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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쩍금 붙은 산, 갯메꽃 핀 모래밭

[길 떠나기] 신안 자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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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닷컴]

   
▲ 모래가 아름다운 섬이다. 맑은 물을 가진 바다다. 백길해수욕장은 그 중 한 곳이다. ⓒ 김창헌 기자
‘갈매기 낮게 날면 어장 걷어라’ 하였다.
어장을 걷어야 할 날씨다. 흐리다. 바다는 차분히 가라앉아 있다.
안개 스민 풍경 속으로 낮게 날갯짓하는 새, 먼 데 있는 섬이 어룽댄다. 자은도로 가는 바다는 넉넉한 여백이 있는 흑백사진이었다.

조개껍질 박힌 산봉우리, 하룻밤의 방 한 칸

나주군도 가장 높은 봉우리인 자은도 두봉산.
그곳에서 밤을 맞으리라. 천지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 그 바람과 함께 밤을 보내리라.
밤은 교교하게 바다 위로 몸을 눕히리라. 총총한 별떨기는 아닐지라도, 잠깐 나왔다 숨어버리는 여우별이라도 볼 수 있는 자리에, 하룻밤의 내 방 한 칸 마련해 보리라.

두봉산 솟은 바위에는 조개껍질이 박혀 있다 한다. 애초 섬은 바다 속에 있었다. 두 눈 감으면, 꿈결 속에, 나는 물고기가 돼 있을지도 모르겠다. 저 깊고 어둔 바다 속을 유영하는, 너불대는 해초 사이로 말끄러미 미끄러져 나가는, 수많은 고기떼 속에 내가 있을지도.

   
▲ ⓒ 김창헌 기자

“다리 놓기 전에는 남진에서 택시비 3천원에 갔는디…”

배가 닿은 곳은 자은도가 아닌 암태도 선창이다. 96년, 자은도와 암태도를 잇는 은암대교가 생기며 자은 사람들은 이곳에서 내려 마을로 간다.
배 도착 시간에 맞춰 버스 시간이 정해져 있다. 배의 종착점이 섬 버스의 출발점. 그러나 섬의 버스는 자은 사람들을 다 태우지 못한다. 버스는 섬 가운뎃길로만 곧장 간다. 둥그런 섬의 사방으로 갈라진 길을 버스는 소화해 내지 못한다.

그 길에서 벗어난, 외진(?) 곳에 사는 사람들은 누군가 마중 나오지 않는 한 택시를 타야 한다. 호주머니가 넉넉하지 못한 할머니도 택시를 이용한다. 그래서 한 할머니는 분개하기도 한다. “다리 놓기 전에는 남진(예전에 배가 닿았던 자은도 선창)에서 택시비 3천원에 갔는디 시방은 만원이 넘어.”

그렇게 화내다가 마음 여려진다. “놀러 오시는 분들 이 섬도 보고 저 섬도 귀경(구경) 하믄 좋지. 나야 늙었는게 덜 나댕기믄 되고.” 스르르 밀려오는 파도소리 같은 말이다.
자은도∼암태도∼팔금도∼안좌도. 나란한 이들 네 섬은 서로 손잡고 있다. 다리와 다리로 연결돼 어느 섬에 들든 네 섬을 돌아볼 수 있다.

   
▲ 시방, 자은도 집집이 마당들이 다 이렇다. ⓒ 김창헌 기자

“우리 섬이 해변산중이라 바다가 가직해도 땅 파고 살아”

백길리 흔질마을로 간다. 한 사람을 만나, 길은 그렇게 정해졌다. 택시비 얘기를 했던 우영덕(83) 할머니와 함께 간다.
마당 가득 짱짱한 마늘이다. 푸른 콩이 곱게 널려 있다. 연붉은 양파도 한 떼기 차지했다. 자투리 천을 기워 만든 듯 조각보 마당이다. 올망졸망 핀 접시꽃이 붉다.
지금 자은도는 마늘과 양파를 캐낼 때다. 대파를 심을 때다. 낮에 집으로 전화가 오면 받을 사람이 없다.

