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살리아법, 이탈리아 정신건강 시스템 혁신을 만들다 > 칼럼


바살리아법, 이탈리아 정신건강 시스템 혁신을 만들다

정신장애 이야기

본문

△ 바살리아가 근무했던 병원에 있는 파란 말 마르코 까발로
 
프랑코 바살리아(Franco Basaglia)의 혁명적 정신이 깃든 이탈리아에 가서, ‘인간 존엄’이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정신건강 개혁의 발자취를 따라 그 의미를 되새겨 봤다. 바살리아가 사회에 던진 근본적인 질문, “정신질환자는 왜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지 못하는가?”에 대한 이탈리아 현장의 답은 분명했다. 바살리아의 정신을 이어간 이탈리아는 억압과 통제의 시대를 넘어, 인간 존엄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지역사회 중심의 정신건강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는 단순한 의료 체계 개편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가치관까지 변화시키는 혁신적 접근이었다. 바살리아법과 이탈리아 정신건강 시스템의 핵심 내용을 살펴보며,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해 보자.
 
폐쇄된 문을 열고, 지역사회로 향하다
 
1978년, 이탈리아는 바살리아법(Legge Basaglia)을 제정하며 세계 정신건강 역사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 정신과 의사 프랑코 바살리아의 헌신으로 탄생한 이 법은 기존의 정신병원 중심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지역사회 기반의 정신건강 서비스로 전환하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한다. 바살리아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모든 공립 정신병원의 단계적 폐쇄 및 신규 설립 금지
● 지역사회 기반 정신건강센터(CSM) 설립 및 확대
● 정신질환자의 존엄성과 자율성을 보장하는 치료 환경 조성
● 급성기 치료는 종합병원의 정신과 병동에서 담당
● 정신장애인의 주거, 직업, 사회통합을 지원하는 다층적 서비스 구축
 
1978년 바살리아법이 제정될 당시 이탈리아에는 76개의 국립 정신병원이 있었고, 약 78,538명의 환자가 수용되어 있었다. 이후 20여 년에 걸쳐 정신병원이 점진적으로 폐쇄되었으며, 1999년에 마지막 공립 정신병원이 문을 닫았다. 폐쇄된 정신병원들은 지역정신건강센터, 게스트하우스, 정신병원 박물관 등으로 전환되어 새로운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후 급성기 환자 치료는 종합병원의 정신과 병동에서 담당하며, 지역 정신건강 서비스와 연계하여 단기치료와 사회 복귀를 지원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또한, 지역 정신건강센터에서도 응급입원 병상을 운영하며 위기 상황에 대응하고 있다.
 
이탈리아 정신건강 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국가와 지방정부의 공공 정신건강 부서가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공공 정신건강 부서는 바살리아법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정신병원 폐쇄와 지역사회 기반 서비스 시스템 구축을 주도하였다. 또한, 공공정신건강 부서는 지역사회 정신건강센터(CSM)를 직영하면서 정신질환자의 치료, 재활, 주거, 직업 지원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예산과 인력을 마련하고 있다.
 
최근에는 아동과 청소년, 청년 대상의 조기개입서비스와 데이센터 운영을 확대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정신건강 개혁이 단순히 병원 폐쇄에 그치지 않고, 정신장애인의 자립과 사회통합을 위한 지역사회 시스템 구축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국가 차원의 뚜렷한 정책목표와 공공의 책임성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촘촘한 지역사회의 연결망과 공동체
 
이탈리아는 바살리아법을 제정하며 정신병원을 완전히 폐쇄하는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고, 이후 지역사회에서 치료와 회복이 가능하도록 공간을 꾸준히 조성해왔다. 이를 통해 환자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통합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러한 정신건강 시스템의 핵심은 촘촘한 지역사회 기반 서비스망이다. 이탈리아의 지역 정신건강센터(CSM)는 환자 개개인의 특성과 요구에 맞춘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핵심 기관이다. 지역 정신건강센터(CSM)는 정신과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임상심리사 등 다학제 팀을 운영하며, 정신건강 예방 및 조기개입, 외래 진료 및 방문서비스, 위기 개입 및 응급 병상 운영, 재활 및 사회적 통합 프로그램, 아동·청소년 정신건강 지원, 데이센터 및 임시 주거 서비스 제공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위기 상황 발생 시에도 익숙한 지역사회 환경에서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지역 정신건강센터(CSM)에 24시간 응급 병상을 운영하고 가정방문 서비스 등을 통해 위기상황을 지원한다. 지역 정신건강센터(CSM) 부설 데이센터에서는 상담과 집단활동을 통해 지지하며, 가족 프로그램을 통해 가족 구성원이 환자의 회복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지원하고 있다. 임시거주시설(SRTRe Tarsia)은 단기간 머물면서 정신건강센터 및 기타 서비스와 협력하여 통합적 치료 재활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지원주택이나 독립 주거로 연계하는 역할을 한다. 이외에도, 정신과 진단 및 치료 서비스(SPDC), 청소년 정신병 예방 및 치료 서비스(PIPSM), 발달 연령 대상 서비스(TSMREE), 중독 서비스(SERD), 알코올 센터(CRARL) 등 다양한 기관을 통해 예방, 진단, 치료, 재활 등 환자에게 필요한 모든 서비스를 지역사회 기반으로 제공하고 있다.
 
