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속 정신장애 당사자가 두드릴 수 있는 문
애리조나 정신위기대응시스템이 한국에 주는 함의 / 정신장애 이야기
본문
정신적 위기란, 갑작스러운 정서적 불안 또는 혼동, 자살 사고 및 충동, 고조된 기분이나 행동, 극단적인 두려움이나 신념의 표출 등 사회적 철회를 야기하여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 복합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정신적 위기가 예고 없이 찾아온다고 믿으며, 그 불확실성을 두려워한다. 가령, 조현병 진단을 받은 자녀를 둔 부모는 부쩍 평상시보다 혼잣말하는 횟수가 늘어나고 말투가 날카로워진 그를 보고 재발이 진행되고 있다고 추정하게 된다. 그러나 평소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부모는 강제로라도 자녀를 입원시킴으로써 불확실성을 극복하려 할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당사자 자녀는 입원 후 일상의 단절, 퇴원 후 가족에 대한 신뢰 상실 등으로 더욱 큰 고통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위 예시처럼 당사자들과 그의 가족들에 따르면, 극심한 위기로 이어지기 전까지 전조 징후와 예견 가능했던 작은 사건들이 선행한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소위 ‘작은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이 부재한 현실 속에서는 가족과 당사자들이 찾을 수 있는 도피처는 정신병원이 유일하다. 결국, 우리 사회가 두려워하고 낙인화한 정신적 위기는 역설적으로 그러한 전조 현상들을 무시하고 방치한 사회가 생산한 것이며, 그 두려움을 일축하고자 당사자들을 병원에 수용하는 방식으로 발전해왔다.
반면, 미국의 애리조나주에서는 정신장애 당사자들이 평균 10일 이하 입원하고 있으며 한 달 이상 지속 가능한 장기입원 병상 수는 한국의 1/10에 불과하다. 이러한 지역사회에 거주하는 정신장애 당사자들이 정신위기를 경험할 때에 어떤 지원을 받고 있는지 파악하고자, 작년 10월부터 미국 애리조나주립대에서 1년 동안의 연구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정신건강복지센터 외에는 공식적인 지역사회 위기지원체계가 부재한 대한민국과 달리, 애리조나에서는 23시간 안정화 병상, 위기 핫라인, 웜라인, 모바일 위기팀 등 다양한 서비스들이 서로 협조를 주고받는다. 뿐만 아니라 동료지원센터(peer-run organization)에서도 동료 간 연대를 기반으로 일상적 위기를 상호 지원하고 있다. 지금까지 애리조나주의 다양한 현장에서 위기지원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종사자 11명을 심층 인터뷰하였고, 최근부터 서비스 이용 당사자들과의 포커스그룹인터뷰를 진행 중이다.
정신위기를 겪는 당사자들이 입원하지 않고 지역사회 내에서 자신과 주변 인물들의 안위를 보호하며 살 수 있도록 지원하는 애리조나주의 서비스 포트폴리오를 소개하고 싶다. 이는 정신적 증상에 관한 낙인이 높아 사회 방위적 시각에서 당사자를 지역사회로부터 분리하고자 하는 한국의 시스템과 가히 대비된다. 먼저, 위기 핫라인(디스패처)은 위기 상황에 있는 당사자가 즉각적인 유선상의 지원을 얻기 위해 24/7 연락할 수 있는 서비스이다. 애리조나 주에서 운영하는 위기 핫라인은 미국 연방정부에서 2021년 이후 50개 주정부와 함께 설치한 ‘988 자살 및 위기 상담 전화 라인’의 주요한 전례로 활용되었다. 애리조나 주정부는 위기 핫라인을 운영하는 기업과 계약을 맺고 경찰, 소방, 응급구조, 정신보건서비스 기관들과 사전협의를 통한 파트너쉽을 구축하였다. 이때 핫라인의 목적은 장기적인 지원이나 치료적 상담을 제공하기보다, 위기의 그 순간에 초점을 두고 최대한 안전성을 담보하는 것이다. 핫라인은 위기의 내용과 응급성에 기반하여 지역사회 내 의료/보건/경찰 서비스로의 효과적인 트리아지(평가 및 분류; triage)를 실시한다. 위기전문가는 유선 대응 과정에서 당사자의 위기 상황에 대한 응급도, 안정성, 개입 필요성 등을 신속하게 파악하고 필요시에는 모바일 위기팀과 경찰 등 현장으로 출동할 수 있는 인력을 파견한다. 현장 개입이 필요한 수준의 응급이 아닌 경우에는 지역자원을 소개하면서 대응을 종결한다. 위기 안정화(de-escalation)에 초점을 둔 이 서비스는 감정적 소용돌이에 놓여있는 당사자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빠르게 파악하고, 스스로를 또는 타인을 해할 가능성이 발견되면 우선적으로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대화를 이어간다.