“우리 섬이 ‘해변산중’이라. 바다가 가직해도 그리 가서 일 안해. 땅이 널븐게 땅 파고 살제.” 할머니의 ‘바람점’도 농사일에 맞춰져 있다. “음력 4·5월 모심을 때 동쪽에서 샛바람 불믄 비가 온게 일을 싸게싸게 하고, 음력 7·8월 가실에는 늦바람에 비가 온게 나락 썩을까 무서워하고.”
섬은 예부터 벼농사 밭농사가 중시됐다. 바다 속 농촌이었다. 수확 시기가 되면 선창은 쌀 대파 땅콩 호박 양파 마늘 고추 고구마 등을 뭍으로 보내려고 붐빈다.

   
▲ 그 섬에서 누군가 이렇게 반겨줄지 몰랐다. ⓒ 김창헌 기자

할머니가 크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섬에 살지 마라’는 것. “‘은을 쥐고 빌어먹느니 뭍에 가서 살아라’ 했제.” 섬에는 점방 하나가 없었다. 수중에 은(銀)을 가지고 있다 한들 필요한 물건, 먹고 싶은 것을 구할 수 없었다. 남에게 사정사정 구걸하듯 얻어써야 한다.
그럼 왜 나가지 않으셨느냐 하니, “올같은(흔한) 송애젓이라도 내 칼 없으믄 못 먹는 법”이라 한다. ‘내 칼 없다’는 것은 ‘섬에서 나갈 재주가 없었다’는 뜻이겠다.

임자도에 ‘전장포 큰애기 모래 서말 묵어야 시집간다’는 말이 있는데 자은도에도 있다. ‘백산 큰애기 모래 서말 묵어야 시집간다.’ 백산리가 맨 모래땅이다. 백산 분계 신성은 모래가 많아 땅콩 마늘 양파 대파농사가 늘 풍년이다.

나주에 ‘다시 사람 송장은 무겁다’는 말도 이곳에 있다. “‘한운(한운리 한운마을) 쌀을 묵으믄 송장도 무겁다’ 했어. 거가 경작지가 넓고 진흙땅이라 쌀이 좋아.” 한운마을에는 이런 설화도 전해진다.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무역을 하던 석씨가 풍랑에 난파돼 이 마을에 왔는데 ‘오곡백화가 무르익고 풍요로운 땅’이라 하며 이 마을에 눌러살았다는 얘기다.

   
▲ 물이 쓰고 나면 ‘신비의 바닷길’이 여기저기 열린다. 한운 앞바다, 옥섬으로 가는 바닷길이 열리고 있다. ⓒ 김창헌 기자

“말봉산 중바우에 꿀쩍금 붙어 있어. 옛날에 바다였어”

나의 목적지 두봉산은 할머니에게 ‘말봉산’이었다. “말봉산 말봉산 했는디, 시방은 두봉산 두봉산 그러던마. 암태 되봉산도 승봉산 승봉산 글고.”
말봉산에 대한 전설은 이 섬의 생성과 맞닿아 있다. ‘말봉산’이라는 이름의 연유도 함께 한다.
“천지개벽 할 때 저 산이 ‘말(斗=두)’만큼이나 남아 있었는게 말봉산, 암태 되봉산은 ‘되(升=승)’만큼이나 남아 있어서 되봉산. 그것이 솟았는가, 물이 가랑졌는가 모른디…, 그래갖고 요 섬이 된거여. 비결이 그렇게 돼 있어.”

할머니는 그 증거도 눈으로 확인했다. “(말봉산 바위에) 꿀쩍금(굴껍데기) 있다고 말로만 들었는디, 중바우 가본께 대체나 꿀쩍금이 붙어 있어. 옛날에 바다였다는 말이 맞어.”
과학적으로 따지면, ‘최후 빙하기’에 우리나라 남서 해안은 대부분 해발 고도 100미터 이상의 산지로 되어 있었다. 그 후에 빙하가 녹고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해수의 침입으로 리아스식 해안이 되었다.

