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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드라마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 중 시즌4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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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 시즌4 표지(넷플릭스 제공)
 
캐빈디시 칼리지(Cavendish College). 캠퍼스 곳곳에서 여여, 남남, 여남 CC로 보이는 학생들이 서로를 안고 키스를 하며 손을 잡고 있다. 이 학교에서 이런 풍경은 평범한 일상이지만, 전학생 오티스와 그의 절친 에릭은 충격을 받는다. 아직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해 유동적인 에릭은 “캠퍼스의 어느 곳이든 퀴어(Queer)고, 사방에 게이가 있어.”라며 딱 봐도 학생이 주인인 학교의 모습에 흥분한다. 전학생들을 위한 학교 투어를 담당한 트랜스젠더 에비와 그녀의 애인 로먼, 그리고 농인인 아이샤는 교내 시설을 소개하면서 이 학교는 성 중립을 지향해 지어졌으며, 여기서는 모두가 자기 자신일 수 있다고 말한다.
 
드라마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를 먼저 소개해야겠다, 원제는 ‘Sex Education’이며, 넷플릭스에서 2019년 시즌1을 시작으로 2023년 시즌4로 완결된 영국드라마이다. 영국에서는 십대들이 보는 코미디 물로 제작됐으며 우리나라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매 시즌 화제성은 물론이고 인기 있는 드라마다. 주인공 오티스는 성 상담사 엄마 덕분에 귀동냥으로 얻고 책에서 얻은 풍부한 성지식으로 또래친구들의 고민을 상담해준다. 친구 메이브의 제안으로 학교에 무료 성 상담소를 열게 되면서 주목을 받게 된다.
 
처음에는 너무나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성에 관한 대사나 묘사들이 일상적이어서 성인인 내가 보기에도 낯설고 민망했다. 이 드라마가 영국에서는 하이틴물이라니? 의문스러웠지만, 회가 거듭될수록 왜 하이틴물인지 공감이 갔다. 내가 받은 교육에 얽매인 나의 오지랖이었음을 깨닫고, 이렇게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이야기와 고민들을 풀어내면서 실감나게 성교육을 받을 수 있는 문화라는 것이 샘이 날 정도로 부러웠다. 우리나라에서는 당연히 18세 이상 시청가로 청소년 시청불가 등급이다. 시청등급의 차이만큼이나 영국과 우리나라의 정서와 문화의 차이, 특히 성에 관한 인식과 교육, 다름을 인식하는 정도의 차이가 읽힌다.
 
이번 시즌에서 유독 내 시선에 자주 들어오고 동선을 따라가게 되는 인물이 있었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아이작’이다. 그는 모두가 자기 자신일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이 학교에서조차 온전히 자기 자신일 수 없는 학생 중 한 사람이다. 자신의 예술적 감각과 관심, 재능은 무시되고 장애 극복을 위한 치료나 재활의 수단쯤으로 폄하되는 잘못된 인식에 본의 아니게 싸움닭이 되어 태클을 걸고 돌직구를 날려야 하고, 혐오와 조롱의 시선과 말들, 배제와 분리를 당연시하는 차별과 마주해야 하는 아주 피곤한 매일을 살아내고 있다.
 
교내 엘리베이터의 잦은 고장으로 발이 묶여 수업에 늦거나 주로 2층에서 수업하는 미술 실기 수업에 함께 하지 못해 1층에서 홀로 그림을 그려야 하는 날이 허다하고, 급기야 고장 난 엘리베이터 때문에 시험까지 포기해야 하자, 폭발한 아이작은 화재경보 벨을 눌러 모든 시험을 중단시키고, 대피하는 교장과 교사, 학생들을 불러 세워 스스로 발언할 기회를 만든다.
 
아이작이 격양된 목소리로, “엘리베이터를 고체해달라고 여러 번 좋게 말했는데, 바뀌질 않더라고요. 그래서 혼란을 좀 일으켰습니다. 이것 말고도 신경 쓸게 많아. 시험결과는 잘 나올지, 오늘 저녁은 뭘 먹을지, 평범한 일상의 문제들. 그런데도 여기서 시간 낭비하며 접근성이 왜 중요한지 설명하고 있어. 당연해야 하는 건데. 학교에 소리명상 실이 있고, 양봉 시스템까지 갖췄는데 고장 난 엘리베이터 하나 교체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 돼? 물론 화려한 건 아니지만 진짜 중요한 건데” 라고 말한다. 그러자 농인인 아이샤도,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 학교 학생인지도 모르는 뇌성마비 장애를 가진 학생도 그동안 자신들이 겪은 무관심과 무시, 비장애인 중심의 시스템에 자신을 맞추며 사는 게 얼마나 어려운건지 아느냐며 일상이 장벽이고 차별이었음을 이야기한다.
 
이뿐인가, 에릭과 애비, 로먼은 교회를 다니고 싶어도 다닐 수 없다.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교회에서 배척당하고 거부당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으로 살고 싶은 자신을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을 이유로 혐오하고 결국에는 자신을 버려야만 세례를 주겠다는 악마적이고 야만적인 제안과 퀴어를 인정하고 지지하는 학교의 이념과 교회의 이념이 맞지 않아 학생들의 기부를 거부하는 교회의 편협함과 옹졸함에 충격을 받은 에릭은 세례를 받기 직전에 “전 저를 너무 사랑하기에 제 진실을 침묵할 수 없어요.”라며 동성애자임을 밝힌다. 그리고 한 치에 망설임 없이 당당히 교회를 걸어 나온다.
 
