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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한 짐작 그리고 상상,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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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 포스터 ©지니티비, ENA
 
무례의 잔상

내가 대학교를 다니던 당시만 해도 유아교육학과에는 장애학생이 입학한 전례가 없었다. 처음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의도치 않게 유명인이 되었고 학보사 인터뷰까지 하게 되었다. 그때 기자의 첫 질문이 “지금껏 살아오면서 장애가 없었더라면 어땠을까를 수도 없이 생각했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였다. 순간 굉장히 기분이 나빴다. 질문의 의미는 알지만 분명 나를 부정하는 무례한 짐작과 상상이 농축된 질문이 아닌가. 그래서 더 또박또박 더 차분하게 대답했던 것 같다. “처음부터 장애를 가지고 있어서인지 내 장애가 없어졌으면 하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가끔 내 장애가, 장애가 되지 않는 세상은 어떨까를 생각해 본다고. 기자가 내 기분을 알아차렸는지 미처 거기까지 생각지 못해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무례함’은 이렇게 악의가 아닌 무지의 산물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상대를 향한 혐오와 적의, 무시, 그리고 자신이 부정당하는 치욕감과 모멸감을 안겨주는 탓에 당하는 입장은 날카롭고 뾰족한 칼날에 배인 것 마냥 심한 통증과 깊은 상처를 얻게 된다.

장애와 같이 다름을 가졌다는 이유로 소수로 규정되는 사람들에 대한 무례에는 오랜 세월 다져진 다수 중심의, 다수우월의식의 사고와 인식이 내재된다. 그래서 소수자성을 그저 다른 무엇이 아니라, 결합과 결핍이 있고, 비정상으로 인식하는 것이며, 이런 인식이 대개 문제라는 자각 없이 조롱과 비하, 혐오, 하대로 표출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무서운 사회적 폭력인가. 이런 사회를 대변하듯 대중문화 속에서, 특히 영화나 드라마처럼 인물의 감정 선과 갈등이 중심인 장르에서 이 무례한 짐작과 상상은 감정과 갈등을 드러내는 메신저로 소모되는 것이 다반사다.


 
모두 상호보완적인 관계

최근 장애를 가진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는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 개인적으로 이 드라마는 우리나라에서 다수의 농인캐릭터가 등장하는 첫 드라마로 의미를 두고 싶고, 작품성 역시 괜찮은 드라마라는 대중의 평가에 일정부분 공감한다. 농인인 차진우를 바라보고 그가 경험하는 사회와 사람들의 시선, 청인중심으로만 돌아가는 세상에서 농인이라는 소수가 겪는 소외와 오해, 차별 그리고 청인과의 사랑을 차분하고 촘촘히 엮어 전하고 있다. 무엇보다 흥미롭게 보고 있는 인물들은 차진우가 미술을 가르치는 농인 학생들 시후, 기주, 지민이며, 여기에 청인학생 태호가 들어오면서 더 흥미로워졌다.

이 수업에서 유일한 청인인 태호가 겪는 소외감, 소통이나 수업참여에서의 어려움 등은 청인중심의 학교에서 농인학생들이 늘 마주하는 차별받는 일상과 닮아있다. 그러나 이 교실 안에서는 서로의 다름은 자연스러운 것, 상호보완적인 것이라 읽힌다. 농인 시청자들은 물론이고 다른 장애를 가진 시청자나 비장애 시청자들 서로서로가 공감하며 다름에 의한 차별에 대해, 또 어울려 살아가야 함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되돌아보며 조금은 성숙한 생각들이 공유될 거라는 기대를 가지게 한다.

그럼에도 장애에 대한 무례한 짐작과 상상으로 재연되는 장면들을 볼 때면 순간순간 불쾌해지고 예민해지며 삐딱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무례함이 농축된 짐작 그리고 상상의 재연

우선 회가 거듭될수록 청인중심, 청인입장, 청인시점으로 극이 전개되고 앞서 이야기 했던 장애에 대한 결합이나 결핍, 비정상 등의 부정적인 인식이 농축된 무례한 신들이 습관처럼 재연된다. 진우와 모은 사이에 서경이 등장하면서 삼각관계가 형성된 이 후, 극은 모은과 서경 중심으로 기울어지고 들리지 않는 것과 들리는 것에 경계가 선명해지며 소통의 어려움과 한계를 담는다. 청인들 중심으로 선회한 극은 진우의 듣지 못하는 것의 한계(휘파람 소리를 듣지 못해 서경을 구하지 못함)에 집중하면서, 장애에도 불구하고 장애를 초월한과 같은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사랑이라 말하지 않던, 그저 사랑의 형체 감정 교감을 이야기하고 보여주는 데 집중했던 이 드라마 최고의 미덕이 사라진다.

이런 전개에서 모은의 꿈속에서 진우가 청인이 된 듯, 모은과 귓속말을 나누며 두 사람이 행복해하는 장면이 연출된다. 전후 상황에 개연성을 떠나 지독히도 청인중심의 바람이 담긴 상상, 진우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무례한 상상이 아닌가. 상상은 자유고 세상에 해도 되는 상상, 하지 말아야 하는 상상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장애를 가진 인물이든 비장애인물이든 극 속에서 늘 언제나 장애가 사라지는 바람과 상상만을 한다는 것이다. 마치 장애가 모든 문제와 갈등의 원흉이라는 듯이 말이다. 진우도 모은이 농인이었으면 하는 상상을 할 때가 있지 않을까?, 모은 또한 농인이 되는 상상을 할 때가 있지 않을까.왜 이런 전개는 생각하지 못할까?

