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다. 장애를 가진 빌런(Villain)들
장애코드로 문화읽기 / 드라마 <귀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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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귀궁> 포스터 ⓒSBS
‘빌런’의 어원, ‘빌라누스’
‘빌런’의 어원은 라틴어 ‘빌라누스(Vilanus)'에서 왔다. 고대 로마의 농장 ‘빌라(Villa)’에서 일하는 농민들을 가리켜 ‘빌라누스’라 했고, 귀족과 농장주의 핍박과 착취에 시달리던 이들이 결국 귀족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폭력을 휘두르게 된다. 귀족 중심의 불평등한 사회에서 천대와 짓밟힘, 차별을 견디다 못해 결국 악인으로 변모하게 된 ‘빌라누스’를 가리켜 ‘빌런’이라 불렀고, 창작물 속 악인들을 지칭하게 되었다.
오늘날 창작물 속 악인을 ‘Bad guy’가 아닌 ‘Villain’으로 지칭하게 된 배경에 귀족중심의 불평등한 사회에 대한 봉기가 있었듯 단순한 악인이 아니라, 이유가 있는 악인, 사회적 악인의 무게를 부여하겠다는 창작자들의 의지로도 보인다. 요즘 빌런이 히어로보다 사랑받고 그들의 악행을 불평등하고 불합리한 사회에 대한 맞섬, 저항으로까지 여기며 오히려 동정과 연민, 심지어 동일시와 연대의식을 갖게 하는 부작용도 있기는 하지만 이 자체가 메시지이기도 하다.
<귀궁> 속 빌런들 : 불평등한 사회의 상흔으로 ‘장애’와 ‘악’을 이야기하다
영화 <다크 나이트>의 ‘조커’, <어벤저스>의 ‘타노스’, <나이트메어>의 ‘프레디 크루커’, <13일의 금요일>의 ‘제이슨’, <쏘우> 시리즈의 ‘직쏘’ 등 장애를 가진 메인 빌런들이 등장하는 작품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들은 저마다 상처들이 있는데, 어릴 때 알코올중독자 양부로부터 매일매일 학대를 당하고, 다르다는 이유로 따돌림과 놀림, 폭행을 당해 얻은 상흔으로 정신장애, 안면기형, 화상 장애 등을 입게 되고 빌런이 된다. 그러면서 사회문제의 대항마로서, 또 ‘모든 악은, 모든 장애는 세상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서사의 메신저로서 존재감을 각인시킨다.
최근에는 우리나라 드라마 속에서도 장애를 가진 빌런들이 등장하고 있다. 지난 6월7일 종영한 <귀궁>은 오컬트 소재의 판타지 로맨스 사극으로, 원한을 품은 악귀들이 등장하는데, 화상 장애를 가진 팔척귀를 비롯해 한쪽 다리로 걷는 외다리귀 등 장애를 가진 악귀들이 등장하고 팔척귀를 모시는 시각장애를 가진 판수(무당) 아구지가 빌런으로 등장한다. 이들은 단지 공포를 유발하는 존재가 아니라, 억압과 착취, 차별당한 자들이 불평등의 사회구조에 복수하는 주체다.
가장 강력한 악귀 팔척귀는 100년 전 전쟁 때, 왕이 백성을 버리고 도망치는 과정에서 한 마을과 그곳의 무고한 백성들이 오랑캐에게 도륙 당했던 그날 밤에 탄생한 악귀다. 자신의 고향을 왕의 피란처로 추천했던 어영청 호위관부 천금휘는 그날 밤, 가족과 친구, 이웃 모두를 잃었고 자신도 죽은 마을 사람들의 원한을 모두 품은 채 죽었다. 죽음 직전에 입은 화상으로 화귀가 된다. 이후 100년을 이어져 온 왕가의 괴이한 병증과 죽음들은 천금휘와 용담골 사람들이 품은 원한과 저주이며 자신들의 죄를 진심으로 참회하지 않는 왕족을 향한 응징인 것이다.
외다리귀 역시 마찬가지다. 왕 이정의 스승 최원우 대감은 가문의 명예 때문에 숨겨왔던 용담골의 참상을 기록한 외조부의 ‘참회록’을 세상에 알리겠다며 협박하는 책쾌와 몸싸움을 하다가 의도치는 않았지만, 한쪽 다리를 찢고 살해한다. 이 원혼은 그의 여식의 몸에 기생하며 그녀의 목소리를 빌려 숨기고 참회하지 않는 권력자를 고발하려 악행을 일삼는다.
