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장애인 김선진, 그리고 > 칼럼


여성 장애인 김선진, 그리고

장애의 교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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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처럼 퇴근하는 길, 엘리베이터에서 상사들과 마주쳐 처음으로 함께 식사하자고 권유받았다. 갓 사랑니를 뽑았기에 식욕이 조금 떨어진 상태였으나 상사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는 생각보다 편안했다. 맛있는 새우 파인애플 볶음밥을 왼쪽 볼로 야금야금 밀어 넣고 있는데, 부장님이 국물로 수저를 뜨다 멈칫하며 이렇게 물어보았다.
 
“선진 씨는 남자친구가 있어?”
 
나는 우물거리던 입을 손으로 살짝 가리고,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장님은 한껏 ‘오’하는 표정을 만들며 감탄했다.
 
“이야, 다 가졌네.”
 
다 가졌다는 그 말에 나는 어쩐지 큰 충족감을 느꼈다. 지금 내가 쥐고 있는 것들이 이전보다 가득한 것만 같았고, 그것들이 지금을 행복하게 살아가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 같았다. 다만, 내가 잊을 수 없는 과거의 것들이 행복으로 무거워진 현재의 내 쪽으로 기울어진 시소를 타고 데굴데굴 굴러왔다.
 
돌아오는 길에 그런 생각을 했다. 과거와 현재의 나는 많이 달라진 게 분명하다고. 그러나 그 정확한 차이를 아직도 잘 모르겠다고. 5년 전의 N수생 김선진은 머리가 많이 짧았고, 아주 뚱뚱했다. 염세적이었고, 옷도 살을 가리는 남성복 위주로 입었었다. 2년 전의 김선진은 갓 꾸미는 데 관심이 생겨 화장이 그렇게나 진한 줄 모르고, 나중에 이날의 사진을 들춰보고 부끄러움에 이불을 뻥뻥 차버릴 것도 모르고 신나게 이것저것 아무거나 걸치고 다녔다. 작년의 김선진은 25년 인생 첫 연애를 쓰라린 후회로 마무리했다. 올해의 김선진은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으며, 이전과 다르게 제법 행복하다.
 
아마 ‘행복’, 그것이 키워드였나 보다. 머리를 많이 길렀다고, 살이 빠졌다고 전부가 아니다. 예쁜 옷을 마구 사도 허전했던 때가 있었다. 아무래도 조금 자존심은 상하지만, 나는 결국 원하는 남자에게 사랑받는 존재로서 나를 확인하고 싶었나 보다. 이것은 조금 오래된 이야기이다. 낯부끄러울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결국은 ‘나’를 이루는 정체성 중 하나를 이제야 간직하게 된 사람으로서 그 과정을 여기에 진솔히 풀고자 한다.
 
이성관계를 거의 포기하고 지내던 어느 날, 평소처럼 장애인권대학생․청년네트워크(이하 장대넷) 활동 중 행사 하나에 참여하고서 돌아와 사진첩을 정리하고 있었다. 행사 관계자와 연락이 이상하게 안 끊기고 계속 이어졌다. 평소에 김선진의 고약한 습관 중 하나는, 상대가 무안할 만큼 빠르게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 하는 것이다. 이는 오랜 소통에 익숙하지 않고, 말주변이 없는 내가 자기방어처럼 치는 철벽인데, 이상하게 이 사람은 계속해서 화두를 던졌고, 나는 거기에 답변을 이어갔다. 그렇게 연락을 주고받은 지 며칠이 지나고서 나는 느꼈다. ‘어, 이 사람 나 좋아하나 봐. 어떡해!’ 입에 주먹을 물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누가 나를 좋아하리란 생각은 진작에 포기했는데, 이렇게 관심을 한껏 표현하며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생기니 나는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사적인 자리에서 처음으로 단둘이 만난 날, 나는 뚝딱거리는 와중에도 그가 나를 아주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걸 확실히 느꼈다. 머잖아 우리는 사귀게 되었다. 이전과 다르게 그와 함께 어느 곳이든 누비고 다니며 그가 쓰다듬는 손길을 가만히 느끼다 보면, 처음에는 그처럼 사랑하는 마음이 크지 않아 잠잠했던 내 가슴이 슬며시 떨려왔다. 그가 나를 원할 때마다 지금까지 충족되지 못했던 여성으로서의 김선진이 눈을 떴다. 여우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고, 여자로서의 나 자신을 인식하는 그 모든 순간이 만족스러웠다. 내 남자친구가 비장애인인 것은 솔직히, 내게는 매력적인 요인이다. 중증 청각장애인임에도 그다지 큰 이질감이 없는 발화와 청능을 가지고 있는 내게, 비장애인 남자친구는 나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득 내 남자친구가 나의 장애로 인해 묵묵히 감내하고 있을 것들을 떠올리면 다소 우울해지곤 한다. 이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에 관한 과제를 해결했으니, 내 앞에는 또다시 새로운 과제가 놓이게 된 것이다.
 