자은도는 지질학적으로 재미난 곳이다. 바다였던 곳이 모래가 쌓여 육지가 된 곳이 많다.
지금의 섬 지도는 ‘속이 꽉 찬’ 다각형의 모양새지만 지질시대에는 섬 안쪽으로 만(灣)이 깊숙이 파고들어 있었다. 복잡한 해안선을 가진 섬이었다. 지금의 섬 면적의 절반도 안 되는 땅이었다.

바다를 뭍으로 만든 것은 ‘파도’였다. 북서해안의 활발한 파랑운동은 해저의 모래를 뭍에 쌓기 시작했다. 모래 언덕 ‘사구’가 만들어졌고 그 사구 너머로 계속해서 모래가 날려 쌓이며 땅으로 바뀌었다. 백산리 둔장해수욕장 한운리 송산리 일대가 그렇게 땅이 되고 마을이 들어섰다.
자은도의 모양새를 대폭 바꿔버린 것은 간척이다. 1920년대부터 사람들은 자연퇴적으로 얕아진 것을 이용해 둑을 막았다. 포구와 뱃길, 갯벌은 사라지고 논이 생겼다.

   
▲ ⓒ 김창헌 기자

물 쓰면 ‘신비의 바닷길’…대나무섬, 옥섬, 할미섬에 닿아

자은도는 어느 섬보다 모래가 아름다운 섬이다.
분계 백길 신성 양산 면전 내치 외기 신돌 둔장 등 모래밭 해수욕장이 아홉 곳이나 된다.
갯메꽃 피어 있는 백길해수욕장은 서 있는 것만으로 가슴이 시원하다. 맑은 물을 가진 바다다. ‘새앙섬’이라는 푸른 무인도를 아름답게 키우고 있는 바다다. 가만히 걷고 싶고, 물장구치고 싶은 바다다.

양산, 외기, 내치해수욕장은 해당화가 탐스럽다. 바람새 따라 흔들리며 흰 파도 따라 피어있다. 신돌해수욕장은 해질 무렵 가고 싶은 바다다. 두리도를 앞에 두고 붉게 바다와 하늘이 젖어든다.
사월포에서 둔장까지 약 4km의 명사십리. ‘무변대해(無邊大海)’, 마음의 폭도 넓어진다.

분계, 둔장해수욕장은 소나무숲이 멋들어진다. 수령 200년 된 너볏한 소나무숲은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 찍기에 좋다. 그 숲은 방풍림이다. 겨울, 마을로 불어닥치는 북서풍을 막아준다. 밭에 논에 모래가 침투하는 것을 막아낸다.

자은도에는 ‘신비의 바닷길’도 많다. 물 쓰면 ‘저 섬까지 걸어갔다 오자’ 하는 그런 곳이 많다. 외기 바다에서는 넓은 모래밭을 걸으며 대나무섬까지, 한운 바다에서는 옥섬까지, 둔장 바다에서 할미섬까지.

   
▲ ⓒ 김창헌 기자

“딴 데는 양으로 팔아묵고 여그는 질로 팔아묵고”

모래의 아름다움은 농사에도 있다.
백산리 마늘밭에서 만난 김광남(67)씨는 “이런 마늘 봤어” 하고 캐묻는다.
모래는 줄곧 자은도의 효자 역할을 해왔다. 자은 특산품을 여럿 만들어냈다. 땅콩과 고구마, 마늘 양파 대파를 질 좋게, 값나가게 길러냈다. 김광남씨는 “딴 데는 양으로 팔아묵고 여그는 질로 팔아묵고”라고 말한다.

자은도 밭에 자라는 마늘은 다른 지역 마늘과 다르다. ‘주화마늘’이라 하여 자은 사람들이 직접 개발해낸 품종이다. 92년 한·중 수교 이후 값싼 중국산 마늘에 밀려 마늘농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 품종을 개발, 다시 시작했다.

