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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처럼 괴기 싸게 먹는 날 없을 것이요”

[오일장속으로] 진도 오일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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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닷컴]

   
▲ “아짐, 이 놈 어찌요.” ⓒ 김창헌 기자
다시 만났다. 나보다 아줌마, 할머니가 먼저 알아본다.
“오메, 이 총각(?) 또 왔네.”
작년 이맘때, 십일시장(4·10일)에서 만났던 어물전 사람들이 이곳 오일시장(1·5일)에서도 좌판을 펴고 있다.

얼굴 마주하고 있자니 1년 전 ‘추억’이 흘러나온다. “간재미 맛나게 썰어 묵었제. 간재미 생각나서 또 왔는가.”
‘진도까지 와서 간재미 안 먹고 가면 서운하다’며 상추쌈 해서 입에 넣어주던 그 맛. 소주 한 잔, 달았다.

장 파하고 옛날처럼 ‘한 판’ 벌이기로 했다. 이번에는 간재미 대신 ‘낙지’. “별시럽게(별나게) 오늘 낙지가 많이 나왔구만. 낙지 조사불제.”

“별시럽게 낙지가 많이 나왔구만. 낙지 조사불제”

아침밥부터 먹는다.
딱, 아침 6시 정각이다. 시장 앞에 있는 식당 ‘까치주점’의 주인 정일심(58)씨가 “밥들 묵어라” 하고 고함을 친다. 몇몇 상인들도 식당으로 들어서며 “아, 싸게싸게(빨리빨리) 달라들어” “늙은 언니야 언능(얼른) 온나” 하며 불러들인다.

새벽 2시, 3시에 물건 꾸려 달려온 고단함. 대부분의 시장 상인들이 이 식당에서 아침 요기를 한다. 십여 년 전부터 이리 해왔다고 한다.
남자들은 방으로 들어가고 여자들은 탁자에 앉는다. 한 상인은 밥을 푸기 시작하고, 한 상인은 국을 나르고, 한 상인은 “내 밥 언능 갖과. 나는 배고파 죽겄는게 묵어야 쓰겄네” 하며 재촉을 하고.
3천 원짜리 백반이다. 제대로 얹어 놓은 고봉밥이다.

   
▲ 쟁반 하나를 다 차지하던 서대가 팔렸다. 싱싱해서, 펄떡펄떡거려 봉지에 넣기가 쉽지 않다. ⓒ 김창헌 기자
   
▲ 요 앞에도 사진작가가 담배 피는 모습을 찍어갔단다. ‘포즈’가 자연스럽다. ⓒ 김창헌 기자
반찬으로 나온 ‘깡다리(강달이)조림’이 잠시 말썽이었다. “주인장이 내 깡다리를 안 사갔는디, 어찌게(어째게) 요것이 나왔네.” 한 어물상이 주인장에게 ‘해명’을 요구한다. 주인장 정일심씨는 “니야 깡다리로 하믄 이 맛이 나겄냐. 니야 깡다리로 하믄 나 욕 바가지로 얻어 묵어야” 하며 거한 입담으로 받아친다. 사람들 웃느라 밥숟가락을 뜨지 못한다.

그러나 요 앞 장날 나온 오징어국 재료는 불만(?)을 터트린 상인 것이었다. 시장 상인들을 상대로 하는 장사다. 음식 재료 사는 것이 정해져 있다. 이 사람, 저 사람 돌아가며 팔아주는 것이 당연하다. “어쩌다 설거지도 해주고 하는 언니한테는 눈치 나지 않게 갈아주고 하제.”
식당은 잔칫집이다. 내남없이 말들이 걸다. 주고받는 농이 수준급이다. 웃음소리가 간격을 잘 맞춰 터진다.

“할매들, 혈압약 장전!” 식사 끝나자 주인장이 하는 소리. “저것이 늙은 나를 보꾸네(볶네)” 하면서 나이 든 상인들 모두 커피에 혈압약을 삼킨다.
아침밥 뜨면서 ‘아, 진도구나!’라고 생각했다. 배추장사가 용달차 스피커로 음악을 크게 틀어놨는데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진도아리랑〉이다.

배추장사는 “아침부터 힘 빠지게” 시장 상인들을 웃기기도 했다. 용달차 마이크로 ‘동네방송’을 했다. “아아, 알려 드립니다. 두부장시는 차를 얼른 와서 빼주시기 바랍니다. 두부장시 땜시(때문에) 배추장시가 물건을 하차하지 못하고 있사오니 냉큼 달려와 주시기 바랍니다.”
한 할머니는 말한다. “잡것들, 지랄들 한다. 하하하.”

