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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지민 테마에세이]내 삶보다 길었던 그날의 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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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의 의미는 무엇일까. 대(代)를 이어 생명의 흔적이 계승된다는 것. 하나의 개체가 자신의 2세를 잉태해서 낳고 키우며 성장시킨다는 건, 말 그대로 생명 자체의 본능인 걸까?
  잠들어 있는 딸아이의 가녀린 숨소리를 들으며, 나는 버릇처럼 아이의 얼굴을 가까이 바라보곤 한다. 절반만큼 나를 닮았고 절반만큼 엄마를 닮은 새로운 이 생명은 내게 무엇을 일깨워 주려 하루하루를 열어 가는 것일까. 아이는 끊임없는 옹알거림으로 소중한 메시지를 내게 전해 주곤 한다. 아빠인 나의 진정한 삶은 이제부터 처음처럼 시작된 거라고.

  미혼 시절의 일화가 떠오른다. 이미 결혼했던 친구들은 ‘결혼을 해야’ 어른이 된다며 강조했고, 부모가 된 친구들은 ‘아이를 낳아야’ 완전한 어른이 된다며 마주칠 때마다 강변하곤 했었다.
  굳이 당시의 내 인생관을 언급한다면, 친구들의 주장은 ‘소귀에 경 읽기’였던 게 사실이다. 나는 결혼 계획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서른 중반의 나이가 됐다면, 기혼과 미혼은 서로 상반된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는 게 내 오랜 관점이었다. 그들의 장점이 내겐 단점이겠지만, 반대로 나만의 장점이 그들에겐 단점이 되리라는 게 나의 입장 설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나는 내 오래된 주장을 조금씩 수정하게 됐다. 결혼하고 아이를 품에 안았다는 이유도 있지만, 경험하지 못한 많은 일들을 실제 체험했다는 게 너무 중요한 의미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딸아이의 첫 생일이 며칠 앞으로 다가온 지금, 어제 같으면서도 아득한 과거인 양 느껴지는 아이 탄생의 순간이 생생히 떠오르는 건, 내 인생의 근본적인 변환점이 이미 그 순간에 이루어졌다는 뜻인지도 모를 일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구호가 붉은 티셔츠의 물결 속에 한반도를 뒤덮던 시절, 만삭이 된 아내는 출산에 대비하라는 담당 의사의 말을 따르면서도, 월드컵의 열기를 능동적으로 느끼고 싶어 했다. 섣불리 흥분하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흥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던 열광의 6월이 아니었던가. 1승 정도나 제대로 거둘까 하며 의구심을 앞세우던 내 눈앞에 한국 대표팀은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감정 표현에 솔직한 아내는 우리 선수들의 슛이 빗나갈 때마다 덩달아 가슴 졸이고 탄식을 하며, 집안 전체를 경기장의 현장감으로 뒤바꾸곤 했다. 아마도 2002년 초여름에 만삭인 아내를 곁에 두고 있던 이 땅의 모든 남편들은 똑같은 심정으로 아내를 관찰하지 않았을까? 예비 아빠의 가슴 졸임이 그렇게 월드컵 기간 내내 지속됐다는 걸 동병상련처럼 웃으며 기억할 것이다.
  예정일을 닷새 앞뒀던 그 해 6월 말, 한국 대표팀의 4강 진출은 선수들의 동작과 행동 하나하나를 모두 다 신임하고 인정하게끔 만들었다. 또한 얼마나 지치고 부담감에 잠 못 이루었을까를 더불어 동감하며, 최선을 다한 그들에게 결론적인 찬사를 미리부터 쏟아 붓게 만들기도 했었다. 상대는 독일 대표팀이었고, 세계 최강이라던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꺾은 기세는 독일마저도 해볼 만한 상대로 바라보게 했다.
  하늘이 정해 준 시간이라는 건 역시 정확한 것일까? 일찌감치 방송 화면 앞에다가 맥주 캔과 마른안주를 준비하던 나에게, 아내는 처음 접하는 얼굴빛으로 성급하게 말을 이었다. 어서 병원에 가야겠다는 것이었다. 배를 움켜잡고 찡그린 표정에서 정해진 날이 왔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 아내는 집을 나서는 동작을 잠시 멈추며 집안을 천천히 둘러보기만 했다.
  나는 지금도 그 시선을 잊지 못한다. 정말 ‘모성(母性)’이라는 단어밖에 표현 방법이 떠오르지 않던 그 시선……. 건강한 아기를 낳고 이 공간에 다시 돌아온다는 건 너무도 당연하지만, 수십억분의 일일지라도 돌아오지 못하게 될지 모른다는 그런 모든 의미를 함축시켰던 그 시선이 아직까지도 또렷이 연상되는 것이다.
