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질도 삽이 필요한 법인데
AI와 장애
본문
‘목마른 자가 우물 판다’는 말은 장애인인 내가 많이 의지하는 속담이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가 그렇다. 특히 나의 부모님은 장애인의 부모로서 자식 일에 관련해 남들의 도움에 의존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편이다. 그래서 웬만하면 당신들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그게 안 되면 그냥 단념했다. 성격 탓도 있긴 할 것이다.
하지만 아마 많은 장애인과 그 가족들은 공감할 터인데, 사회가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경향도 없지 않다. 법적으로 보장되는 권리를 행사하고자 할 뿐인데도 행정편의주의와 시혜적 접근법, 그리고 일부 희한한 담당자의 조합은 우리를 사회의 해충 쯤 되는 것처럼 느끼게 하곤 한다. 이러한 것에 면역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일까. 나도 무언가 벽에 부딪히면 내가 저 벽을 넘을 수 있을지부터 생각해보는 편이다. 안 될 것 같으면 포기한다. 그래서 때때로 다른 가능성을 놓치곤 한다.
컴퓨터 한 대로 시작한 모험
나는 중증장애인으로서 내가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에 의지해왔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컴퓨터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컴퓨터로 밥을 먹고 물을 마실 수는 없지만, 이렇게 하고 싶은 말을 할 수는 있고, 그건 인간에게 의식주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니 컴퓨터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우겨도 되지 않을까.
이십대가 되면서 점점 제어하기 힘들어지는 신체를 보조하기 위해 나는 아두이노라는 초소형 컴퓨터로 나만의 컴퓨터 입력장치를 만들었다. 인터넷을 뒤져 프로그래밍 문법을 익혀 실제 내가 원하는 기능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단순히 컴퓨터와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것 이상의 가능성을 엿보았다. 당장은 내가 누를 수 있는 키보드 키를 마우스 클릭으로 속이는 단순한 기능을 만들 뿐이었지만, 그 이면에 있는 완전히 무한한 가능성에 설레며 본격적으로 코딩을 공부해 보았던 것이다.
나에게는 내가 쓰고 싶은 기능이 있는 나만의 프로그램을 만들려는 꿈이 있었다. 그러나 꿈이란 게 보통 그렇듯, 쉽게 닿을 수 있지 않았다. 일단 프로그래밍은 어려웠고, 영어는 어렸을 때 좀 배우긴 했지만 그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했고, 수학은 정말이지 포기였다.
그런 내가 파이썬 문법책을 읽는다고 해서 만들 수 있는 거라고는 참으로 못생기고 단순한 계산기 같은 것뿐이었는데, 그에 비해 내 꿈은 거창했다. 앞서 말한 대로 포기가 빨랐던 나는 현실의 저울을 가늠해보다 슬쩍 소설가의 길로 방향을 틀어버렸다.
다행히 그 방향에서 길을 잃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내가 등단을 하고 책을 출간하고 이렇게 기고문을 쓸 수 있게 된 동안 세상도 바지런히 제 길을 나아갔다.
챗GPT의 등장, 다시 찾아온 기회의 문
알파고가 바둑판에서 인간을 꺾으며 남긴 흉터가 더는 보이지 않을 즈음인가, 챗GPT라는 다소 촌스러운 이름의 챗봇이 등장해 사람들을 당황시켰다. SF소설을 주로 쓰는 나는 사실 챗GPT 초기 센세이션에 무감했는데, 타고난 무관심으로 인한 무지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단순한 마케팅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랬던 내가 AI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꽤 최근인데, GPT-5라는 모델이 발표되기 얼마 전이었다. 내가 뒤늦게 그것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십 년 전 프로그래밍에 관심을 가게 된 이유와 비슷하다. 그것이 나한테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소설 쓰는 일을 하면서 부수적으로 뒤따르는 다양한 문서 작업은 개인적으로 너무 귀찮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러한 작업을 AI한테 던져주면 신통방통 알아서 해주는 게 아닌가. 냉정히 말해 완벽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내가 창작에 더 집중할 시간 정도는 벌어주었다.
나는 점차 흥미를 느끼며 AI에 이것저것 던져줘 보기 시작했다. 이것도 해? 그럼 저건? 그건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아주 기묘한 개념과 마주하게 됐다.
느낌만으로도 코딩이 된다고?
바이브 코딩. 무슨 뜻 같은가? 코딩이니까 프로그래밍 같은 걸 텐데, 하지만 바이브? 느낌이라는 의미로 주로 힙하게 쓰이는 바이브와 코딩이 대체 무슨 조화지? 그렇게 바이브 코딩에 대해 알아보던 나는 알파고 때의 충격과 공포 그리고 전율을 느끼고 말았다. 아니, 사실은 그냥 좀 설렜을 뿐이다. 십 년 전 아두이노로 게임을 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느꼈던 것처럼.
바이브 코딩이란 말과 함께 퍼진 유행어로는 로우 코딩과 노 코딩 같은 말들이 있는데, 코딩을 적게 하거나 아예 하지 않고서 프로그래밍을 한다는 말이다. 수년 전 프로그래밍 열풍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사교육으로 아이들에게 코딩을 가르치는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는데, 조금 과장하면 한글도 떼지 못한 아이들을 데려다 그림 퍼즐을 쥐어 주고 프로그래밍 로직을 가르치는 식이었다. 말하자면 그것이 노 코딩이다.