   
▲ 딱, 아침 6시 정각이면 이 식당에 모여 식사를 한다. 제대로 얹어 놓은 고봉밥, 깡다리조림에 금방 비워낸다. ⓒ 김창헌 기자

“장어국 먹고 나면 다른 것은 맹물에 조약돌 삶은 맛”


본격적으로 장사 채비에 들어간다.
크나큰 서대 한 마리가 스뎅(스테인리스강) 쟁반 하나를 다 차지하고서 펄떡펄떡, 망에서 끄집어 낸 장어는 그 큰 대야에서 빠져나와 바닥을 휘젓는 통에 주인장 애간장을 태운다. “12만원(1만2천원)짜리가 곱게 있어야제, 왜 그런다냐.” 손님들이 장어를 곧잘 찾을 때다. ‘숙주에 고사리 넣은 장어국 먹고 나면 다른 것은 맹물에 조약돌 삶은 국맛이 난다’는 말의 때가 시방이다.

아주 작은 것에도 장사 수단이 숨어 있다. 낙지가 담긴 대야에는 갱물(바닷물)을 많이 부으면 안 된다. 낙지가 작게 보인다. 대야 속 고기가 훤히 들여다보여야 팔리는 법, 생물 담긴 대야에 일어나는 물거품을 제거하는 방법이 있다. ‘새우깡(과자)’이다.

“옛날에는 식용유 및(몇) 방울 떨치고, 명태 창시(창자) 빠트려 갖고 뻐끔(거품)을 없앴는디, 누가 알아냈는가, 요 새우깡 및 개믄 싹 없어져 불어. 요 과자를 기름으로 튀겨논게 그런갑써.”
아홉 시 다 돼서야 장에 손님이 들어선다. 진도의 다른 시장 상인들이 대부분 그렇듯 오일시장 상인들도 모두 손님들을 ‘아짐’이라고 부른다. “아짐, 뭐 사러 일찍이 오셨소.” “어이 아짐, 깡다리가 좋아.” “아짐, 까시락장대(크기가 작은 장대) 싸게 가져갈라.”

맨 마지막에 앉아 있는 상인도 목소리를 높인다. 안까지는 채, 열 걸음도 되지 않는데, “안에까지 들어오쇼. 끝까지 와 봐, 아짐. 고기 싸게 줄게. 젤 안에서 본전만 할라네.”
가장 먼저 ‘머리에 돈 문지르고’(마수걸이를 하고 오늘의 운을 비는 행동) 주머니에 집어 넣은 사람은 반지락장사 김하자(59)씨. “아짐은 물건도 잘 보고 사람도 잘 보요. 나 벌포에서 왔소.” 갯바닥 좋은 벌포 반지락이라는 것.

단체 손님이다. 네 할머니 줄 맞춰 온다. 여기저기 ‘아짐’ 소리 터지고 “나도 마수 했어요.” “내가 3등이여” 하는 말들이 나온다.
줄박대, 쉬쉬박대, 질로(제일) 맛있는 참박대가 팔려나가고, 날 좋을 때 말리면 좋을 장대, 거칠조기가 척척 나간다. 하지만 지금 먹기 좋은 병어는 이상하게 인기가 없다.

김하자씨는 “진도읍장에서는 사람들이 사다 묵은디 시골은 ‘쓸라고(제사 지낼려고)’나 사는 괴기(고기)제, 해 묵는 괴기가 아녀.” 옆에서 듣고 있던 박정숙(82) 할머니는 “시엄씨 지사(제사) 모실라고 병어 굵은 놈 8마리를 말려논게, 그렇게 오지던마”라고 말한다.

의신면 송군리에서 뒤늦게 나온 전상규(53)·김말자(49)씨 부부가 어물전 판을 바꾼다. 이강망으로 잡은 고기를 용달차에 싣고 왔다. 오늘 아침에 물 본 것이다. 사람들이 몰린다. “박대가 잘잘하요” 하는 한 할머니 말에 전상규씨는 “아짐, 나도 다 굵은 놈이 (그물에) 들믄 얼매나 좋겄소” 하며 웃어넘긴다.

“(중매상인한테) 넘겨도 이렇게 싸게는 안 팔아봤네. 오늘처럼 괴기 싸게 묵는 날 없을 것이요.” 크디 큰 장대 2마리를 한 할머니가 “큰게 무섭네”하며 사가고, 한 할머니는 차배기(딱돔, 군평선이)를 “내가 미쳤는갑네, 이라고 사게”하며 “내 기운으로 못들” 정도로 많이 사간다.