재배 방법이 다른 지역과 다르다. 마늘쫑에 달린 씨를 종자로 사용한다. 씨를 심어 마늘이 나면 그 마늘을 다시 한번 심어 수확한다. 2년 농사인 셈이다. “맛이야 말할 것도 없고 안 썩어. 강해. 딴 마늘은 구정(설날)을 못 샌디 이 마늘은 구정 지나도 안 썩어. 병폐에 강하고.”
모래땅은 농사짓기에도 한층 수월하다. 심기 편하고 거둘 때도 척척 뽑아진다. 그만큼 뒷일이 없다. “농사 안 지은 사람은 모르제. 이런 것이 얼매나 큰 복인지. 딴 데서 이틀 걸릴 일 여그서는 하루믄 끝나.”

한 아주머니는 “비가 금방 와서 끊쳐도 금방 들어가 일할 수 있는게 좋아. 며칠씩 일 못하고 있으믄 그게 환장할 일이제”라고 말한다.
질 좋은 대파 마늘 양파지만 시방 섬 농사는 팍팍하기만 하다. “5톤을 배 실어갖고 가락동시장까지 갖고 갈라믄 90만원이 들가. 시방 비료 한나 값이 2만원이여. 답이 안 나와.”

   
▲ 할미섬 독살. ⓒ 김창헌 기자

빈지러기 부서 장어…안 잡히는 게 없던 독살

한운리 둔장마을로 간다. 때를 잘 맞췄다. 바다 시계는 썰물이다. 한운리 둔장마을 앞바다는 할미섬까지 길을 냈다.
고기가 폭폭 뛰어오를지 모르겠다. 주워담아야 할 지도 모를 일이다.
자은도에 남아있는 전통고기잡이 ‘독살’을 보러 간다. 독살은 할미섬 왼쪽에 있다. 오른쪽에 있는 돌무더기들은 한 회사가 대야양식장을 하려다 파도 때문에 실패하고 그대로 내버려둔 것. 처음 보는 사람은 그것을 독살로 오인할 수도 있겠다.

쌓은 바위틈 사이로 물이 급속히 빠져나간다. 정말 숭어인지 농어인지 ‘큰놈’이 뛴다.
독살은 모양으로 따지면 바다에 놓은 돌담이다. 또 작은 성곽이다. 그 위로 걸어가니 돌다리다. 일부 허물어진 데가 있으나 정갈하게 보존되어 있다.
얼른 나와야 했다. 독살이 있는 갯벌은 둔장마을 사람들의 전복 종묘장이다. 애초 들어가서는 안 될 곳이다.

자은도 독살은 농사지으며 부업으로 했던 고기잡이다. 황판섭 할아버지 말에 따르면 약 120년 전에 생계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공동으로 쌓아 운영했다고 한다.
자은도에는 옥도와 주리도 할미섬 등지에 4개의 독살이 남아 있는데 할미섬 독살만이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남아 있다. 과거에는 한운리 바다 전체에 거의 독살이 설치돼 있었다 한다.
둔장마을 할미섬 독살은 이 마을 강상균씨가 소유하고 있는 개인 독살이다. 할아버지 때부터 운영해왔다. 1990년까지 독살에서 고기를 얻었다.

주순심(55)씨도 시집 와서 독살로 잡은 고기를 요리해 밥상에 올렸다. “다 막혀져 있는디 물 내려가는 구녁이 있어. 거기에 그물을 길게 해갖고 걸어두믄 그물 꼬랑지에 갑오징어 새우 빈지러기 조기 부서 장어, 안 잡히는 게 없었제.” 2월에 무너진 돌을 다시 쌓았다. 3월 초부터 그물을 막아 고기잡이를 시작했다. 그때부터 5월까지 잡히는 봄고기는 어떻게 해서 먹든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 두봉산에 내려다본 마을과 밭, 논. ⓒ 김창헌 기자
   
▲ 섬 위로 해가 보인다. 바다는 온통 단색으로 단아했다. ⓒ 김창헌 기자

한 봉우리 오르면 또 다른 풍경이…

두봉산에 오른다. 산행의 시작은 구영리 뒤편 자은초등학교다.
사람들 발길 많지 않은 섬산은 수풀이 우거져 잠시 망설이게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 고비 지나면 숲에 든 즐거움이 있다. 무슨 꽃일까. 찔레꽃 같은 향긋한 꽃냄새가 줄곧 동행한다.