미래를 그려보며
여성으로서의 나를 떠올리면 욕심나는 인생의 과업들이 있다. 기억에 남는 결혼식을 올리고, 아담하고 예쁜 신혼집에서 아기를 낳아 키우고, 남편과 소소한 일상을 보내며 티격태격하다가 알콩달콩 웃다가 모두가 함께 잠드는 그런 삶을 위한 과업들. 김선진은 한 가정의 아내이자 엄마가 되고 싶은 여성이다. 내 가족을 위해서 가장의 자리도 기꺼이 맡고, 뭐든 해내고 싶은 사람이 나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꿈에 늘 끼어 있는 불순물이 있다. 청각장애. 솔직히, 이전까지는 불순물이라고 생각했다. 늘 걸림돌이 되고 나를 초라하게 만드는 게 바로 청각장애라고 생각했다. 아직도 그런 생각을 온전히 떨쳐버릴 수 없다. 장애인으로서의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연습은 계속되고 있다. 결국 떼려야 뗄 수 없는 장애를 수용하면서도 내가 원하는 가정을 꾸리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할 따름이다. 내 장애를 이겨내는 매력과 능력, 그리고 지성으로 승부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처럼 나의 정체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나 인생의 동행인들이 생긴다면, 어쩌면 나는 그렇게까지 홀로 아득바득 살아가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여성으로서의 나를 인정할 수 있도록 많이 사랑해 주는 나의 남자친구 덕분에 깨달은 사실이다.
 
함께하는 이들이 있으면 힘든 일도, 어려운 일도 이겨낼 자신이 생긴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가진 힘은 이처럼 놀라운 것이다. 마침 내가 이 글을 기고하는 이곳의 이름 역시 ‘함께걸음’이 아닌가? 함께 걷자, 우리. 그대와 나는 분명 다른 존재다. 그런 이질적이고 색다른 존재들이 우리나라 좁은 땅에 한가득 움츠려 살고 있다. 지구로 따지면 또 얼마나 복잡스럽고 오묘할까. 그러나 결국 우리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끼는 부분은 이런 것들이다. 장애인이면 장애인, 비장애인이면 비장애인, 남자면 남자, 노인이면 노인…. 우리가 묶어 부르는 개념들은 무수하지만, 그대는 비장애인이기만 하면서 남자도 노인도 청년도 아닌 존재를 보았는가? 세상의 분류들이란 그처럼 얄팍한 것이다. 우리가 가진 무수한 매력과 정체성을 조금 더 부르기 쉽도록 이름을 붙인 것이, 지금에 와서 아웅다웅하고 다투게 하는 단어가 된 것인지 가끔은 황당할 때마저 있다. 그래, 맞다. 나는 장애인이다. 그리고 청년이다. 장대넷의 일원이다. 대학생이다. 그리고, 여자다. 여느 친구들과 다를 바 없이 가슴 뛰는 학창시절의 연애를 꿈꿔보았고, 미래 남자친구에 관해 타로카드를 꺼내 점쳐보기도 했던 풋풋한 여자아이였으며, 지금은 성숙한 몸과 마음으로 더욱 성장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 여성이다.
 
“나는 여성 장애인입니다.”라는 말로 이 글을 끝맺어도 제법 멋지겠지만, 나는 조금 더 다양한 분류를 덧붙여야 만족스러울 듯하다. 그만큼 내가 생각하는 나는 풍부하고 멋지니까. 그래서 이 글은 나의 이름이 들어갔다고 생각하며 빈칸으로 놓아둔 채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 자리에 여러분들의 이름을 채워주면 좋겠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이 빈칸 안에 적힌 내 이름, 그곳에는 얼마나 많은 ‘나’들이, 즉 나의 ‘정체성’이 있는지…. 나는 여러분 모두를 알지도 못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자신한다. 아마 그 모든 것들은 더없이 아름답고 소중할 거라고.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여러분은 스스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거라고. 언젠가 우리가 만나 인사할 날이 온다면, 당신의 자기소개를 기대하겠다.
 
“나는 ______입니다.” 
작성자글과 사진. 김선진 장애인권대학생·청년네트워크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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