   
▲ ‘내 아들’과 동갑이라며, 고생한다고, 사탕 한 봉지를 사서 내 손에 쥐어준 할머니. ⓒ 김창헌 기자
   
▲ “가만있어. 사진 한나(하나) 찍고.”ⓒ 김창헌 기자

“오징애 장담하고 있네”

“병어 입이 왜 작은 줄 알어.”
‘입맛 다실 놈’, 깡다리를 사러 온 이숙자(71) 할머니가 낸 문제다. 할머니의 그럴 듯한 설명에 어물전 상인들도 재밌어 한다.

“지지리도 못생긴 아구(아귀)가 그 큰 입을 벌리믄서 병어 보고 ‘나하고 결혼하자’ 그런게 이쁜 병어가 (입을 조무리며) ‘애해해해, 안 해야’ 그랬다요. 이쁜 모델보고 결혼하잔게, 연애하잔게…. 쟈(병어)는 귀생이고, 요런 것(아귀)이 결혼하잔게, 주딩이 모으믄서 파∼, 언짢아 하제.”

‘오징애 장담’이라는 것도 있다. 허풍이 심한 사람을 보고 ‘저것 오징애 장담하고 있네’ 하는 말을 한다. 갑오징어의 생김새와 습성 때문에 나온 말이다.
“쟈(갑오징어)가 이런 말을 해. 내가 바람이 불믄 ‘널(널빤지)’이 없냐, ‘닻줄’이 없냐, ‘버리’가 없냐, 대가리가 터지면 ‘된장’이 있고. 그런 말을 쟈가 한디, 바람 불믄, 파도 치믄 젤 먼저 밀려오는 게 오징애거든. 옛날에는 바람 씨게(세게) 불믄 오징애 주스러(주우러) 댕기고 그랬어.”

‘널’은 갑오징어 등면에 있는 납작한 뼈(갑, 甲). ‘닻줄’과 ‘버리’는 갑오징어 열 개의 다리 중에 유난히 긴 두 개의 다리(촉완(觸腕)). ‘된장’은 갑오징어 내장 속에 든 노란 영양분.
“그런 말도 있는디 이런 말도 있어” 하며 김춘아(70) 할머니는 또 다른 ‘오장애 장담’을 얘기한다.
“오징애가 그래, 나(갑오징어)는 죽으믄 널(관(棺), 납작한 뼈)이 있고 바람이 불믄 닻줄(긴 다리)이 있고 글씨(편지)를 쓸라믄 먹(먹물)이 있다.”

갑오징어의 먹물은 ‘싱싱함’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먹물을 흥건하게 쏟아내야 ‘막 잡아온 놈’이다. 그래서 상인들 사이에선 다른 상인들에게 먹물을 얻으러 다니는 일도 벌어진다.

   
▲ “앵길 사람은 다 앵겨.” 오일시 터주대감이다. 말 붙이지 않아도 손님이 온다. 여유가 있다. ⓒ 김창헌 기자

“머슴아 기는 큰 발이 있고 가시나 기는 없고”

마늘이 많이 나왔다. 용달차로 채소를 파는 젊은 부부는 동종 업계 할머니들에게 요즘 마늘 양파 배추 시세 등 유통정보를 건네주기도 한다. 오늘 오일시장에 사람이 좀 보이는 것은 모내기 끝내고 잠시 숨 돌릴 때이기 때문. 옷전 상인도 “오서 옵쇼” 하며 목소리가 밝다.

대야에 화랑기(칠게)만 잡아와 파는 사람이 여럿 있다. 마늘장사 옆에, 염장미역 파는 할머니 옆에, 조선고구마줄기 파는 아줌마 옆에, 다른 상인들 틈에 끼어 장사를 한다. “큰어리굴기∼(큰어리굴에서 잡은 게)” 하며 바닷가를 내세우기도 한다.
“진도 사람들은 (화랑기를) 갈아 갖고 청양고추 넣고 젓 담아 묵고 이대로 양념해서 묵기도 하고 화랑기 하나는 잘 묵어.”

벽파리에서 온 손예자(69) 할머니. 한 아줌마가 화랑기 잡은 수고를 전하며 값을 묻는다. “이 놈을 잡을라믄 몇 구녁을 쑤셔야 한디, 많이도 잡았네. 나도 잡아봐서 알어. 이것도 잡을 줄 아는 사람이 잡제, 못 잡는 사람은 넘(남)의 집만 때려붓고 있어.”

