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 선 일상들, 사소함과 불편함 사이
장애청년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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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고 있는 강주연 위원
나도 몰랐던 시각장애
내가 시력을 점점 잃어가는 희귀병 환자임을 알게 된 건 10살이었던 2013년 겨울이었다. 망막색소변성증(이하. RP). 그로 인해 시야각 10도 정도의 소위 ‘터널시야’ 상태로, 안경테보다 조금 작은 정도의 시야로 세상을 보고 있었다. 진단 이후에야 누군가가 가리키는 물체를 눈으로 잘 쫓지 못하거나 여기저기 자주 부딪히던 이유가 비로소 이해되었다. 흥미롭게도 진단 전까지는 나와 가족을 포함해 누구도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만큼 내 장애는 겉으로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큰 불편이 없었기에 장애등록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학생이 되며 활동 반경이 넓어지자 상황이 달라졌다. 붐비는 지하철 통학 길과 넓은 캠퍼스, 낯선 공간에서 넘어지고 부딪히는 일이 빈번해졌다. 또한, RP가 진행성 질환인 만큼 관리를 위해 음주를 하지 않는 데다가, 좁은 시야와 야맹증으로 조명이 어두운 술집에서 진행되는 술 게임에도 원활히 참여하기 어려웠다. 다들 ‘바니바니’ 게임을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건지... 자연히 사람들과의 친목을 쌓는 데도 어려움을 겪었고, 그러한 경험들은 내 자신이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에 온전히 속하지 못한다는, 무언가 ‘다르다’는 자각으로 이어졌다.
이런 걸로 불편하다고 해도 돼?
고등학교 때까지는 친한 친구 몇몇에게만 내 상황을 귀띔하곤 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도움이 필요할 때도 있고, 바로 옆에 있는 친구를 못 보고 인사를 못해 괜한 오해를 사는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대학에서는 넓고 얕은 인간관계가 많아졌고, 대부분의 모임이 술과 술 게임을 매개로 이뤄졌다. 즐겁게 술잔을 부딪치려 모이는 자리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나의 시야에 대해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단순히 ‘시야가 좁다’라는 설명으로는 사람들에게 나의 불편들이 충분히 전달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혹시나 분위기가 어색해질까 걱정됐고, 얘기를 들은 상대가 당황하거나 나를 불쌍하게 여기지는 않을까, 조심스럽게 대하진 않을까 불안한 마음도 있었다. 재미있게도 동시에 나의 불편이 너무 가볍게 여겨질까 봐 두렵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장애를 밝히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전혀 몰랐어요”라는 말과 상대의 조심스러운 반응이었는데, 지금은 쿨하게 “저도 몰랐어요”라고 대답한다. 사실이긴 하다.) 게다가, 장애를 밝히려면 자연히 따라붙는 질문처럼 느껴졌던 ‘그래서 어떤 배려가 필요한가요?’에 대해 스스로도 명확한 답을 갖고 있지 않았기에 더 혼란스러웠다. 돌이켜보면, 그런 고민 자체가 가능했던 건 내 장애가 ‘숨기려면 숨길 수 있는’ 성격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게는 선택권이 있었지만,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말로 꺼내기엔 대단한 일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그냥 넘기기엔 분명 불편했다. 생각해보면 나 자신과의 문답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지만 그땐 부딪힐 만큼의 용기를 내지 못했다.
이런 고민들이 쌓여가며, 나를 조금 더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시각장애인’이라는 단어 뒤에 ‘시야결손이 있다’는 말을 붙이면 내 불편이 그나마 안전하게 전달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동시에 나를 괴롭게 했던 질문은 ‘내가 이 정도 가지고 불편하다고 해도 되는 건가? 그냥 내가 너무 예민한 것 아닐까? 괜히 더 의식하면서 핑계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자기 의심이었다.