위기 핫라인에 의하여 해결되지 못한 위기는 모바일 위기팀이 이어받는다. 현장에 출동하여 직접 당사자와 대면하고, 당사자가 즉각적인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 안전감을 느낄 수 있도록 당사자를 안정화시키는 데 초점을 둔다. 주로 2인 1조로 움직이며, 안전 및 신체적 건강 상의 문제가 발견되면 911이나 경찰과 함께 현장에서 대응한다. 또 현장에서의 평가를 통해 의료적 개입 필요성, 즉각적인 자·타해 위험성, 현재 이용 중인 서비스, 약물치료 여부, 증상, 일상생활 수준 등을 파악하여 당사자에게 필요한 자원을 연계한다.
만약 모바일 위기팀이 해결하지 못한 정신위기 상황이 있으면 당사자는 경찰이나 모바일 위기팀에 의해 입원/통원치료 기관이나 23시간 안정화 병상으로 이송된다. 애리조나주의 경우 입원 병상 수가 적고 미국의 의료비가 월등히 높기 때문에, 필요한 안정화 서비스를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받고 퇴소할 수 있는 서비스가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안정화 병상은 앞서 소개한 모바일 위기팀이나 경찰이 당사자를 이송하여 연계하는 드롭오프(drop-off) 창구와 당사자가 스스로 방문하는 워크인(walk-in) 창구로 운영된다. 입소 시에는 간단한 정신건강 평가가 이루어지며, 기관에 따라 자발적 입소만 가능한 곳과 자발적/비자발적 입소가 모두 가능한 기관이 있다. 즉각적으로 필요한 약물치료, 위생관리 등을 제공하고, 대개 베드(bed) 대신 리클라이너 의자를 배치하고 있으며 당사자들은 그 의자에 누워 전문적 지원을 받는다. 퇴소 시에는 당사자가 지역사회에 정착할 수 있도록 필요한 자원을 연계한다.
정신장애 당사자들은 모든 정신위기가 자신과 타인의 생명을 위협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도리어 위기 그 자체보다 그로 인한 사회적 고립이 그들의 정신건강과 삶의 질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애리조나 주는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따뜻한 전화(Warm Line; 웜라인)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웜라인은 애리조나주로부터 동료지원전문가로 인정받은 인력이 유선 상담을 제공하는 서비스이다. 웜라인에서도 평가 및 분류가 이루어지는데, 만일 위기 당사자가 즉각적인 개입을 요할 정도로 응급한 상황인 경우에는 핫라인으로 이관된다. 그 외에 당사자가 현재의 정서적 위기를 완화하고자 전화한 경우에는 동료지원가의 생생한 경험 전문성(lived experience)을 기반으로 대화를 이어간다. 웜라인은 다른 서비스와 달리, 유사한 위기 상황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동료지원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게 작동한다.
애리조나의 이러한 정책은 ‘No Wrong Door(잘못된 문은 없다)’이라는 정책 기조 아래 형성되었다. 위기에 놓인 사람은 그 누구든지 필요에 따라 어떤 기관의 문이든 두드릴 수 있고 각 기관은 그에게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수준과 상황에 놓인 당사자들이 어떤 서비스에든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각 서비스 단위에서 긴급도와 안전성을 평가하고 필요시에는 더욱 적합한 서비스로 연계 및 분류하도록 하는 트리아지(Triage) 장치가 전체 시스템의 공통된 기반이다. 이와 대비하였을 때, 대한민국의 시스템은 ‘No Door(문이 없다)’의 상황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지역사회에는 위기 당사자를 받아들이는 서비스가 없으므로 결국 위기가 악화될 때까지 속수무책으로 어떠한 문도 찾지 못하다 병원 입원으로 귀결된다.
이는 사회와 제도가 정신적 위기를 바라보는 관점과도 직결되어 있다. 애리조나의 서비스 제공자들을 인터뷰하였을 때, 이들은 위기에 관해 공통적으로 ‘당사자 그들의 위기(it’s their crisis)’라고 답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즉, 현재 그 상황을 경험하고 있는 당사자가 위기를 정의하는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자·타해 위험을 내포하는 긴급한 응급 상황뿐만 아니라, 등교 거부, 소중한 관계망의 상실, 주거 불안, 실업, 정서적 압도 등 훨씬 포괄적인 사회심리학적 상황이 위기로 간주될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수준의 위기 속 당사자가 언제든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연속체적 위기서비스가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한국의 경우 위기는 제3자의 관점에서 해석되고 재단된다. 자타해 위험성을 내포하는 수준의 눈에 띄는 위기가 아니라면 제도는 작동되지 않고 어떠한 문도 열리지 않으며, 문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도 매번 무산된다.