  병원 입구에 다다랐을 때 아내는 양수가 터진 것 같다고 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묻기도 전에, 아내의 바지는 젖어드는 흔적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었다. 출처가 어딘지도 모를 월드컵 중계방송이 복도 어딘가에서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입원 수속을 마치고 대기실 침대에 누운 아내의 시선은 내 두 눈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젠 정말 생명이 태어날 시간이 된 것이라는, 억만분의 일이라도 서로를 다신 볼 수 없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그러면서도 긴장을 풀기 위한 가벼운 대화로 지난 추억을 아련히 얘기해야 했던 그 순간은 미혼 시절에는 절대 체험하지 못할 인생의 변환점이었다. 이젠 모든 걸 운명에 맡겨야 할 그 시점에 임박했다는 것…….
  이미 오래 전부터 기(氣)체조와 분만호흡법을 익히던 아내의 심호흡이 시작됐고, 한국의 결승 진출이 좌절됐다는 탄식이 창 밖의 거리에서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가운데, 진통의 간격은 갈수록 짧아지고 있었다. 서로의 손을 맞잡고 반복하는 호흡법이 몇 시간 동안 이어진 가운데, 간호사의 분만 준비가 얼마간 진행된 뒤 아내는 분만실로 들어갔다.
  분만실 앞에 서 있던 그 몇 분처럼 길고 지루하고 초조한 시간의 느낌을 또다시 경험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출산이 임박했는지, 아빠도 들어오라는 간호사의 말에 가운을 입고 나서 아내 곁으로 향했다. 의사의 지시와 유도에 따라 힘을 주는 동작이 반복되면서, 나는 아내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때 느꼈다. 생명을 낳는 마지막 과정이 이렇다는 것을!
  이후에도 아내에게 말하거나 묻지 않았지만, 내 눈에 비친 아내의 얼굴과 눈빛은 생명을 내던질 수 있다는 비장함 그 자체였다. 자신의 생명을 내놓더라도 새로운 생명을 태어나게 만들겠다는 집념 하나의 눈빛, 그것은 더 이상 지속되는 게 불가능할 만큼 3분 정도의 순간 내내 불타오르고 있었다.
  처음 접하는 분만실 내부의 분위기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나의 모든 건 아내의 얼굴에 몰입되어 있었다. 아주 굳게 다문 입술과 파르르 떨리는 머리 전체가 나의 시간을 완전히 정지시키고 있었다. 인간으로서 어느 목적을 위해 그보다 더 진지하게 몰두할 일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아내는 나에게 내 인생보다 기나긴 3분의 체험을 스스로의 몰입으로 선물해 준 것이었다. 
  최후 같은 진통이 잠시 반복된 후, 의사는 무언가의 분홍빛 덩어리를 아내의 몸으로부터 꺼내들었다. 바라보던 내 눈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의사 손에 잡힌 부분에 발가락 같은 게 있다는 것, 잠시 뒤에 ‘응애 응애’ 소리가 들렸다는 것, 거꾸로 들려진 분홍빛 덩어리의 아랫부분이 아기의 얼굴 같았다는 것, 그게 그 짧은 순간의 느낌 전부였다.
  아빠의 손으로 탯줄을 자르고 아기를 직접 안았을 때서야, 정말로 생명체가 태어났다는 실감이 감당하지 못할 무게로 밀려들었다. 자기를 부르는 엄마 아빠의 음성을 좇는 것인지, 아기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계속 두리번거렸다. 매일 밤마다 엄마 배에 귀를 대고 얘기해 주던 아빠의 음성이 이미 열 달 동안 아기한테 익숙해졌다는 게 증명되는 느낌이었다.
  아빠와 엄마 품에, 할머니 품에 차례로 안긴 아기는 계속 주위를 둘러보는 커다란 눈망울로 소리 없는 음성을 나에게 전해 주고 있었다. 새로운 생명으로 자신이 태어났다고, 그리고 이젠 엄마와 아빠의 진짜 삶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결혼을 해야 어른이 되는 건지, 아기를 낳아야 진짜 어른이 되는 건지에 대한 정답은 어디에도 없다. 내가 아직도 미혼이었다면, 또 다른 삶에 몰입하거나 개인적인 작업으로 그만큼의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까? 아직 아기가 없었다면, 없는 그 상태로 부부만의 삶이 설계되고 실천되지 않았을까?
  부모가 됐다고 해서 진정한 어른이 되고 인생이 완성되는 건 아닐 것이다. 다만 분명히 다른 점은 한 가지 있다. 바로 책임이라는 것이다. 그 생명을 어떤 가치로 키워갈 것인가에 대한 책임, 어떤 이유로도 피하거나 눈 감을 수 없는 의무가 부여된 것이다.
  아빠를 부르는 옹알거림이 집안 어딘가에서 계속 들려오고 있다. 정말로 내 인생보다, 내 목숨보다 더욱 더 소중한 존재로 아이는 내 삶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하는 부모가 돼야 할 것인가.
  일전에 대화를 나눴던 한 친구의 한마디가 마음속을 떠나지 않고 있다. ‘자식은 부모가 말하는 대로가 아닌, 부모가 행동하는 대로 따라하는 법이다.’ 웃음소리와 함께 아빠를 부르는 아이를 보며, 아이에게 기대하는 삶을 내가 먼저 살고 실천해야겠다는 다짐을 반복한다. 무언가를 시키기 전에 모범을 보인다는 것 -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글쎄…… 미혼과 기혼 그리고 부모의 차이는 그런 게 아닐까?  

채지민 (시인·소설가)

 

 

작성자채지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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