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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행의 초상, '조제'

장애코드로 문화읽기 /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04)>, <조제(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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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포스터
 
2004년 일본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2020년 한국에서 <조제>로 리메이크되었다. 원작 속 ‘조제’라는 캐릭터를 좋아했던 터라 리메이크 소식을 들었을 때 그리 반갑지 않았다. 그 당차고 사랑스러운 ‘조제’를 과연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 여성과 장애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인식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고, 특히 멜로 장르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랑은 늘 사회 통념에 얽매인 뻔한 전개와 결말로 이어져 왔다. 사실 원작 역시 두 사람의 사랑을 사회적 통념과 인식의 한계 안에서 끝맺음 되었다.
 
‘~을 초월한’, ‘~에도 불구하고’의 순수한 사랑?
 
영화 <조제>의 김종관 감독은 언론 사사회에서 ‘조제’와 ‘영석’의 관계를 “(장애를 뛰어넘은) 순수한 사랑으로 감상해달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표현이 목에 걸린 생선가시처럼 이물감을 남겼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랑을 다룬 작품에서 늘 반복되는 홍보 문구가 바로 이 ‘장애를 초월한 사랑’, ‘장애에도 불구하고의 순수한 사랑’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사랑의 순수성은 어떤 장벽을 극복해야만 얻어지는 인위적인 감정이 아니라 사랑 자체가 지닌 본질이자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감정이다. 그렇다면 이런 표현이 전제하는 것은 무엇인가? 장애가 원초적 감정을 위협할 만큼 높은 장벽이며, 사회가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이질적으로 본다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또한 ‘~을 초월한’이라는 표현에 내재된 차별과 우월 의식이다. 이 말속에는 지배적 위치에서 내려다보는 불평등한 시선과 관계가 전제되어 있다.
 
감독의 답변에서 드러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랑에 대한 그의 내면화된 불평등 인식과 태도는 결국 영화 속에도 그대로 투영되었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길가에 한 여성이 쓰러져 있다. 그녀의 것으로 보이는 휠체어는 옆으로 넘어져 바퀴만 허공에서 헛돌고 있다. 곧 한 남성이 달려와 “괜찮으세요?”라고 묻고는 여성을 안아 올려 휠체어에 앉힌다. 이 장면은 위에서 아래를 응시하면서 인물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관객의 시선에 들어오도록 의도적으로 하이앵글과 롱테이크로 촬영되었다. 관객은 자연스레 ‘조제’라는 인물보다는 그의 장애를 먼저 인식하게 된다. ‘장애를 초월한’의 사랑 이야기를 하기 위해 영화 <조제>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 영화 <조제> 포스터
 
영화 내내 조제의 전동휠체어는 고장이 난 채로 집 마당 구석에 방치되어 있다. 조제가 그것을 타는 장면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 “고쳐 달라”는 말뿐, 고치려는 시도도 타려는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영석’에게 업혀 다니거나, 수동 휠체어에 앉아 영석이 미는 모습뿐이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조제’는 요리하는 것을 좋아해, 요리할 때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의지와 주체성을 보였다. 자신을 위해, 또 남을 위해 정성을 다하는 모습은 아름다워 보였다. 하지만 영화 <조제>에서는 그마저도 영석과 함께 살면서 사라졌다. 하다 못해 그토록 읽고 싶어 했던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도 결국은 영석이 사 오게 되고, 엔딩 직전 홀로 여행을 떠나 상상하는 장면에서조차도 조제는 여전히 영석의 등에 업혀 있었다.
 
이렇게 주도적이지 못한 조제, 의지 없는 조제를 드러내는 연출에 몰두하며, 이 사랑의 관계에서의 장벽은 장애라는 것, 그래서 이들의 관계와 사랑, 이별이 영석의 의지와 결정에 맡겨지는 것에 관객이 동의하도록 이끈다. 이뿐만이 아니다. 엄마가 그리워, ‘엄마’ 하며 우는 아이들을 패는 아이에게 엄마가 되어주는, 조제 스스로 만든 유일한 관계인 양아들에 관한 서사마저도 허언증이나 망상으로 몰며 힘을 잃게 한다.
 
이 영화가 조제의 선택과 의지를 장애보다 앞에 두었더라면, 이런 무기력과 무능함의 조제를 재연해냈을까? ‘조제와 영석’의 관계와 사랑, 그리고 이별의 과정은 지금보다 훨씬 현실에 발을 붙인 연인의 이야기, 이별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내가 여기저기 다 소문 낼 거야.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을 강제로 범했다고.”
 
‘영석’과 사랑을 나눈 직후, ‘조제’가 내뱉은 말이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조선시대도 아니고, 아니 조선시대에도 쉽게 입에 담지 못했을 말을 21세기 여성의 입을 통해 듣게 될 줄이야. 믿기지 않아 장면을 다시 돌려봤지만, 화면 속에서는 똑같은 대사가 반복될 뿐이었다. 이후 영화에 집중하지 못했다.
 
