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성만을 쫓는 세상에서도, '자신다움'을 잃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 > 칼럼


정상성만을 쫓는 세상에서도, '자신다움'을 잃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

장애코드로 문화읽기 / 영화 <나는 보리(Bori, 2018)>

본문

△ 영화 <나는 보리> 포스터 ⓒ제작사 파도
 
“들리든 안 들리든, 우린 똑같아.”
가족 중 유일하게 청인인 보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두고 고민한다. 가족과 온전히 하나가 되고 싶다는 마음에 ‘소리를 잃게 해 달라’고 소원을 빌기도 한다. 그런 보리에게 아빠는 따뜻한 미소와 손짓으로 말한다. “우린 똑같아. 너는 있는 그대로 너야. 우리의 딸이야. 그게 중요해.” 그렇다. 세상이 어떻게 규정하든, ‘나는 나’, ‘보리는 보리’, ‘정우는 정우’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여성인가, 남성인가, 미혼인가, 기혼인가, 아이가 있는가 없는가, 장애가 있는가 없는가…. 우리는 이런 수많은 조건과 기준을 가지고 그 안에 속하는가, 속하지 않는가를 나누고, 차별의 근거로 삼는다. 그러나 이 중 어느 하나로 ‘나’라는 존재를 온전히 설명할 수 있을까? 보리 아빠의 말처럼, 들리든 안 들리든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일까? 우리는 모두 그 자체로 존재하는 ‘나’인 것을. 이를 인정하지 않는 세상이 오히려 이상하다.
 
이 영화는 극적 갈등이나 과장된 감동을 의도적으로 덜어냈다. 담백한 연출 속에서 오히려 농인들의 현실, 그리고 그 집단에 속하지 못했을 때의 위축과 소외가 더 뚜렷하게 전해진다. 감독의 신념이자 의도가 읽히는 부분이다. 덕분에 상황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본질과 원인을 곱씹게 된다. 또한 농인 가족의 삶에서 불편한 장면들을 생략했다. 장애를 덧입혀 이들의 삶이 결핍이나 불행으로 인식되는 것을 차단하고자 하는 감독의 의지로 읽힌다. 그렇다. 보리네 가족이 살아온 방식, 그들의 ‘노하우’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며, 일상을 흔들 만한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그 노하우들 속에서 오히려 농인에게 비농인 중심의 사회가 얼마나 불편하고 차별적인지, 그 현실이 더 또렷이 드러나기도 한다.
 
이런 다큐멘터리적 연출이 어떤 이들에게는 다소 늘어지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차분히, 조곤조곤, 단순하게 말할 때 더 귀 기울이게 되고 이야기가 선명히 다가오는 순간이 있지 않은가. 나에게 <나는 보리>가 바로 그런 영화였다.
 
소원을 이루고 마주한 세상은
청인인 보리는 설명하기 어려운 소외감과 외로움을 느낀다. 보리에게 ‘소리’는 가족과 자신을 갈라놓는 장벽이자, 일종의 ‘장애’로 여겨진다. 보통의 영화나 드라마라면 이런 상황에서 가족이 ‘소리를 듣게 해 달라’고 빌겠지만, 보리는 오히려 자신이 소리를 잃게 해 달라고 빈다. 보리는 학교 가는 길 사당 앞에서도, 단오 날 시장에서 가족을 잃어버린 혼란스러운 순간에도 두 손을 모으고 간절히 빈다. “소리를 잃게 해 달라”고. 심지어는 외국인 상점에서 “이 부적을 지니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에 덜컥 사버린다. 그렇게 아이다운 집념 끝에 마침내 소원은 이루어지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는다.
 
가족과 같아진 순간, 세상은 전혀 다르게 변한다. 늘 친절해 보였던 동네 사람들은 보리를 불쌍한 눈으로만 바라보고, 상점 점원은 아무렇지 않게 “벙어리”라 부르며 바가지를 씌운다. 친구들조차 보리가 들을 수 없다고 무시하며 인사조차 하지 않는다. 소원을 이루고 난 뒤, 보리가 마주한 것은 편견과 혐오, 차별로 가득한 세상이었고, 그것은 청인으로 살아온 보리가 미처 보지 못한 아빠와 엄마, 그리고 동생 정우가 매일 겪어온 세상이기도 했다.
 
△ 영화 <나는 보리> 스틸컷 ⓒ제작사 파도
 
‘소리를 잃고 싶어 하는 아이’라는 전복적 설정을 통해, 장애를 ‘고쳐야 할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인정하고 존중해야 할 것이라는 원론적 메시지는 물론이고, 이런 역설과 전복의 설정들이 가능했던 이유는, 감독 김진유가 실제로 ‘코다(CODA : Children Of Deaf Adult)’였기 때문이다. 보리와 같은 위치에서 세상을 경험하고 바라본 그의 경험과 인식이 녹아든 자전적 이야기이기에 가능한 작품이었다.
 
“모두 다 수어를 했으면 좋겠어.”
소리를 잃은 보리가 정우에게 묻는다. “수업 시간엔 뭐해?” 정우가 대답한다. “자거나 그림 그려. 선생님도 이해해. 아마 선생님도 어려울 거야.” 그리고 덧붙인다. “누나는 말하는 걸 잘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거야.” 보리는 다시 묻는다. “친구들은?” 정우는 짧게 답한다. “축구할 때 빼고는 잘 안 놀아. 그래서 축구가 좋아.”
 