제도교육 12년 동안 배운 장애인의 모습 중 나 같은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가령, 난 붐비는 지하철에서 갑자기 앞으로 끼어드는 사람을 보지 못해 부딪히는 일은 자주 있지만, 그 외에는 1시간 거리의 통학 길도 큰 어려움 없이 오갈 수 있다. 또, 무릎 높이까지 설치된 차량 진입 방지용 돌에 걸려 넘어지긴 하지만, 깨알 같은 글씨로 노트 정리를 한다. 내가 주로 겪는 불편은 이런 종류의 것들이다. 대개 조금씩 불편하고 때로는 위험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불편을 호소하기엔 어딘가 낯간지러운, ‘경계’ 위에 있다. 그래서였을까? 장애등록 여부에 따라 내가 겪는 불편의 정도나 형태가 달라지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면 진짜 불편하다고 해도 된다’는 확인이 당시엔 간절했다.
하지만 고민을 거듭하며 그런 생각 자체가 결국 장애에 대한 내 안의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가닿게 되었다. 나도 20년 가까이 비장애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장애인 사회와 단절되어 살아오며 장애인에 대해 아는 거라곤 학교에서 배운 게 다였으니, 고정관념에서 자유롭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내 존재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내 자신과 장애에 대해 다시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장애학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고, 계속 고민을 이어가던 중 운이 좋게도 나와 비슷하게 경증 시각장애인이신 교수님을 만나 여러 조언을 구할 수 있었다. 그렇게 꼬박 1년이라는 번뇌의 시간을 보내고 마침내 2학년이 되던 해 겨울, 드디어 ‘국가 공인 장애인’이 되었다.
보이지 않는 장애가 빚는 일상의 긴장들
교수님과의 대화를 계기로, 동료 장애인을 만나 경험을 나누는 것이 내게 꼭 필요한 일임을 느꼈다. 그래서 학내 장애인권위원회와 장애인권대학생·청년네트워크 등 동료 청년 장애인들을 만날 수 있는 자리를 열심히 찾아다녔다. 여러 활동과 교류는 장애수용과 장애긍정에 큰 도움이 되었고, 덕분에 장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등록이 모든 걱정과 의문을 해소해주진 못했다. 장애를 등록하고 나서조차 ‘장애인처럼 보이지 않는 것 같다’는 압박감이 되레 새로운 부담으로 다가오는 순간들도 생겨났다. 아이러니하게도 외관상 아예 티가 나지 않기 때문에 더 위험한 순간들이 있다. 나는 특히 보행 중 갑자기 나타나는 사람이나 장애물을 잘 발견하지 못해 부딪히는 일이 잦은데, 대부분 상대는 그 이유를 짐작조차 못 하기 때문에 “잘 좀 보고 다니라”며 화를 내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흰지팡이를 펼치고 걷는 것은 내게 분명 여러모로 안전하고 편리하다. 부딪히더라도 대부분은 화를 내기는커녕 사과를 한다는 점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동시에 ‘시각장애인인 척을 한다’는 오해를 받을 것 같아 용기를 내지 못하는 날이 아직은 훨씬 많다.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거나 책을 읽는 모습, 곧 도착하는 열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뛰거나,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를 두고 굳이 계단을 오르는 모습 등은 일반적으로 몹시 이상하게 보일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RP 환우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비슷한 상담 글들이 자주 올라온다. 다른 한편으로는, 시력도 그대로고 나도 그대로인데, 흰지팡이 하나 때문에 사람들이 나에게 무언가를 맡기기를 꺼리거나 이전처럼 대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도 있다.
지하철에서 복지카드 검사를 받은 적도 있다. 같은 역에서 연이틀 확인을 받았는데, 역무원은 카드를 확인하고서도 본인이 맞는지를 재차 물었다. 휠체어를 탄 사람에게는 아마 그런 확인을 하지 않았을 테다. 그 일을 겪은 뒤로는 ‘장애인 티’를 조금이라도 더 내야 할 것만 같고, 곧 도착하는 열차를 타기 위해 개찰구를 뛰어서 통과해서는 안 될 것 같아 괜히 역무원의 눈치를 더 보게 되기도 한다. 복지관 프로그램에 참여할 때도 시각장애인이라면서 내가 너무 앞을 잘 보고 있는 것 같아 내가 누군가를 속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종종 있다.