무엇보다 모은은 목소리가 아니라 마음을 들어주는 진우에게 끌렸고 진우를 통해 음성언어만이 소통의 전부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도 이 드라마에서 청인들은 (철저히 청인시점이어서 우월감이 내포된 무례한 대사일 수 있는) “들리지 않는 것이 행복할 때도 있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둘의 관계애서는 청인인 모은이 겪는 어려움만을 전하는 등 일관되지 못한항 전개를 보인다, 이 상황에서 매번 농인인 진우는 미안하다고만 하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로맨스의 미학적, 익숙한 커뮤니케이션 등을 위해서일 것이며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차진우의 정체성 존중의 덕목을 무시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이 모든 전개의 배경은 그동안 장애는 불행의 상징이며, 극복되는 것이고, 장애가 없는 세상을 유토피아로 상상해 온 것에 연장선에 있다.


이것이 과연 장애 때문인가, 개인 차원에서 극복이 되는 것들인가

차진우의 목소리로 차분히 읽어 내려가는 내레이션을 통해 교육, 관계, 일상 등에서 차별받았던 기억과 들리지 않아 받는 오해들을 전한다. 또한 공연장에서, 길거리에서, 건물 안에서, 화장실에서 마주하는 불편함, 위험함, 향유하지 못함도 전하는데, 실제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일상이다. 호텔 화재 신 혹은 길에서 마주하는 위험한 장면들, 자막과 무대해설을 제공하지 않는 공연장을 생각해보자. 이것이 장애 때문일까? 사회의 안전 시스탬 부재와 유니버셜 디자인, 배리어프리 인식이 부족해 발생하는 문제이지 않나. 사회적 인식과 책임 의부재가 분명하다. 이를 그저 두 사람의 극적 만남, 주인공의 트라우마나 비장애인의 이해와 도움을 상기시키고, 무엇보다 이해할 수 없었던  농인이 사전에 대본을 구해 읽고 가면 된다는 대사로 마무리 하면 시청자에게 무엇이 남을지.

이것은 장애에 대한 짐작과 상상만으로 제작하는 것이 관행처럼 당연시 되는 무례한 제작환경, 문제제기를 해도 어떻게 풀어내야 하는지 막막해하는 제작진의 장애인식 등 복합적인 원인으로 분석되기도 하지만 결국은 제작 일선의 장애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 다름의 존중감이 배어있지 않다는 것이 핵심일 것이다. 그래서 미디어 콘텐츠 제작현장의 장애나 인권에 대한 자문과 교육이 절실한데. 제작지침에서 의무조항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을뿐더러, 제작진 스스로 그 중요성과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 답답하다.


우리 사회에서 장애는 배제와 분리의 조건일뿐

한편 이 드라마의 주인공 차진우를 연기하는 정우성배우의 연기에 대해 대체불가라는 평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정우성배우가 차진우가 되어 연기했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정우성배우가 농인인 차진우 역에 대체불가라는 평에는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어를 할 때의 리얼리티는 (개인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다름의 존중과 극에서 그럴 수밖에 없는 개연성을 차곡차곡 쌓아놨기에) 차치하더라도, 차진우 역을 실제 농인배우가 연기했을 때의 당사자배우만이 경험하고 표현하는 상황 상황의 감정 선과 수어의 리얼함에서 느껴지는 차진우 그 자체, 그의 삶과 사랑을 감상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장애배우가 장애인물을 연기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을까? 철저히 비장애인중심으로 돌아가는 미디어 제작환경에 있을 것이고 장애를 가진 배우나 스태프의 전문성을 인정하지 않는 제작진의 인식과 제작현실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우리사회의 장애 인식은 어떤가. 우리 사회에서 장애를 가졌다는 것은 아직도 과거 제약과 한계로 보던 관점과 시선에 머물러 있어서 사회구성원의 일원으로써, 동료나, 전문가 등 동등한 관계로써 인정받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미디어 제작 현장의 인식 역시 한 치도 다르지 않으며 그래서 장애배우의 연기를 표현의 다름이나 리얼리티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저 장애를 이유로 할 수 없다는 짐작과 상상만으로 기회도 주지 않고 배제하는 무례를 범하는 것이다.

이 드라마를 보더라도 농인인물이 차진우를 비롯해 소희와 시후, 기주, 지민으로 다섯 명이나 등장하지만 이중에 농인배우가 연기하는 인물이 한명도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또 청인만을 위한 드라마(자막이 청인시청자들의 시청권을 방해하고 영상미에 해가 된다는 지극히 청인중심의 사고가 앞선 듯)인가 싶을 정도로 농인들이 수어로 말하는 장면이나 음성언어 없이 수어로만 대화하는 장면에서만 자막이 삽입되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 드라마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 대중예술 콘텐츠 제작현장 전반의 문제, 그리고 오래된 문제이다. 어느 예술보다도 다양한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 대중예술이기에 다양성의 존중과 표현은 대중예술의 본질이고 최후까지 잃지 말아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대중예술의 본질과 덕목은 현재 어떤 이들을 향해 있으며 어느 곳을 향해 가고 있는지 묻고 싶다.
작성자글. 백수정 대중문화비평 활동가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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