이 대사가 ‘조제’의 입에서 나온 순간,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스스로 모욕했고, 자신이 내린 선택과 결정을 부정했으며, 결국은 그것을 조롱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더구나 이것은 강제로 이뤄진 관계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나눈 가장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행위의 끝, 행복한 순간이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자기 사랑을 부정하며 장애 혐오가 농축된 저 말을 스스로 내뱉을 수 있을까? 이는 장애를 가진 여성이나 장애인들만이 느끼는 모멸감의 문제가 아니라, 반(反)페미니즘적·반(反)인권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감독의 의도나 ‘조제’ 심리를 아무리 곱씹어도, 이 대사를 너무 붙잡고 싶은 심정의 표현이거나 당참이라 봐줄 수는 없다. 그것은 당참이 아니라 비굴함의 극치였고, 보는 이로 하여금 모욕감과 치욕감에 떨게 할 만큼 스스로가 장애, 여성, 그리고 사랑을 모욕하는 장면이었다.
 
바로 이 장면. 원작에서는 어떻게 그려졌을까? 성스러운 의식을 치르듯, ‘조제’는 스스로 깨끗한 요를 정갈하게 깔고 옷을 벗는다. 이는 그녀가 이 사랑에 어떤 마음인지를 전하며, 주체적이고 주도적으로 사랑을 선택하고 사랑의 행위에 나서는 여성으로 읽힌다. 이어 ‘츠네오’는 “눈물이 날 것 같다”라는 대사로 고마움과 사랑을 고백한다. 사랑을 나눈 뒤에는 ‘조제’가 “난 네가 좋아. 모든 것이 좋아”라며 ‘츠네오’의 품에 안긴다. 많은 이들이 공감했고 감동했다.
 
이 아름다운 장면을, 이 사랑에서 조제의 위치를 명확히 보여준 이 장면을 영화 <조제>의 감독은 무엇을 전하고자 이렇게까지 훼손한 것일까?
 
21세기에 소환된 봉건적 여성상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조제’는 1985년 발표된 소설이 원작이다. 영화 속에는 원작 소설 당시 일본 사회의 여성·장애 인식이 배어 있지만, 영화가 제작된 2000년대 초 일본의 변화된 여성상 또한 묻어난다. 그래서인지 원작 영화 속 ‘조제’는 밝고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넘치며, 돌직구를 던지는 당당함과 통통 튀는 매력을 지녔다. 무엇보다 사랑과 이별에서 자신의 의지와 선택, 결정을 보여주며 사랑에서만큼은 주체적인 장애 여성이었다.
 
그러나 16년이 흐른 2020년 한국에서 리메이크된 <조제> 속 ‘조제’는 1985년 원작 소설의 서사와 당시 일본 문학에서 요구했던 여성 캐릭터가 그대로 담긴 퇴행한 조제로 탄생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감독은 사랑과 이별의 순간마다 ‘조제’의 선택과 주체성을 보여주기 위해 세심하게 공을 들였다. 대사, 리액션, 소품 하나하나에 그녀의 목소리를 담았다. 반면 리메이크 <조제>는 그녀의 장애를 중심에 두고 장애로 인한 제약과 한계를 담으려 집중했다.
 
△ 영화 <조제> 스틸컷
 
이 차이가 영화 전반을 어둡고 회색빛으로 물들였고, ‘조제’는 스스로 삶을 선택하기보다 ‘영석’에게 키를 맡겨버린, 구원의 손길만을 기다리는 여성에 지나지 않았다. 백마 탄 왕자의 키스를 기다리는 백성공주나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말이다. 영화 <조제> 속 ‘조제’라는 여성은 마치 봉건시대의 여성이 타임슬립해 21세기로 온 듯했다. 더구나 ‘장애’를 이유로 여성의 주체성을 희석하고 모독하는 장면들에서는 가부장적이고 남성 우월적 시선이 드리운 순애보적 사랑의 방정식을 21세기에 그대로 이식한 듯한 이런 캐릭터에 여성들, 그중에서도 장애 여성들이 과연 ‘조제’에게 마음을 내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불쾌했다.
 
그래서였을까? 헤어진 뒤 전동휠체어를 타고 홀로 장을 보러 가는 2004년 ‘조제’의 마지막 뒷모습과, 직접 차를 몰고 할머니 유골함을 모시러 납골당에 가는 2020년의 ‘조제’의 마지막 모습은 전혀 겹쳐지지 않았고, 츠네오와 영석의 통곡 또한 같은 깊이와 같은 결로 다가오지 않았다.
 
이런 캐릭터가 여전히 가능했던 것은, 어쩌면 그녀가 ‘장애 여성’이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우리 사회가 장애를 바라보는 인식, 특히 장애 여성을 대하는 시선을 떠올려 보면 충분히 가능한 추측이다. 과거 멜로물이 여성에게 강요해 온 낡은 서사, 즉 자신의 의지와 선택을 포기하고 남성 중심의 삶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모습이 장애 여성에 대한 사회적 통념으로 자연스럽게 치환된다. 비장애인과의 관계에서는 그것이 사랑이든 무엇이든, 결국 자신의 의지와 선택이 지워진 삶을 ‘장애를 가진 죄’로 숙명인 양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로서의 시선이 조제에 덧입혀졌다.
 
이 영화가 비춘 ‘여성이면서, 장애를 가진 조제’의 낯설고 불편하고 불쾌한 모습 앞에서 나는 또다시 당황하고,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빠져나올 수 없는 쳇바퀴를 돌리고 있는 다람쥐처럼, 익숙하지만 결코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것의 반복이랄까? 마음이 복잡해졌다. 
작성자글. 백수정 대중문화비평 활동가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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