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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극장: 우리가 만약 미국 동부 지역에서 살았다면(上)

정신장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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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사자 단체인 Wildflower Alliance가 운영하고 있는 Springfield ‘Bowen’ Center에서 동료지원인들과 정신건강분야의 비판적 저널리스트인 Robert Whitaker와 함께 찍은 사진
 
척박한 정신건강 지반을 이루고 있는 한국을 조금씩이라도 개척해 가고자 하는 모임1)이 있다. 정신장애 및 정신질환 당사자들이 바라는 모양새를 직접 경험하고자, 우리는 7월 12일 아침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곳에서 짧게나마 경험한 미국 동부 지역에서 사는 먼 나라 동지들의 일상을 ‘내가 그 지역에 살고 있다면 어떨까 하는 입장으로’ 소개해 보고자 한다.
 
만약에 극장 1부: 내가 동료지원인이라면?
 
나는 미국에서 살고있는 활동가이자 동료지원인이다. 나는 lived experience(살아있는 경험, 생생한 경험)를 기반으로 내 동료들을 만난다.
 
동료지원인이 되기 위해서는 아주 오랜 교육을 받아야 해서 실은 쉽지만은 않았다. 뉴욕주에서 공인하는 동료지원인이 되기 위해서 3명에게 추천서를 받았고, 13개 코스의 2,000시간에 달하는 교육을 받았다. 오랜 시간의 교육을 이수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지만, 나는 나와 유사한 동료들을 만나며 지역에서 같이 살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꼭 동료지원인이 되고 싶었고 마침내 뉴욕주에서 공인하는 동료지원인이 될 수 있었다. 나의 신분은 뉴욕주의 공무원이기 때문에 동료지원 활동을 안정적으로 지속할 수 있다.
 
내가 하는 활동 중 역시 가장 주요한 역할은 동료들을 만나는 것이다. 동료지원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드는 비용은 정부의 공공의료보장 제도(medicaid)를 통해 지불되기 때문에, 내 동료들은 경제적 부담 없이 나를 만날 수 있다. 나 또한 나를 만나기 위한 비용을 국가에서 지불하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국가로부터 나의 역할의 의미를 인정받은 것 같아 더욱 뜻깊다.
 
뿐만 아니라 나는 동료들의 권리 침해나 더 나은 제도를 만들기 위해 옹호 활동도 함께 한다. 지금은 동료지원인으로서 활동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 정신보건국에서 옹호 및 동료지원 서비스 책임자 역할까지 맡고 있다. 이 책임자 역할이 생긴 지는 올해를 기준으로 3~4년 정도 되었는데, 당사자가 주도하고 당사자 권리를 우선할 수 있는 제도 필요성을 뉴욕주는 해가 갈수록 더 체감하고 있어 일부러 이 역할을 구조화하게 됐다.
 
나는 주 정부 정신보건국 내의 탑 리더십 중 하나로서, 장관의 정책이나 주 정부의 정책을 살펴보며 당사자를 옹호하고 동료지원의 핵심 가치와 철학을 위배하는 정책은 없는지 검토하고 있다. 나는 의사나 간호사, 사회복지사의 지시를 받는 사람이 아니며, 그들과 동등한 선상에서 당사자로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그들 역시 나를 한 명의 경험 전문가로서 대우하며 우리 역할의 고유성을 존중하고, 오히려 자신들은 만나기도 어렵고 마음을 열게 하기 어려운 당사자를 만나봐 줄 것을 내게 공식적으로 요청하기도 한다.
 
내가 활동하며 만나는 사람들, 전통적 시각에서 흔히 일컫는 전문가 그룹들, 내가 살고 있는 도시와 국가에서도 모두 나의 역할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인정한다. 사회가 나를 인정해 줌으로써 내가 나를 인정할 수 있게 되었는지, 내가 나를 인정하면서부터 사회로부터의 인정을 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가 나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먼저이든 간에 지역사회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다.
 
요즘 나는, 내 활동의 반경을 넓히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버몬트 주도 동료 지원 기반이 잘 마련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지역에서 내 동료들이 안전하고 독립적인 집에서 살 수 있도록 지원하는 하우징퍼스트(housing first)는 핵심적인 활동 중 하나로 요즘 나의 관심을 끌고 있다.
 
또 하나는, 나를 비롯한 당사자들에게 때때로 극심한 고통이나 어려움을 겪을 때 머무르며 집중적으로 지원받을 수 있는 소테리아 하우스(soteria house), 로즈우드 동료지원쉼터(rosewood peer respite)와 같은 위기 쉼터에서의 활동을 고민하고 있기도 하다. 또 하나 흥미로운 활동으로는 모바일 브릿저인데 위기 쉼터에서 활동할 수도 있고, 당사자단체에서 활동할 수도 있다.
 
