하던 깐느에서 수상을 하지 못했을까? "서편제"의 "깐느"에 대한 도전의 실패는 이를 예언했던 혹은 개대했던 많은 평론가와 관계자들의 오판을 입증하는 것인가? 이제 "서편제"가 어떤 영화인가 살펴보자.
 서편제의 줄거리는 매우 단순하다. 한 사내(동호)가 송화라는 자신과는 의남매인 소리꾼을 찾아가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그의 회상과 혁필화를 업으로 살아가는 한 떠돌이의 구술로 이루어지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유봉이라는 소리꾼은 스승의 애첩과의 사연으로 파문당하고 떠돌이 소리꾼이 되어 고아인 송화라는 계집아이를 데리고 전전한다. 그러다 어느 마을에서 한 과부의 정분이 나서 과부의 아들(동호)과 송화 등을 데리고 마을을 뜬다. 그 과부는 난산을 치르다 죽고 유봉은 송화와 동호를 데리고 소리를 가르치며 방랑한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도 바뀌어 소리를 팔아먹고 사는 것이 힘들어지고 동호는 송화와 유봉을 떠나간다. 송화는 심신이 병에 들고 소리하기를 거부한다. 유봉은 송화에게 부자가 과다하게 들어간 약을 먹여 그녀의 눈을 멀게하여 소리를 다시 가르친다. 유봉은 늙고 병든 몸으로 송화에게 소리를 가르치다 죽고 송화는 외톨이가 되어 여기저기 떠돌며 소리를 팔고 살다 어느 마을의 주막에서 한 중늙은이에게 몸을 의탁하고 살게 된다. 마침내 동호와 송화와 만나 송화의 "심청가"와 동호의 북장단은 밤새 어우러지고 서로 아무 말 없이 헤어진다. 동호는 떠나고 송화도 그 마을을 뜬다.
 이렇게 줄거리를 약술하는 이유는 영화비평의 어려움 중 하나가 바로 "인용"이 불가능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영상을 언어로 전환한다는 것이, 엄밀히 말하면 불가능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미쉘 후꼬(Michel Foucault)는 그의 저서 (사물과 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말하는 것 속에 우리가 본 것은 결코 들어 있지 않다".
 이 단순한 이야기는 많은 것을 이야기하려한다. 판소리와 소리꾼과 그들의 한과 시대의 변화가 그것이다. 판소리는 매우 역동적이고 해학적이며 적당히 외설적이다. 우리는 영화 전편을 통하여 사뭇 조심스럽게 이어지는 정적인 화면 위에 역동적인 판소리를 듣게 된다.
 송화와 동호의 해우에서도 화면은 오우버 숄더(Over Shoulder)의 투 샷(Two Shot)으로 교차하는 화면과 종반의 북과 교차하는 송화의 얼굴을 보게 된다. 다음 장면 뒤에서 주막 주인의 운우지정 운운은 두 신인 연기자의 미숙한 연기와 역동감이 결여된 화면으로 무색해진다. 다만 싸일런트 화면이 안간 힘을 쓰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송화의 소리가 익어 있음은 목소리의 주인이 바뀌었으니 당연한 것인데, 오정해의 얼굴에는 험하게 살아온 흔적도 세월의 풍상도 보이지 않는다.
 이 한 장면에서 보이는 역동성의 결여는 영화 전편에 산재해 있다. 이로 인하여 영화 속의 인물들은 판소리를 하는 소리꾼이 아니라 시조를 읊는 선비와 같이 정적으로 보인다. 마치 요즘 예술가의 대우를 받으며 텔레비전에 출연한 명창들 같다.
 영화가 일면의 아름다운 장면만으로 이루어지면 그 아름다움이 빛을 잃게 된다. 이것은 마치 석양 속의 두 연인의 모습만으로 이루어진 영화를 보는 것과 같다. 즉 미학적 절제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아름다움과 추함의 조화와 대립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편집을 마술에 비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촬영방식이 헐리우드와 다르니 이는 이미 편집자의 손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한 영화에 대한 기억은 하나의 인상적인 장면으로 기억 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것은 음악으로서도 아니며 대사로서도 아니다. 왜냐하면 영화는 연극도 아니고 방송극도 아니며 판소리도 아니기 때문이다.
 "서편제"는 두개의 씬으로 기억될 수 있다. 아리랑을 부르며 세 인물이 어우러지는 롱 테이크(Song Take)의 롱 샷과 거대하고 아름다운 당나무 아래에서의 이별 장면이 그것이다.
 우리는 판소리를 뽑아내는 한 서린 걸직한 소리꾼의 탁성의 매력과 판소리의 해학과 박진감, 외설을 이해하고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만 가능한 것이지 외국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외국인에게는 소리와 함께 철저히 계산된 화면의 전개가 있어야만 판소리의 역동과 리듬이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영화의 화면의 크기 즉 롱 샷(Long Shot)과 클로즈 업(Close Up)의 조화가 영상의 리듬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유봉의 여인에 대한 한은 그의 수양딸 송화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송화의 눈을 멀게 함으로 자신의 한을 승화시키지 못한다. 송화의 한은 동호와의 이별과 실명으로 깊어가나 유봉의 죽음 후에 겪는 그녀의 처절한 삶의 무게는 그만큼 더한 것이다. 그러므로 동호의 송화의 해후가 영화의 결이 되기 위해서는 두 인물의 관계가 오누이 이상의 관계로 발전될 수 있다는 시사가 있었어야 한다.
 두 인물의 연습장면에서의 "작은 이도령"에 대한 대화는 다음 장면의 연결 이상이었어야 한다. 즉 영화 전체를 통하여 인물들의 관계와 성격의 발전과정이 정적인 화면과는 달리 지나치게 비약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신인배우들의 연기가 미흡한 탓이기도 하겠지만 동기의 결여가 더욱 문제인 것이다.
 단, 혁필화가의 역을 맡았던 안병경과 씨암탉의 주인 역할을 한 단역의 연기는 훌륭했다. 영화 전체에서 살아 있는 인물은 안병경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유봉의 역을 열연한 김명곤은 배우이고 또한 이 시대의 독특한 소리꾼인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소리는 파문당한 어느 명창의 수제자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초반에는 아주 잘 맞아 떨어지는 반면에 아쉬움이 있다는 말이다. 오정해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지만 그녀의 소리꾼으로서의 미래가 이 영화로 인하여 흔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작성자이영호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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