바이브 코딩도 그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AI한테 내가 원하는 프로그램의 느낌적인 느낌을 말해주면, 실제로 빌드가 가능한 코드가 나오는 것이다. 이게 무슨 알파고가 훈수 두는 소린가. 놀랍게도 두 얘기 다 이제는 과장이 아니다.
스포를 하자면, 정말로 내가 원하는 프로그램을 그냥 느낌대로 뚝딱 만들어낼 순 없다. AI가 기똥차게 코드를 뱉어내기는 하지만 그들의 태생적 한계로 인해 그들이 생성해 낸 코드는 오류를 품고 있을 확률이 적지 않은데, 그것을 해결하려면 어느 정도의 코딩은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긴 해도 나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것도 나한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말이다.
표정으로 게임하는 세상이 왔다
아두이노를 가지고 게임부터 해보는 나는 지금도 게임 접근성을 탐구하느라 시간과 돈을 쓰고 있다. 내가 이전에 쓴 기고문의 내용도 장애인용 컨트롤러 같은 것을 다룬 내용이었다. 하드웨어는 그 특성상 제약이 심하다. 장애인용 특수 장비는 만들기도 어렵고 어찌어찌 만들더라도 비싸며, 무엇보다 다종다양한 장애인에게 맞지 않는다. 내 장애 유형과 증상의 정도에 따라 장애인용 하드웨어는 그림의 떡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이다. 기성복이 모두에게 맞지는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지만, 장애인의 경우에는 그게 조금 더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반해 소프트웨어는 다르다. 수많은 변수를 품은 채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조정이 가능한 소프트웨어는 그야말로 무한한 가능성을 우리에게 가져다준다. 아두이노를 통해 내가 누를 수 있는 버튼으로 내가 원하는 기능을 실행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거기다 프로그래밍 자체가 AI의 발전과 함께 엄청나게 쉬워지면서 사람들이 그동안 생각만 하던 것들을 실제로 앱으로 만들어 배포할 환경이 갖춰지고 있다.
구글은 몇 년 전 프로젝트 페이스게임이라는 것을 발표했다. 인공지능을 활용해 웹캠의 얼굴 표정을 분석해 키보드나 마우스 입력으로 바꿔주는 프로젝트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데 구글은 그것을 오픈소스로 공개해버렸다. 그래서 나처럼 그것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그 소스를 가지고 자기만의 요리를 만들 수 있게 됐다. 물론 나처럼 코딩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좀 어려운 일이지만, 원래부터 개발자로 일하며 장애인의 접근성에 진심인 사람이라면 꽤 다른 전개가 펼쳐진다.
프랑스의 개발자 발렌틴 스키렐로(Valentin Squirelo)는 구글의 프로젝트 페이스게임을 기반으로 모두가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돕는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이름부터가 PlayAbility로, 시중의 저렴한 웹캠만 있으면 표정이나 머리의 움직임으로 키보드나 마우스 입력을 전송해 컴퓨터를 다루는 것은 기본이고 콘솔 게임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는 이 프로그램을 무료로 배포하고 별도의 커뮤니티 채널을 운영하고 있는데, 사용자들과 긴밀하게 소통하며 PlayAbility의 가능성을 키워가고 있는 중이다. 나도 이 소프트웨어로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게임들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5년 후, 우리는 어떤 삽을 들고 있을까
소설을 쓰지 않을 때면 나는 AI 관련 소식들을 찾아 보며 내가 새로 발견한 가능성이 얼마나 현실성 있는지를 탐구한다. 최근 발표된 GPT-5와 그것이 초래한 여러 사회적 이슈들을 보고 있자면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그에 대한 내용까지 다루는 건 주제적으로나 지면의 제약으로나 적절하지 않은 것 같지만, 이러한 기술의 발전이 가져올 수 있는 해악에 대한 논의가 지나치게 이상적인 이야기라고 치부하기에는 AI가 충분히 일상화되긴 한 것 같다.
논의를 나의 관심사, 그리고 장애인의 접근성 측면에 한해 작금의 상황을 들여다본다면, AI는 전례 없이 커다란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지 싶다. AI를 활용해 자막을 달고 번역을 하고 생각의 편린을 정리하며 사람들과 더 쉽게 소통한다. AI는 도구로서 그 무엇보다 강력하고 편리하며 저렴한데, 좀 소름끼칠 정도로 빠르게 그 정도가 증대되고 있다. 심지어는 AI 자체가 발전함에 따라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되는 에너지소비와 발열을 줄일 수 있는 연구도 이어지고 있다.
나는 무엇보다 AI가 제공해 주는 초강력 삽들이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우물을 쉽게 팔 수 있게 해줄지에 대한 기대가 크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나부터가 내가 쓰고 싶은 앱을 만들어 배포할 생각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5년 후에 우리는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을지를 생각해보는 일은 장애인으로서 퍽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는데, 그것이 지나친 낙관에 그치더라도 그조차 불가능했던 과거에 비하면 행복 그 자체라 할 법하다.
딴지를 하나 걸자면, 나의 이러한 기대가 결국 나와 부모님이 우리 사회에서 겪어야만 했던 직간접적 차별과도 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소버린 AI 프로젝트로 국가 차원의 개발에 첫 삽을 뜬 시점이다. 부디 그 삽질이 접근성 개선을 위한 노력에도 특별히 힘을 실어주기를 바란다.
작성자글. 최의택 작가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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