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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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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이야기]

 

그녀는 예뻤다.

 

 

  내가 가장 혐오하며 싫어하고 한심스럽고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가? 아마 모를거다. 내가 가장 멍청하고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길거리에서 마음에 드는 여자를 쫓아가 뒤통수를 긁으면서 "저 시간 있으시면 저랑 커피 한 잔 하시죠"라며 접근하는 사람이다. 이 세상 어느 여자가 그렇게 말 거는데 "그러시죠. 저 시간 많아요" 그러면서 따라올 것인가? 그건 정말 어리석은 접근 방법이 아닐 수 없다. 차라리 그냥 그 여자를 곱게 보내느니만 못하다. 그러면 최소한 여자는 당신을 멍청한 거리의 놈팡이로는 보지 않을테니 말이다.
 

  내가 존경하는 선배는 바로 그런 점에서 나의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이다. 그는 대학 다니던 시절 정말 마음에 드는 여자를 도서관에서 만났다고 한다. 그런데 그 여자에게 접근하기 위해 버스 정류장까지 따라갔는데 밤은 깊었고 여자는 곧 이제라도 차 타고 떠날 것 같아 다음과 같이 말을 걸었다.
"저, 어느 방향으로 가시는지요?"
그러자 그 여자, 팩 쏘아붙였다고 한다.
"그건 알아 뭐하시려고요?"
"이렇게 밤이 깊어서 무서우실까봐 제가 바래다 드리려고요."
"흥, 전 하나도 안 무서우니 그럴 필요 없어요."
대부분의 사내들은 이 대목에서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선배가 나의 존경을 받은 것은 바로 다음의 한 마디 때문이었다.
"그러시다면 제가 무서워서 그러니 저를 좀 바래다주시지요."
결국 선배의 기지와 재치에 반한 여자는 지금 그 닮은 애 둘을 키우는 현모양처가 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이런 한가한 이야기할 때가 아니다. 이 백화점 3층에서 나는 지금 그야말로 운명의 여인을 뒤쫓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 예쁜 그녀의 용모는 나 말고도 다른 사내들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한 것이다. 지금 내가 당장 접근하지 않는다면 꼭 누군가가 나타나 그녀의 사랑을 가로채고 말 것 같은 초조함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동안 수많은 여자들을 길가에서 꼬셔 데이트를 즐긴 나였지만 이 예쁜 그녀 앞에서는 과거에 써먹은 어떠한 수법도 통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만치 그녀의 아름다움은 빛나는 것이었다. 어느 마네킹이 그녀보다 예쁠 것이며, 어느 화장품 모델이 그녀보다 아름답단 말인가.
"어머, 언니 이 옷 좀 입어봐요. 너무 잘 어울릴 거 같애."
그녀의 출중한 미모는 나만 본 것이 아니었는지 숙녀복 코너의 점원들마다 그녀를 불러 세우기 바빴다. 그 중 한 코너에 들어간 그녀는 화사한 겨울 정장들을 돌아보며 우아한 태도로 옷의 칼라와 디자인을 살피고 있었다.
나는 그 가게의 벽면에 걸린 전신거울에 비친 그녀가 잘 보일만한 각도의 여성 소품 파는 코너에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숨가쁘게 살폈다. 키는 167센티미터 정도, 고르게 발달한 신체는 어느 한 군데 불균형한 곳이 없었다. 단아하게 정리한 머릿결은 비단의 그것이 못 따라갈 지경이다. 게다가 그녀의 동작 하나하나는 마치 공주의 그것처럼 우아하고 부드러웠다. 나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지나가는 사내들도 그런 그녀의 자태를 마구 훔쳐보고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녀가 이 백화점을 나가기 전까지 나는 그녀를 사로잡아야만 했다. 그것만이 오랜 시간 노총각으로 살고 있는 내 화려한 싱글을 포기하는 길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내가 화려한 싱글로 살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아무도 모르리라. 무지막지한 어머니는 나를 볼 때마다 빗자루나 먼지떨이, 하다 못 해 숟가락까지 동원해 나를 괴롭혔다. 그러면서 그때마다 하는 말이 있었다.