한편, 대한민국에도 유사한 정책과 제도들이 이미 존재하지만 파편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가령, 23시간 안정화 병상 서비스는 우리나라의 응급입원 제도와 유사하다. 23시간 안정화 병상을 방문하였을 때의 첫인상은 정신병동과 환경이 매우 흡사하다는 점이었다. 간호사, 보호사, 정신과 의사 등으로 이루어진 전문인력이 입소자들을 케어하고 있으며, 자극을 최소화하기 위해 입소 시 환복하고 소지품을 보관하도록 한다. 미국은 의료비가 매우 비싸고 병상 수가 적기 때문에 이러한 체계를 별도로 마련해야 했겠지만, 우리나라는 병원에 대한 접근성이 보다 높으므로 별도의 전달체계를 만들기보다 입원시스템을 수정해나가는 것이 더욱 효율적이라는 생각이다. 현재 응급입원제도는 거의 작동되지 않고 있는데, 장기간의 입원에만 초점이 맞춰진 현재의 입원제도를 단기간 위기안정을 위한 시스템으로 바꾸어간다면 불요불급한 장기 입원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모바일 위기팀은 최근 광역 단위로 설치되고 있는 정신응급합동대응센터(이하 응급합동센터)와 결이 유사하다. 최근 국내에서는 경찰과 정신건강전문요원이 유선으로 정신응급 상황을 의뢰받고 출동 여부를 판단한 후 현장 출동 및 대응하도록 하는 응급합동센터가 일부 지역에 설치되었다. 그러나 인력 부족 등으로 인해 실제로 경찰과 전문요원이 함께 현장에 출동하여 대응할 수 있는 환경이 충분하지 않고, 현장 대응을 했다 하더라도 결국 입원을 위해 병원으로 당사자를 이송하거나 보호자에게 인계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또 대개 자·타해 위험이 있는 경우에만 현장 출동이 이루어지고 있어, 포괄적 위기는 여전히 방치된다. 포괄적 위기에 유선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전화상담 핫라인과 적극적인 개입을 위한 출동대응서비스를 응급합동센터에서 투트랙으로 운영하는 전략이 효과적일 것이다. 또 출동한 인력이 충분한 시간 동안 위기 당사자와 대화하고 지원할 수 있어야 하며, 필요 시 신체적, 정서적으로 안전하게 당사자를 이송할 수 있는 별도의 차량도 필요하다. 해당 센터에서 근무하는 경찰관에 대한 정신위기에 관한 교육, 지역 간 합동대응에 요구되는 시뮬레이션 교육 등도 위기 대응의 전문성을 높일 것이다. 최소한 대응팀이 떠나고 난 자리에, 다시 당사자와 그의 가족을 위기의 소용돌이와 함께 두고 오는 일은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
애리조나주의 이와 같은 서비스들은 한국에 많은 함의를 제공하며 환상을 심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애리조나에서도 현 위기시스템에 대한 비판이나 한계는 존재한다. 위기서비스 제공자들 사이에서의 이직율이 높아 종사자와 이용자 간의 신뢰 형성이 어려우며, 긴급한 위기 안정 이후 일상생활에 필요한 지역사회 자원이 잘 연계되지 않아 당사자들의 정서적 어려움이 지속되기도 한다. 또 No Wrong Door 정책으로 인해 치매나 자폐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이들이 위기서비스에 유입되는 미스매치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최근 방문한 피닉스의 동료지원센터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곳의 당사자들은 함께 일상을 살아가며, 서로의 일상적 위기를 기민하게 감지하고 돌보고 있었다. 서로 간의 신뢰와 애정 어린 관심 속에서 오랜 시간 쌓아온 관계의 밀도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누가 언제 위기에 빠지는지 서로 알고 있었고, 위기일 때 어떤 방식의 지원이 도움 되는지도 경험을 통해 체화하고 있었다. 이러한 동료 간 연대와 상호 돌봄은 시스템이 닿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메우며, 위기를 ‘막을 수 있는 것’으로, 그리고 ‘함께 건너갈 수 있는 것’으로 전환한다. 위기의 순간에 신뢰하는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것이야말로 제도 이상의 회복을 가능케 하는 단단한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작성자글. 배진영 애리조나주립대학교, 풀브라이트 방문학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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