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파시즘 국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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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계엄과 장애인, 그리고…
2024년 12월 3일 밤, 국회 앞 장애인 이동권 요구 천막 거리 농성에서 우리는 한국 현대사에서 다시 없을, 시민을 향해 중화기 총구를 겨눌 뻔한 계엄군을 목격하였다. 이제 12월 3일은 현직 대통령의 국회 찬탈 내란 준동의 날로 전 국민이 각인했다. 다행스럽게도 실패했다.
원래 매년 12월 3일은 UN이 정한 ‘장애인 날’로 널리 알려진 날이었다. 지구 곳곳 많은 장애인 당사자들이 지지하는 자신들의 날로 우리나라 4월 20일 말고 국제 공인된 12월 3일을 장애인 날로 법정기념일을 바꾸자는 주장도 적지 않다. 작년 여의도 국회 앞 그날에도 투쟁하는 장애인이 많았던 이유도 그것이었다. 12월 3일은 1981년 '세계 장애인의 해'(IYCP, International Year of Disabled Persons 1981)'를 선포하고 1992년 12월 3일에 세계 장애인의 날(International Day of Persons with Disability)을 시행하면서 공식화되었다.
그러나 UN에서도 이를 이루기까지 긴 투쟁과 설득이 있었다. 이를 이끈 사람은 리비아 UN주재 대사였다. 리비아 대사는 73년 첫 제안 이후, 8년 동안이나 각국 대사들에게 끈질기게 호소, 결국 모두의 동의를 끌어냈다. 1970년 국제재활협회에서 그 해를 ‘재활 10년’으로 정하고, 각 나라에 ‘재활의 날’을 지정·기념할 것을 권고한 것도 큰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는 한국장애인재활협회(당시 한국신체장애자재활협회)가 71년 5월 15일 정기총회 결의문을 통해서 4월 20일을 ‘재활의 날’ 선언하고 1972년부터 민간 행사로 진행하였다. UN과 국제 흐름과는 달리 왜 우리나라는 4월 20일로 정했는가는 4월이 1년 중 모든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로 장애인 재활 의지를 부각하여 좋고 통계적으로 비가 적으며 다수 기념일과 중복을 피하자는 협회 내 의견이 많았다는 사료가 있다. 1981년에 당시 보건사회부는 협회가 선언한 4월 20일을 ‘제1회 장애자의 날’로 정하고 정부 행사로 ‘장애인의 날’ 행사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당시 정부의 법정기념일 축소 방침에 따라 법정기념일로 지정받지 못하다가, 1989년 12월 개정된 「장애인복지법」에 의거 같은 법 시행령으로 4월 20일을 ‘장애인의 날’로 정하고, 1991년부터 법정기념일로 1994년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포함되었다.
당시 전두환 쿠데타 신군부는 UN과 같은 국제적 지지가 필요함에도 왜 민간의 재활협회가 정한 4월 20일을 굳이 장애인 날로 정했을까? 일단 정치적인 이해관계 때문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81년은 제5공화국이 3월 전두환의 취임으로 시작된 해이다. 그리고 바로 4월 11일 국회가 출범했다. 그리고 장애인의 날이 선포된 것은 12.12가 마무리된 다음 달 1월 5일 당시 국무총리였던 남덕우 총리가 발표한 특별 담화문을 통해서였다. '장애인의 재활·자립·밝아오는 복지사회'란 표어로 발표된 담화문은 전두환 정권이 내건 '개방과 자율', '복지 국가 건설'이라는 정치 슬로건을 그대로 대변했다. 실제로 '장애인 날'은 신군부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최고의 액세서리였다. 국무총리의 특별 담화 이후 군사정권은 '세계 장애인의 해 한국사업추진위원회'를 설치하고 예산을 발표하며 그해 장애인 10대 사업 구성을 밝히기도 했으나 이 발표는 채 두 달을 못가 6월 초 모두 백지화되거나 흐지부지되었다. 이에, 4월 20일과 관련법 제정을 요구했던 신체장애자재활협회가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때 신체장애자재활협회와 같은 한국의 장애인 단체들의 군사정권과의 친분과 국가 우선주의는 사실 그 뿌리가 깊다. 가장 먼저 찾아볼 수 있는 근거는 1972년 11월 20일에 발간된 재활협회 회보 1면, 박정희 정권의 10월 유신을 옹호하고 지지하는 성명서를 통해 그 역사를 엿볼 수 있다.