이밖에도 엄마의 남자친구에게 성추행당하며 학대받은 조아나, 버스에서 성추행을 당해 버스타기를 두려워하고 그때 입었던 바지는 입지도 버리지도 못하며 남자와의 스킨십을 꺼리게 된 에이미, 성전환 수술을 할 수 없어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런 학생 등 다양한 다름을 가진 학생들이 이 다름이 조롱과 혐오, 차별의 이유가 되는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지키고 권리를 찾기 위해 각자의 목소리로 갈등하고 설득하며 행동하는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모습들이 담긴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나라 드라마라면 어땠을까? 상상하게 된다. 우선 이렇게 여러 다름을 가진 학생들이 한 프레임에 담긴다는 것부터가 상상이 안 된다. 그것도 각자의 에피소드를 일상성으로 평범하게 풀어낼 작가와 연출가가 과연 있을까? 상상할 수 없다. 또, 과연 아이작이나 아이샤, 뇌성마비 장애를 가진 학생 등 이 역할들을 당사자 배우들이 맡아 연기할 수 있었을까?, 애비나 로먼, 그 외 퀴어 학생들 역시 당사자 배우들이 연기할 수 있었을까? 이 물음의 이면에는 우리나라 제작현장의 인식으로는 상상자체가 어려운 일이라는 확신이 있다. 이 차이가 드라마 속에서 장애나 퀴어, 인종 등 소수자성을 가진 캐릭터들을 재연하는 관점이나 서사, 연출, 설정에 투영돼 차이를 만드는 것이다.
 
한 예로 우리나라 드라마 속 장애캐릭터들을 보면 차별의 현장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자신의 권리를 침해당했다는 자각조차도 어려운 사람들, 민폐나 불편의 프레임에 갇혀 그저 쩔쩔매고 사죄하는 죄인의 모습으로 재연될 뿐이다. 그래서 비장애인이 나서서 옹호해줘야만 하는 의존적이고 수동적인 캐릭터가 아직까지도 장애를 가진 캐릭터의 보편적인 모습 아닌가.
 
실제로 장애를 가진 사람들 중에는 이런 생각과 태도를 가진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오랜 세월동안 장애는 죄이고 가족과 사회의 짐이라는 낙인을 찍은 세상에서 자신이기보다는 장애가 앞서는 삶에 순응하며 살도록 정신적으로 지배해온 사회적, 문화적 이데올로기의 영향이 크다. 이런 전후 맥락을 짚어주는 우리나라 드라마들이 있었나? 그저 주인공의 정의로움, 됨됨이 등을 설명해주는 맥락에서, 극적 갈등을 위해서 소모되는 캐릭터로, 재연되는 문제들의 사회적 책임을 가리는 역할에 머무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나?
 
영국도 엘리베이터의 잦은 고장으로 장애를 가진 학생이나 시민들이 발이 묶이는 불편이 존재하는 일상이고 다름이 혐오와 무시, 조롱, 배제와 분리를 당연시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고. 누구나가 누리는 종교의 자유를 느릴 수 없는 차별이 여전히 존재하는 사회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보다 인권적으로 조금 더 나은 세상이라 인식되는 것은 아이작이 자신의 권리 즉 자기 자신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남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을 사회 최약자들의 권리로 인정하는 사회고, 이들이 핏대를 높여 목소리를 내도록 의지를 갖게 하는 사회이며, 자신의 일부인 성정체성을 혐오하고 부정하는 교회를 당당히 버릴 수 있는 자존감을 갖게 하는 사회인 것이다.
 
결국은 자신의 의지로 목소리를 낸 발언들은 모든 학생들의 시험거부권 행사와 농성을 이끌어내 엘리베이터 교체요구를 관철시킨다. 또한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을 포기하지 않도록, 포괄적 교회의 목사가 될 꿈을 품게 하도록 이끄는 엄마의 인정과 친구들의 지지, 수술비 때문에 성전환수술을 못 받고 고통 받는 친구를 위해 수술비 모금 행사를 기획하는 학생들이 전하는 것은 무엇일까?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제안, 모두가 자기 자신일 수 있게 하는 것, 있는 그대로 나일 수 있게 하는 공간을 만들어가는 힘은 결국 자기 자신의 목소리에서 나오며, 이런 세상에서 우선되는 것 역시 당자사성과 이들이 내는 목소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당사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의식하고 경청하는 시민의식, 지지와 연대로 이 목소리에 힘이 살리도록 행동하는 시민운동이라 보여주는 것이다. 영국이 실제로 이런 사회인지는 살아보지 않아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이런 사회가 더 나은 사회임을 인식하고 그 가치를 보여주는 드라마가 주류라는 것, 그리고 우리나라 드라마에서는 이런 모습, 이런 메시지가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의 차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본다.
 
* 우리나라에서 시각장애를 가진 시청자들은 이 드라마를 보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어 더빙 버전이 없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해외콘텐츠의 대부분이 한국어 더빙 버전이 제공되지 않는다. 넷플릭스 측은 우리나라 콘텐츠의 비중이 조금 더 높아지면 한국어 더빙 버전들이 자동적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자본주의 중심의 인식과 해법이지 않나? 볼권리를 자본의 논리에서 본다. 한국의 시각장애를 가진 시청자는 언제까지 기다려야만 하는 것일까? 
 
소감
‘함께걸음’ 400호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지금까지 걸어왔던 것처럼 당사자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전달하며, 반영되도록 방향과 방법을 제안하며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한걸음 한걸음을 떼어주세요. 그동안 애 많이 쓰셨습니다. ‘함께걸음’, 고맙습니다.
작성자글. 백수정 대중문화비평 활동가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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