"으이그 이 등신아! 허우대만 멀쩡해서 장가도 못 가고."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 세상 어느 누가 원해서 싱글이겠는가. 하다보니 그렇게 되는 것이고 살다보니 짝을 못 만나 외로움에 젖는 것을. 아무튼 그녀 덕에 이 싱글 생활을 화려하게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아마 그럴 것이다.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결혼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고. 아 그렇다. 이왕 늦은 결혼 그녀의 아름다움만이 유일한 보상이 되리라는 것은 나의 신앙과도 같은 확신이었다.
순식간에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서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그녀가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맙소사. 나는 황급히 숙녀복 매장을 돌아봤지만 잠깐 사이에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오 하느님. 나는 진땀을 흘리며 지하층에서부터 주차장까지 백화점 곳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그러나 그녀는 어느 곳에도 없었다. 이렇게 내 꿈이 무너질 수는 없었다. 오 하느님. 이건 아닙니다. 그녀를 이렇게 보낼 수는 없습니다. 나는 최악의 경우 백화점 방송실에서 그를 찾는 방송까지 할 각오였다. 그녀의 이름도 성도 모르지만 무조건 방송을 하는 거다. 아까 3층 숙녀복 매장에 있던 빨간 원피스의 여자를 찾습니다. 이러면 될 것 아니냐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백화점을 샅샅이 뒤지던 나는 설마 하고 올라간 4층에서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동복이나 생활용품들이 전시된 그곳에 그녀가 가 있는 것이 좀 의아했지만 나는 그녀의 꽁무니에 붙어 설 수 있었다.
그녀는 이미 여러 개의 쇼핑백을 손에 들고 있었다. 제법 물건을 많이 산 모양이었다. 이제 숨을 가다듬고 그녀에게 접근할 때가 왔음을 나는 다년간의 경험과 본능으로 알 수 있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목소리를 깔아 말을 걸었다.
"저 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
"네? 무슨 일이시죠?"
옥구슬 같은 목소리. 그녀는 내 쪽으로 돌아섰다. 그녀의 입가에 떠오른 우아하고 아름다운 미소는 사람 환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돌아서는 그녀의 눈동자를 피해 아래를 보며 나는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저…."
아, 그러나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그녀가 산 물건의 대부분은 신생아용품이었다. 작은 욕조에 아기옷, 이런 것들이 잔뜩 담긴 쇼핑백을 그녀는 흐뭇한 얼굴로 들고 있었다.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입으로 막으며 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죄 죄송합니다. 사람을 잘못 봤나 봅니다."
나는 황급히 돌아섰다. 빌어먹을, 미시족이라는 여자들은 바로 저런 여자였나 보다. 어쩜 저렇게 감쪽같이 처녀 행세를 한단 말인가. 이 세상 모든 미시족이라는 얼빠진 여자들에게 저주를 보내며 한 걸음 떼어놓았을 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 여기야."
본능적으로 나는 고개를 돌렸다. 저만치에서 배가 남산만큼 부른 여자가 힘겹게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내가 많이 늦었지?"
"아냐, 늦긴. 구경하고 있었어."
"그래 물건은 다 샀니?"
"응, 언니가 적어 준 대로 사긴 샀는데 태어날 아기가 남자일지 여자일지 몰라서 색깔을 못 골랐어."
"얘는. 나는 뭐 그걸 아니? 하여간 수고했다 얘. 우리 대신 네가 수고했다고 형부가 맛있는 거 사준댔으니까 가자."
나는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무거운 몸매의 언니를 부축이고 걸어가는 그녀는 너무 예뻤다.

 

글/고정욱(소설가, 성균관대학강사)

작성자고정욱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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