서슬 퍼런 군사 정권 아래에서 누구랄 것도 없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이해할 만한 하다. 같은 해 1972년 12월 27일은 박정희는 제3공화국 헌법을 파괴하고 자신의 1인 장기 집권을 위한 유신 헌법을 발효시켰다. 분명한 것은 장애인 복지관의 시초라는 정립회관도 바로 이 박정희 군사정권에서, 시각장애인의 안마사 직업 독점도 이 유신체제에서 법제화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독재 정권에서 장애인의 권리는 한편으로는 소록도 강제 이주와 강제 불임이란 어두운 국가 폭력을 가능하게 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 모순과 부조리의 역사가 지금까지도 우리 장애인계의 계속되는 질긴 시설 비리와 시설주의 옹호라는 적폐이고 지금은 그런 과거들이 온갖 나치주의자와 같은 혐오와 차별을 재생산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군사 쿠데타 유신 정권 50여 년 이후, 민주화 이후 최초의 비상계엄을 경험한 2024년 오늘 우리는 이런 과거와 적폐에 대해 어떤 성찰과 태도를 보이고 있는가? 실제로 계엄령이 발동되면 그 누구보다도 더 장애인의 안전과 기본권이 제한되라는 것은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계엄령을 말하는 대통령의 방송 중 유일하게 KBS밖에 수어 통역이 없었고 재난 문자조차 발송되지 않았다. 많은 장애인들이 실제로 막막한 계엄령 발표를 보면서 80년 5월 19일, 장애인증을 무시한 공수부대의 무지막지한 구타로 사망한 광주 5.18 항쟁 두 번째 희생자 농인 김경철 씨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불법적이고 반헌법적인 계엄령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정말 계엄이 필요한 상황이 닥치면 그동안의 내 국가와 정부가 말하는 장애인 당사자에 대한 지원과 고려가 얼마나 공염불에 불과한 것이었는가 하는 슬픈 현실을 직면하는 것이다. 그래도 과거 일부 재력 있고 학벌 좋은 비장애인 전문가들만이 드러났던 장애인 현장이 지난 반세기 동안 바로 다양한 장애인 당사자의 목소리와 투쟁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다. 바로 그 유신을 찬양했던 옛날 한국신체장애자재활협회의 지금에 재활협회가 18개 장애인단체로 함께 구성된 ‘UN장애인권리협약 국내법 개정연대(개정연대)가 바로 다음 날 즉각적으로 “세계장애인의 날에 행해진 윤석열 정부의 반인권적 비상계엄 선포를 규탄한다”며 성명서를 발표한 것은 참으로 격세지감이다.
아마도 작금의 우리 장애인 당사자들은 5.18 당시 희생당했던 농아인 시민처럼, 또다시 우리의 의사소통이 짓밟힐 두려움에 그날 동트는 것이 무섭기만 했다. 겨우 집 밖을 나서며 지역 사회 활동을 시작하는 발달장애인들이 또다시 계엄군들에게 가택 연금이라도 당할까 봐 두려웠으며, 겨우겨우 자기 집에서 이동을 허락받았던 교통약자 장애인들이 통행금지와 같은 포고령 때문에 또 다시 외딴섬 시설로 끌려가 유폐될까 봐 숨죽였었다.
그동안 우리 안 당사자들의 민주주의가, 우리들의 인권이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얼마나 취약한 것이었나를 어렵사리 발견하는 것이었다. 우리들의 일상적인 시민의 민주주의와 한 개인의 인권을 지속가능하게 향유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끔찍한 상상은 2024년 12월 3일, 그 계엄군이 혹시라도 농성하던 장애인들의 휠체어를 깔아뭉개고 시각장애인 국회의원을 강제 체포라도 해서 그 내란이 혹여 성공이라도 했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작성자글과 사진. 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활동가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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