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길, 나의 정치: 한 장애 청년의 사회진출 고민
장애청년의 목소리
본문
▲ 사진출처. 조형준 사회복지사
꿈과 현실의 문턱에서
네 번째 가을, 교정의 잎사귀들이 물드는 속도만큼 졸업이 현실로 다가왔다.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4학년. 누군가에게는 희망찬 도약의 시기일 테지만, 나에게는 안개 속을 걷는 듯 막막하기만 하다.
정치학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었다. 권력의 속성, 정의의 다의성을 배우며 더 나은 공동체를 향한 열망을 키웠다. 국회 보좌관, 국제기구 활동가, 혹은 날카로운 정치평론가. 가슴 벅찬 상상들이 현실의 문 앞에서 멈칫거린다.
졸업을 앞둔 동기들의 대화는 늘 ‘취업’이라는 두 글자로 귀결된다. 고시, 로스쿨, 언론사 공채를 향해 달려가는 친구들의 뒷모습을 보며 응원하면서도 나는 홀로 질문을 삼킨다. ‘나의 자리는 과연 있을까?’
이 질문이 유독 무거운 이유는 나에게 ‘뇌병변 지체장애’라는 또 다른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4년간 학문적 열정은 누구와도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장벽을 넘기 위해 몇 배의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사회로의 첫발을 내딛으려는 지금, 의지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을 마주한 기분이다. 정치학도로서의 이상과 장애 당사자로서의 현실, 두 고민이 어깨를 짓누른다.
‘공무원’이라는 유일한 길 앞에서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은 수많은 부딪힘의 연속이다. 물리적 문턱, 때로는 무심한 시선, 그리고 무엇보다 기회의 불평등이라는 보이지 않는 벽.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비교적 동등한 경쟁이 가능했지만, 취업 시장은 냉혹한 현실을 예고한다.
서류 전형을 통과한들 면접관 앞에서 나의 지성과 잠재력이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을까? 나의 신체가 ‘불가능’의 낙인으로 먼저 찍히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떨치기 어렵다. ‘함께 일하는 데 불편함은 없겠느냐’는 정중하지만 날카로운 질문 뒤에 숨겨진 차별의 칼날을 나는 과연 담담하게 마주할 수 있을까.
이 불안감은 비단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4년간 장애인권동아리 <가날지기> 회장으로 활동하며 나는 수많은 장애 학우들의 비슷한 고민과 마주했다. 우리는 함께 차별에 맞서 목소리를 냈지만, 졸업을 앞둔 우리 앞에 놓인 가장 큰 벽은 다름 아닌 ‘진로’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수많은 고민의 끝은 대부분 ‘공무원 시험 준비’라는 하나의 길로 향하고 있었다. 전공이 제각기 달랐는데도 말이다.
어느 날 경영학을 전공하던 친구와 식사 자리를 가졌다. 하고 싶은 일이 명확했던 그 친구의 입에서 “그냥 나도 7급 준비하려고, 창업이 쉽지는 않은 것 같아”라는 말이 나왔을 때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왜 우리는 ‘공무원’이라는 선택지 외에 다른 꿈을 꾸기 어려워하는가. 안정적인 직장이라는 현실적 장점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이 ‘공무원 강박’ 현상은 우리 사회가 장애인의 잠재력을 얼마나 획일적으로 바라보는지를 보여주는 씁쓸한 단면이다. 마치 사회가 “너희의 자리는 여기뿐”이라고 선을 긋는 듯하다. 각자의 꿈과 적성을 펼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안전’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의 길로 내몰리는 현실이 아프고 또 화가 난다.
극복이 아닌 공존의 정치를 꿈꾸며
깊은 고민의 터널을 지나며 나는 나의 장애를, 그리고 나의 길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바꾸기로 했다. 세상은 흔히 장애를 ‘극복’의 대상으로 이야기한다. 불편한 몸을 이겨낸 인간 승리의 서사를 칭송한다. 하지만 나의 목표는 장애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꿈꾸는 세상은 내 몸의 불편함이 사라진 세상이 아니라, 나의 몸 그대로 온전히 존중받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다. 필요한 것은 극복이 아닌 ‘공존’이다.
나의 경험은 단순한 개인의 서사를 넘어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는 가장 생생한 증언이다. 그렇다면 나의 진로는 정형화된 길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정체성을 온전히 녹여내 공존의 가치를 실현하는 새로운 길이어야 한다.
정치외교학 지식은 나의 경험에 논리와 방향성을 더해준다. 이를 바탕으로 나는 장애인 인권 단체에서 정책 대안을 제시하거나 사회적 연대를 조직하는 활동가로 살아갈 수도 있다. 혹은 국회나 지방의회에서 장애인 정책 전문가로서 실질적인 변화를 만드는 역할을 꿈꿀 수도 있다.
이것은 ‘장애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해내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장애 당사자이기에’ 더 잘 해낼 수 있는 나의 정치다. 나의 몸은 세상의 가장 낮은 곳을 향하는 발걸음이 되고, 나의 언어는 가장 절박한 목소리를 대변하는 진정성 있는 외침이 될 것이다.
물론 쉽지 않은 길일 것이다. 그러나 이 길 위에서의 투쟁은 나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편견과 차별의 벽을 허물기 위함이다. 사회가 나를 받아주길 기다리는 대신 나의 자리와 역할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능동적인 주체가 되고자 한다.
건국대학교에서의 4년, 그리고 <가날지기>에서의 4년은 나에게 세상과 부딪히고 나 자신과 치열하게 싸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나의 이 고민과 다짐이 진로와 취업이라는 벽 앞에서 망설이는 또 다른 장애 청년에게 작은 희망이 되기를 바란다.
전공을 살리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하고 싶은 일은 해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 나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아 나의 미래와 나의 정치를, 바로 그 공존의 정치를 써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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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 및 안내] (게시일: 2025.10.21.)
본 기사에 사용된 첫 번째 사진은 조형준 사회복지사가 촬영한 이미지로, 편집 과정에서 출처 표기가 누락된 점을 확인하였습니다.
현재 본문에 사진 출처를 명시하였으며, 독자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 <함께걸음> 편집부 —
작성자글. 조재호 장애인권대학생·청년네트워크 이사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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