△ '자유가 치료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트리에스테 옛 병원건물 모습
 
사회적 협동조합(Cooperativa Sociale)이 발달한 이탈리아에서는 정신장애인의 경제적 자립을 지원하기 위한 다양한 협동조합도 활성화되어 있다. 트리에스테 지역을 비롯한 이탈리아 전역에는 정신장애인이 직접 참여하는 협동조합이 운영되며, 다양한 직업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정신장애인 협동조합은 지역 정신 건강센터를 비롯한 다양한 관련 기관과의 계약을 통해 정신장애인에게 지속적인 일자리를 제공하면서 경제적 자립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바살리아 개혁이 시작된 트리에스테 지역에는 바살리아 테마문화 관광 협동조합, 봉제 협동조합, 호텔외식 협동조합 등 다양한 형태의 당사자 협동조합이 운영되고 있다. 정신장애인 사회적 협동조합은 당사자 주도의 활동과 자립 패러다임에 기초하기 때문에, 단순한 일자리 제공을 넘어 지역사회 구성원으로서 소속감과 자존감을 갖고 자립적인 생활을 하는 데 실질적으로 기여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바살리아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우리의 과제
 
이탈리아의 경험은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은 여전히 정신병원 중심의 치료 체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정신질환자의 지역사회 복귀와 자립을 위한 지원이 부족한 상황이다. 반면, 이탈리아 정신건강 시스템은 지역사회 기반의 치료와 사람 중심의 다양한 생활 지원서비스를 통해 사회 통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물론 이탈리아 역시 인력 및 자원 부족, 24시간 지원 체계 미비, 사회적 낙인 등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정신장애인의 인권을 최우선으로 두고, 사회적 책임과 지역사회와의 협력을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접근이 인상적이다. 한국이 정신병원 중심의 치료에서 벗어나 정신질환자의 사회 복귀 및 자립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다음과 같은 과제에 집중해야 한다.
 
● 정신장애인을 치료의 대상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인식하는 패러다임 전환
● 정신건강 서비스의 공적 책임성을 강화하고, 국가와 지방정부가 정신건강 정책을 책임성 있게 이끌도록 공공 정신건강 부서의 역할 강화
● 정신병원 중심 의료 모델에서 벗어나, 지역사회 기반의 공공 서비스 인프라 확대
● 당사자 사회적 협동조합을 활용하여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하고, 경제적 독립과 사회참여를 촉진하는 자립지원 모델 도입
● 정신건강 서비스가 단순한 의료 지원을 넘어 주거, 직업, 문화, 교육 등 다양한 영역과 연계될 수 있도록 지역사회 협력 네트워크 구축
 
바살리아법은 정신질환자를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정신건강 정책의 궁극적인 목표임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정신장애인의 존엄성을 보장하고, 자립과 사회 통합을 촉진하는 정책이 실현될 때 비로소 우리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 한국에서도 바살리아법의 정신을 계승하여 정신장애인과 함께 사는 포용적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 사회 전체가 함께 노력할 때, 진정한 의미의 정신건강 시스템 혁신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 정신장애인 외식 협동조합이 운영하는 식당
 
※ 마르코 까발로는 바살리아가 정신병원을 개혁하면서 그림, 조각, 연극 등의 자유로운 워크샵을 시작하면서 환자들이 만든 작품으로 당시 정신병원에서 환자세탁물을 운반했던 말을 조각한 작품으로 정신장애인 해방의 상징이기도 하다.
작성자글과 사진. 홍선미 한신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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