성제봉 정상에 오르면 정자가 하나 있다. 정자 놓을 만하다. 눈 아래 펼쳐진 풍경이 감탄스럽다. 구획 지어진 밭의 어울림과 그 안의 마을, 색색 지붕들이 예쁘다. 바닷가의 그 긴 둔장해수욕장과 소나무숲이 한 풍경으로 어우러져 있다.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두봉산은 오르면 오를수록 ‘희열’이다. ‘참 좋다’ 혼잣말하게 되는 숲길이 있고, 산등성이를 에돌아 올라가며 자은도 곳곳을 보여준다. 한 봉우리 오르면 또 다른 풍경을 내어놓는다. 삐죽한 바위봉우리를 오르는 바위길도 두봉산의 큰 매력이다.

꼭대기까지 오를 이유 있다. 확 트인, 바다 위에 섬 섬 섬, 마을과 마을, 신흥마을 앞바다는 너른 갯벌을 드러냈다. 조금 더 물이 빠지면 암태도까지 걸어갈 수 있겠다.
바람은 여기 산봉우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온 몸을 감싸는 바람. 이제 이곳에서 하룻밤 내 자리를 찾는다. 섬마을 가로등이 하나 둘 불빛을 밝히고 있다.

가는 길 : 압해도 송공항에서 배가 출발한다. 목포와 압해도는 연륙교로 연결돼 있다. 암태도 가는 ‘대흥페리호’로 암태도에 내려 자은도로 가면 된다. 암태도와 자은도는 연도교로 연결돼 있다. 배 시간은 오전 5:50∼오후 9:00까지 45분 간격으로 있다. 요금은 어른 2600원, 중·고생 2400원, 어린이 1300원. 차량은 1만5000원. 여객선 문의: 061-244-9915. 9916 (남해고속). 기타 문의: 061-271-8031 (자은면사무소)

‘내가 소작인 대표요’ 저마다 나선 농민들
자은도 소작쟁의 운동

자은도의 넓은 들녘은 역사의 땅, 저항의 땅이다.
암태도의 소작쟁의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자은도에서도 과도한 소작료 징수에 반발, 쟁의가 일어났다. 암태도에 이어 1925∼1926년, 자은도 농민들은 깨어 있는 의식으로 역사의 큰 흐름을 이었다. 소작인 회의는 소작료를 4할로 낮출 것을 요구하며 지주와 맞섰다.

자은도 소작쟁의의 주요 상대도 암태도와 마찬가지로 지주 ‘문재철’이었다. 문재철을 비롯한 일부 지주들은 농민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소작료 불납에 따른 재산 차압을 단행한다.

1926년 1월3일 목포에서 180명의 경관이 자은도에 투입되고, 경관들은 모든 뱃길을 막아 섬을 고립시킨다. 당시의 한 신문에 따르면 경관대는 소작회 대표자 검거에 나섰는데 자은 농민들은 하나같이 ‘내가 소작회 대표요’라고 달려들었다 한다. 몇 번의 충돌, ‘훈련된 무력’은 40여 명의 농민들을 체포하고 지주 문재철의 바람대로 소작인의 가산을 차압한다. 집달리와 지주단체 농담회의 고용인은 경관 30명의 보호를 받으며 집집마다 다니며 먹을 양식도 남겨두지 않고 차압한다.

자은도의 소작쟁의는 도초도 소작회 등의 연대를 통해 자은도를 벗어나 확산돼 간다. 일제는 암태도의 경험으로 이를 피하려 했고 지주들은 집결된 민중의 힘이 두려웠다. 쟁의로 인한 충돌이 일어난 지 한 달만인 1월30일 소작인회의는 지주 대표로부터 협정서를 받아낸다.
작성자김창헌 기자  webmaster@jeonlad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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