‘가시나 기(암게)’가 있고 ‘머슴아 기(수게)’가 있다. “가시나 기만 주라”고 요구하는 사람이 있다. “머슴아 기는 큰 발이 있고 가시나 기는 없고.” 가시나 기를 찾는 것은 머슴아기보다 훨씬 부드럽기 때문. 그러나 좀 뻣뻣한 ‘머슴아 기’를 주라는 사람도 있다. “머슴아 기는 밀가루 묻히든가, 마른가루(빵가루) 입혀갖고 기름에 튀겨 묵으믄 파삭파삭하니 맛있어.”

   
▲ 줄 맞춰 집으로. '빠마'는 누가 풀어주나? ⓒ 김창헌 기자
   
▲ 장날, 우연한 만남이 많다. “소주 한잔 하러 가세.” ⓒ 김창헌 기자

“옛날에는 괴기 주고 쌀로 바꿔갔제”

오일시장은 고군면에 서는 장이라서 ‘고군장’이라고도 하나 이곳 사람들은 ‘오일시’라고 부른다. ‘오일시’는 열흘에 한 번 끝자리가 5일인 날에 장이 선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 ‘오일시’라는 말이 생기기 전에는 ‘닷새장’이라고 했다.
임회면에 서는 십일시장처럼 오일시장도 닷새마다 열리는 장이 아니다. 1·5일로 끝나는 날에 서는, 나흘과 엿새의 간격을 두고 선다.

문헌의 기록으로만 보면 오일시는 1830년 전후에 생겨난 장이다. 18세기 진도에는 읍내장과 임유장(임회장, 십일시장)이 가장 먼저 나타나고, 1830년에 편찬된 《임원경제지》에 읍내장(2일) 임유장(7일)과 함께 의신장(10일, 돈지장)과 고군장(5일, 오일시장)이 보인다.

열흘마다 열리던 장이 오일장으로 발전하며 오일시장을 비롯해 진도의 장들은 장 날짜의 혼돈을 겪는다. 오일시장이 정석대로라면 5·10일로 자리매김해야 하지만 읍내장이 2·7일로 발전하며 나머지 장들은 읍내 장날을 피해서 설 수밖에 없었다. 오일시장보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컸던 십일시장이 4·10일로 정해지고 오일시는 1·5일로 정해진 것이다.

현재에 와서, 이런 오일시의 장날은 1·6일 장이 서는 돈지장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위치적으로 가까운 두 장의 장날이 겹치며 규모가 작은 돈지장은 6일에만 장이 서는 꼴이 되어버렸다. 의신면 향교리에 사는 박정숙(82) 할머니는 “1일(로 끝나는) 장날에는 장사꾼들이 오일시로 가버리니까 돈지장에는 (상인들이) 두 명이나 시(세) 명이나 앙거(앉아)있어”라고 말한다.

오일시의 옛 모습은 어땠을까? 군내면 상가리에 사는 양경휘(78) 할아버지는 “나 어렸을 때만 해도 장이 없었어. 소전 돼지전 닭전이 좀 섰지, 이런 잡화상들이 있었가니. 나 군대 갔다 오니까 여그에 장이 서고 있던마”라고 말한다.

문감단(75) 할머니도 “옛날에는 골목장도 안 됐어. 소전 있은께 술집이 좀 있었고 사거리에 점빵 있어 갖고 거기서 장사를 했제”라고 말한다.

양경휘 할아버지 말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 때만 해도 오일시장은 시장으로서 기능이 크지 않았다. 원포 벌포 모세미 등지에서 고기잡이가 성해 그쪽 아낙네들이 고기를 팔러 다렸으나 장에서는 거래되지 않았다. “개인 집으로 댕겼어. 판자 둥그렇게 엮어서 물 안 새게 솔껍질로 틈새 메워갖고, 그러게 통을 맨들어갖고 이고 다니믄서 폴았제. 대로 엮은 조락(종다래끼) 어깨에 메고 다니면서 폴기도 하고. 그때는 괴기 주고 쌀로 바꿔갔제.”

일제 강점기에는 소금 구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정시대에는 일본사람들이 ‘독재’를 했는게 철저히 단속을 했어. 아무나 사고 폴지를 못해. 근게 야매(몰래 사고 파는 것)로 소금을 얻었제. 고군 벽파리, 군내 한의리에 염막이 있었는게 밤에 지게 지고 그리 가서 사와. 산길로 오다가 순경 나타나믄 숨겨놓고, 걸리믄 잡혀가고.”