버스나 식당처럼 아주 일상적인 공간에서도 작은 긴장과 걱정은 이어진다. 버스를 탈 때는 카드 단말기를 단번에 찾아 출발을 지연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조급해지고, 식당에서는 계산 시 카드를 직원에게 건네야 하는지, 스스로 꽂아야 하는지 분간하기 위해 단말기 위치를 빨리 찾아야 해 마음이 바쁘다. 일일이 설명하긴 애매하고, 안 하면 생기는 불편은 당연한 듯 따라왔다. 이런 크고 작은 애매함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지금의 일상이다.
장애와 비장애를 넘어, 서로를 돌보는 사회로
앞서 언급한 딜레마들을 겪으며 점차 알게 된 것은, 나의 경험들이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장애를 인식하고 다루는 사회적 구조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장애는 흔히 ‘내가 잘 몰라서…’라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다뤄진다. 하지만 그 조심스러움은 실질적인 배려로 이어지지 못하고, 이해 부족 속에 멈춰버릴 때가 적지 않다. 결국 당사자가 먼저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낯선 타인의 납득을 이끌어야 하는 부담을 감당하게 된다.
물론 자신의 상황을 전달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설명을 반복한다 해도, 그것이 항상 충분한 이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당사자의 경험은 말로 온전히 전달하기 어렵고, 듣는 이 역시 낯선 맥락을 한 번에 이해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과정 자체가 반복될수록 작지만 지속적인 피로로 쌓인다. 특히 외관상 드러나지 않는 장애의 경우, 불편이 잘 포착되지 않기 때문에 그 존재를 알리고 조율하는 책임이 온전히 당사자에게 쏠리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알게 된 ‘해바라기 목걸이(Sunflower Lanyard)’ 제도가 인상 깊었다. 외관상 보이지 않는 장애를 가진 사람이 목걸이를 착용하면, 구체적인 설명 없이도 ‘조금 더 배려가 필요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게 하는 장치다. 보이지 않아 인식되지 않던 불편을 조용히 드러냄으로써 설명의 부담을 덜어줄 뿐 아니라, 타인의 사정을 완전히 알지 못하더라도 잠시 멈추어 배려할 수 있는 사회적 여유를 만들어 준다. 나아가 ‘누구나 특정한 맥락에서 배려가 필요할 수 있다’는 감각을 확산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장애계에서도 최근 들어 ‘인간은 본래 서로를 돌보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관점이 강조되고 있다. 장애 여부와 관계없이,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 속에서 설명 없이도 이해받고 싶은 순간들을 안고 살아간다. 그런 감각이 자연스럽게 공유되는 사회라면, 보이지 않는 불편과 경계의 삶도 보다 안전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포용될 수 있을 것이다.
경계에 선 우리들에게
장애를 바라보는 WHO의 ICF 모델에 따르면, 장애는 개인의 ‘손상’과 ‘환경’의 상호작용에 의해 발생한다. 손상의 정도도, 환경도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각자의 장애 경험 또한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나의 불편이 눈에 띄지 않고, 때로는 사소해 보일지라도 그것이 의미 없거나 말할 수 없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의 판정 기준이 담아내지 못하는 형태라 하더라도, 그 감각은 분명히 현실이고,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니 혹시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경계에 서 있다면, 자신을 너무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보이지 않는 감각을 조심스럽게 꺼내는 그 순간들이 결국 이 사회의 감도를 조금씩 바꿔 간다. 그것은 단지 ‘이해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를 더 잘 돌볼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출발일 수 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경계 위에 선 감각들은 기존의 틀에 균열을 내고, 더 넓고 다양한 삶의 자리를 상상하게 만드는 동력이 된다.
작성자글과 사진. 강주연 장애인권대학생·청년네트워크 정책위원회 위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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