학교 축구부에서 정우는 가장 실력이 뛰어난 선수다. 모두가 그의 실력을 인정했기에, 전국대회에서 당연히 주전으로 뛸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대회가 시작되자 정우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이유는 단 하나, “지시 수행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후반전에서야 보리의 항의로 출전하지만, 이미 정우의 마음에는 깊은 상처가 남는다. 결국 정우는 인공와우 수술을 받기로 결심한다.
 
“정말 수술을 받고 싶어?” 보리의 물음에, 정우는 “수술 받을 거야. 듣고 싶어서라기보다 친구들이랑 대화하고 싶어서.” 라고 답한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덧붙인다. “모두 다 수어를 했으면 좋겠어.” 이 짧은 말 속에는 너무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수업에서 사실상 방치되는 농인 학생, 능력은 있지만 장애로 배제, 분리되는 현실, 소통 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외톨이가 되는 사회. 이처럼 정우가 마주한 세상은 차갑고도 외로웠다. 축구 실력이 뛰어남에도 단지 ‘들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벤치에 앉게 되는 아이.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지시 수행의 어려움’이 아니라, 그 한 사람의 다름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시스템, 예컨대 수신호나 통역 지원 등 다양한 방법이 있음에도, 장애를 이유로 배제하기부터 하는 이것이 당연시되는 사회 인식과 시스템이다.
 
“모두 다 수어를 했으면 좋겠어.” 정우의 이 말에는, 우리 사회의 농인과 수어가 처한 현실이 녹아 있다. 농인의 교육과 기술개발의 지향이 보조기로서나 지원으로서가 아닌, 청인 되기에 혈안이 된 작금의 현실에서는, 정우처럼 ‘농인으로서, 수어로 소통하며 살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욕구와 권리’를 무시하고 분리와 배제, 차별의 명분을 줄 뿐이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청인 중심, 청인 지향의 현실은 농인학교조차 예외가 아니다. 한글 읽기·쓰기가 중심이 되는 교육과정으로 수어는 점점 주류 언어에서 밀려난다고 한다. 통합학급에서는 정우 같은 농인 학생들이 방치되고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농인들의 교육 여건은 점점 열악해지고, 결국 정우처럼 인공와우 수술을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사회가 떠민다. 긴 재활과 부작용을 감수하면서까지 ‘청인으로 살아야만 하는 길’, ‘나 자신을 버려야 하는 길’을 강요하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 사회의 문제임을 영화는 말하고 있다.
 
보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정우에게 몇 번이고 묻는다. “정말 수술받고 싶어?” 그리고 아빠에게도 묻는다. “정우 수술 받게 할 거예요?” 보리가 이렇게까지 묻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의사는 수술 후 정우가 좋아하는 축구나 수영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지만, 고모는 ‘그래도 듣지 못하는 것보단 낫다’는 생각에 그 사실을 전하지 않았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정우가 “수술하지 않겠다”고 말하자, 가족은 주저 없이 그의 결정을 존중한다.
 
정우는 처음부터 소리를 듣고 싶어서 수술을 결심한 게 아니었다. 그저 친구들과 대화하고, 감독님의 지시를 잘 따라 축구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수술 후에 축구를 못할지도 모른다면, 수술을 할 이유가 사라진다. 그리고 영화는 우리에게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다.
 
보리는 단오 날 시장에서 산 부적을 바다에 던진다. 정우는 ‘소리를 듣는 삶’이 아니라, 자신답게 살아가는 삶을 선택한다. 그리고 부모는 말한다. “들리든 안 들리든, 우린 똑같아”, “나는 나, 그게 중요하다”고. 다름을, 장애를 잘못된 것이라며 획일화와 비장애인 되기를 몰아붙이는 세상에, ‘너는 너, 달라서 귀한 존재’라는 역행적 태도를 가진 가족을 통해 우리는 장애에 대한, 다름에 대한 사회의 통념을 조금이라도 밟아버릴 수 있지 않을까? 사회적 통념을 밟아버림으로써 '나’를 오롯이 '나'로서 바라보며 사랑하게 되는 자유를 얻게 되리라.
 
----------------------------------------
※ 이 글은 2020년 9월 9일 ‘웰페어이슈’에 게재된 글을 토대로 재정리한 것입니다. 당시 원문에서는 농인의 리얼리티, 청각장애 유무와 관계없이 모든 어린이 관객을 위한 영상물의 배리어프리 의무화 문제 등을 함께 다뤘습니다. 반면 이번 글에서는 조금 더 작품의 내용과 감독의 메시지에 집중하며, 농인이 일상에서 마주하는 차별적 시선과 구조적 문제에 보다 무게를 두고자 했습니다. 5년이 흐른 지금, ‘농인의 고유성은 인정하지 않고 청인 되기를 강요하는 교육과 기술 중심의 접근’은 오히려 더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이 보다 또렷하게 드러나도록, 당시 글을 지금의 관점에서 다시 정리했습니다.
작성자글. 백수정 대중문화비평 활동가  cowalk1004@daum.net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함께걸음 페이스북 바로가기
함께걸음 인스타그램 바로가기

제호 : 디지털 함께걸음
주소 : 우)07236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22, 이룸센터 3층 303호
대표전화 : (02) 2675-5364  /  Fax : (02) 2675-8675
등록번호 : 서울아00388  /  등록(발행)일 : 2007년 6월 26일
발행 : (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  발행인 : 김성재 
편집인 : 이미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치훈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함께걸음'이 생산한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4.0 국제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by
Copyright © 2021 함께걸음. All rights reserved. Supported by 푸른아이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