   
▲ “하하, 외통이다.” 장기판은 장이 끝나도 끝나지 않는다. ⓒ 김창헌 기자
   
▲ “집에 가믄 뭐해. 놀 때 놀고 노닥거릴 때 노닥거려야지.” ⓒ 김창헌 기자

“곡식장시가 겁나게 많았제”

종합해 보면, 오일시장이 장으로서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쯤으로 보인다. 오일시가 사람들을 불러들일 수 있었던 데는 무엇보다 교통의 힘이 크다. 1929년 오늘날 국도 18호선의 기반이 되는 군내선(진도읍-오일시-녹진)과 군도가 교차하는 길목으로 물자와 사람의 이동이 편리했다.

특히 1984년 진도대교가 세워지기 전에는 뭍에서 진도로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차량과 물자가 해남 삼지언과 진도 벽파항 뱃길을 이용했기 때문에, 바로 길목에 있는 오일시장 또한 번성할 수 있었다.

오일시리 박창준(80) 할아버지는 “아조(아주) 옛날에는 장이라고 해도 십여 집이나 살았는디, 장이 활성화된게 동네가 커졌어. 벽파항이 바로 요 앞이여. 거기서 도선이 댕긴디, 그리로 가는 차들이 동네 가운데로 댕겼는게 촌장이 촌장이 아니었제”라고 얘기한다.

이러한 교통의 여건은 우시장의 세(勢)에서도 나타난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하루 나오는 소의 수가 20두 정도로 읍내장(30두) 다음으로 많았고 돼지 수는 250두 정도로 진도 안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다.

오일시장의 가장 큰 거래물품은 쌀과 잡곡이었다. 예부터 ‘한 해 농사로 3년을 먹고산다’는 말이 있는 진도, 곡물 생산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오일시리는 진도의 출입로인 벽파항의 어귀로 뭍과 섬의 거래가 이뤄질 수 있는 하나의 통로 역할을 했다.

고성리 곽향만(70) 할아버지는 “곡식장시가 겁나게 많았제. 되거리상인(되넘이상인, 물건을 사서 다른 곳으로 넘겨 파는 상인)이 스무 명이나 있었는게. 지방상인(되거리상인)들이 장에 나온 쌀 콩 팥 쑤쑤(수수) 조 같은 것 싹 걷어놓으믄 육지상인들이 차 가지고 와서 싹 실어 가”라고 말한다.

   
▲ ⓒ 김창헌 기자
   
▲ ⓒ 김창헌 기자
진도대교가 세워진 이후에도 오일시장은 진도의 통로 역할을 그대로 해내며 장세를 과시할 수 있었으나 2003년 고군면 둔전리와 진도읍을 잇는 터널이 생기면서, 주도로인 18호선의 국도가 우회하게 되고, 인구 감소와 진도읍과의 접근성이 좋아지며 점차 옛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하지만 읍장인 진도장 다음으로 큰 십일시장과 그 장세를 당당히 겨루며 시끌벅적하게 오일장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곽향만 할아버지는 ‘고군’이라는 면 이름의 유래를 설명하며 오일시장의 ‘힘’을 얘기한다. ‘고군면(古郡面)’은 ‘오래된 군’이라는 뜻이다. 백제시대 현재의 고군면 일대는 인진도군(因珍島郡)으로 진도에서 유일한 군이었다.

“고려 때 진도읍성이 여가 있었어. 여가 진도의 도읍지였제. 그 기운으로 장이 생기고 시방도 되고 있는 거제. 알고 보믄 우리 고군이 시방도 진도를 대표하고 있다고 봐야제. 진도 구기자가 우리 마을 고성리에서 퍼져 나가서 번창했고, 회동리 앞바다(신비의 바닷길)가 외지 사람들 다 불러들이잖애. 근디 늙은 사람은 죽고 젊은 사람은 없고, 갈수록 외로워진게 큰일은 큰일이여.”
장은 오전장이다. 점심때가 되기 전에 장꾼들은 짐을 싼다. 어물전도 대야 쟁반을 정리하느라 어수선하다.

‘한판 벌리자’고 아침에 나왔던 얘기처럼 낙지 다섯 마리 썰었다. 수박장사가 와서 ‘후식’이라며 수박 한 덩어리 갈랐다.
“인자 진도읍장에서 봐야 쓰겄구만. 거기도 잘 노는 사람 많애. 뭣을 썰든 갈라 묵어 보자고.”
작성자김창헌 기자  gudu@jeonlad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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