모바일 브릿저는 위기 쉼터를 혼자 들어가기에 무리가 있는 경우 그 동료를 쉼터에 데려다 줄 수도 있다. 위기 쉼터 이용을 기다리는 동안 혼자이지 않도록 그 대기 시간을 함께 만들어 가는 시간으로 채우기도 한다. 당사자단체에서 활동한다면 모바일 브릿저는 병원으로 방문할 수도 있고, 외부에서 함께 차를 마시기도 하고, 지역에서 지내는 동안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사람과 연결되고 싶지만 아직 만나기는 부담스럽다면 문자나 전화로도 연결될 수 있는데, 이모든 것은 다 공식적인 동료 지원의 얼개들이다.
 
나는 동료지원인으로서 정부를 감시하고, 나와 동료들을 위한 목소리를 내고, 일상을 동료들과 함께 보내며 취미 생활을 한다. 극심한 고통을 경험하는 동료를 위해 내 곁을 기꺼이 내어줄 수도 있고, 대중교통을 타기 힘들다면 내 차를 타고 조용히 안전한 곳으로 이동할 수도 있다. 병원에 가고 싶지 않은 동료들의 호소를 들어줄 수 있고, 실제로 병원 이외의 공간을 마련해 줄 수도 있다.
 
나는 내가 만나는 동료들에게 약을 먹으라고 강요해 본 적이 없으며, 의료 체계가 갖는 억압의 굴레를 끊어내는 역할도 주저하지 않는다. 약물 감량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약물에 대한 토론을 함께 할 것이고, 약물 감량을 요구하기 위해 함께 의사를 찾아갈 수도 있다. 동료지원인이라는 이름으로 나는 전통적인 정신보건 체계에서 그 누구도 하지 않던 역할을 하고 있고, 할 수 있음에 오늘도 내 삶의 의미와 가치를 느낀다.
 
동료지원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내 동료들과 대화 이 대화2)를 나누다 보면 우리의 닮은 구석을 느낄 수 있다.
 
내 동료 세라(Sera)는 지역에서 투쟁할 때 강력한 동기를 느낀다고 한다. 세라(Sera)는 누군가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 본인에겐 큰 자극이 되지만, 또 다른 동료는 누군가의 옆에 앉아 어두운 구석을 살펴보는 역할을 하기도 하므로 각자 활동에서의 주안점이 다름을 인정하고 있다.
 
얼(Earl)의 경우도 비슷한데, 얼(Earl)은 병원에 입원했을 당시 친구가 강박으로 사망하는 모습을 목도한 적 있다. 그 이후로 투쟁꾼이 되었는데, 우리의 반대편인 누군가와 싸우고, 여기 있는 사람들을 돕고 싶고, 어떤 일이든 무엇이든 벌어지는 상황에 함께 하고 싶어서 동료지원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리즈(Liz) 역시 얼(Earl)과 유사하게 전통적이고 임상적인 세팅을 바꿔나가고 사회를 바꾸는 것이 동기부여가 된다고 하였다. 우리 모두가 투쟁꾼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동료지원인의 역할은 때로는 굉장히 섬세하고, 예민하고, 부드럽고, 또 때로는 아주 강력하고 강인한 면이 있는데, 우리의 다양성을 적재적소에 잘 활용하는 것 같다. 우리가 동료로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때는 전자와 같이, 우리의 반대편에 서 있는 자들과 그들의 사회와 만날 때는 후자와 같이 대하는 듯하다.
 
우리의 역할이 지역 곳곳에, 일상 곳곳에 자리 잡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도, 내가 이 사회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리는 것마저도 모두가 우리의 투쟁의 역사이기 때문인 것 같다.
 
라파엘(Lapael)은 우리의 활동, 사람들과 연결되는 것, 이 모든 게 오롯이 전부 그의 삶 자체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즉, 동료지원은 단순히 하나의 직업이자 밥벌이 수단이 아니다. 우리의 존재와 활동은 지난날의 나와 우리에게 건네는 위로이자 우리를 억압한 모든 이들에 대한 용서이자 화해이다. 또 오늘의 나와 우리가 함께 하는 동력이자, 미래의 나와 우리를 연결 짓고 꿈꾸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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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방정신보건연구회는 ‘정신적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사람들이 제도와 담론에 의해 억압받고 있는 현실에 대항하며, 우리 모두의 해방을 위해 토론하고 고민하는 지식공동체’이다. 이번 연수 참여자로는 이용표(가톨릭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김치훈(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소장), 배진영(애리조나주립대학교 Postdoctoral Researcher), 위은솔(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센터장), 이한결(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사무국장), 권재은(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총괄팀장), 유기훈(경북대학교 의과대학 조교수), 도여옥(대구재활센터 정신건강사회복지사), 정유석(관악동료지원쉼터 부센터장), 전아영(관악동료지원쉼터 활동가)이 함께 했다.
 
2) 이 대화 내용은 연수에서 만났던 실제 활동 중인 동료지원인들이 직접 구술한 내용을 기반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작성자글과 사진. 위은솔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센터장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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