한편 악귀 팔척귀를 모시는 맹인 판수 아구지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신분과 장애로 늘 가난했고 천대받고 폭행당하며 살아온 천민이다. 아구지는 입버릇처럼 스스로를 ‘비천한 놈’, ‘천한 것’이라며 불평등의 관계가 제도적으로 합법화 된 사회와 양반을 비튼다. 결국 팔척귀를 등에 업고 세상을 자신의 손에 쥐려는 아구지가 품은 욕망은 당시 천민 아구지가 ‘감히’라는 시선을 깨려 한 빌런의 봉기로도 볼 수 있다.
유교중심의 질서 속에서 무속은 억압받았지만, 그 어느 종교보다도 민중들의 삶을 위로했고, 무속인은 사랑받았다. 아구지는 맹인판수로서 녹봉을 받는 전문직이었다. 이런 사회 활동은 아구지가 억눌린 자들의 원한과 저항을 품은 팔척귀의 힘을 필려 조선의 기득권 흔들려 한 의지와 욕망의 원천이었을 것이다.
△ 드라마 <귀궁> 스틸컷 ⓒSBS
장애, 악, 그리고 ‘감히’ 저항하는 자들
빌런들의 원한과 악행은 왕 이정이 추진하는 공노비 폐지의 명분과 맞물리며, 신분제와 노비제의 폐해를 드러낸다. <귀궁>의 주인공은 왕 이정도, 이무기 강철이도, 그를 주신으로 모시는 무당 여리도 아니다.
용담골 참상의 그날 밤, 이무기 강철이의 승천이 들킨 순간 태어난 악귀들. 팔척귀, 외다라귀, 맹인 판수 아구지, 영인 대군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우물에 빠져 죽은 수살귀 궁녀 옥임, 그리고 엄마 얼굴 한 번 못 본 채 전염병으로 죽어 수백 년을 궁에 머물며 신발을 훔치는 야광귀가 이 작품의 바로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그저 악한 존재만은 아니다. 신분제 사회에서 버려지고 망가진 채 악으로 밀려난 자들이다. 이들은 스스로 악의 씨앗이 뿌려지고 자라나는 경로를 증명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빌런들이 좋다
나는 이들이 원한을 가진 악귀이며, 빌런이어서 좋았다. 불평등한 세상에서, 핍박과 차별, 냉대와 폭력에 순종하지 않고 죽어서까지 발끈하고 폭주하며, 응징하는 빌런들이라서 좋고 통쾌했다. 잘못됐다고, 억울하다고 당당하게 말하며 사죄를 받아내고 모르면 알 때까지 말하는 장애를 가진 빌런들의 모습은 이동권과 탈시설, 교육, 돌봄 등 시민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들을 요구하고 말하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투쟁의 모습과도 너무나 닮아있다.
무엇보다 이들의 오만방자하고 꼿꼿한 대항마 같은 태도가 좋다. 이들이 저지른 악행으로, 유교에 뿌리를 두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한 신분제도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가 드러나고, 또 노비제와 가부장제 등 유교중심의 질서는 누구를 배제했고, 어떻게 억울한 죽음과 악심을 품게 하는지, 어떻게 장애를 입히고, 악을 만들었는지가 드러난다. 이 문맥의 주체가 장애를 가진 빌런들이라는 것이, 나는 이 드라마가 이 시대의 저항과 외침을 듣고 있구나 싶어 반가웠다.
잔상은 남는다. 그러므로 나는 계속 쓸 것이다
화상으로 강력한 불의 힘을 얻게 된 팔척귀, 한쪽 다리로 통통 뛰어다니는 외다리귀, 그리고 시각장애를 가진 아구지를 통해 조선후기 맹인 판수가 전문직이었음을 알게 된 시청자들의 눈과 귀에 무엇이 맺혔을까? 장애를 무용과 결여, 한계의 존재로 보는 우리 사회의 통념을 조금이나마 깨는 잔상들이 맺히지 않았을까? 그래서 드라마 <귀궁>이 고맙다. 나는 이 질문들과 잔상이 지워지지 않도록 지금까지 그래왔듯, 계속 글을 쓰며 말을 걸 것이다.
작성자글. 백수정 대중문화비평 활동가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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