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언어로, 내 존재로: 한국농인LGBT+와 함께한 나의 변화
장애의 교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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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드랙 × 트랜스이갈리아〉 공연에서 아장 님(우측) 곁에서 애란 활동가(중앙)가 수어통역을 진행하고 있 다.(사진 출처. 양승욱)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애란입니다. 저는 농인이자 레즈비언이며, 제1 언어가 한국수어입니다.”
지금은 나 자신을 소개할 때 나의 정체성부터 드러내는 것이 일상이 되었지만, 처음부터 내 정체성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 농사회와 성소수자 커뮤니티 모두에서 미묘한 배제와 오해를 경험하며 내 일부를 숨기고 살아야 했다. 당시에는 인권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고, 사회적 편견 속에서 스스로 움츠러들기 일쑤였다.
한국농인LGBT+에서 활동하기 전, 나는 레즈비언 수어 모임 방장으로 활동했다. 이 모임에는 농인과 청인이 함께 참여하며, 수어로 성소수자로서의 경험과 고민을 나누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한국수어에 존재하는 혐오수어(예컨대 레즈비언의 경우 두 여성이 몸을 비벼 나타내는 수어)를 그대로 따라 쓸 수밖에 없었다.
성소수자의 정체성은 그들이 갖는 성행위만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이성애자의 정체성을 여성과 남성 간의 성행위만으로 한정해서 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성소수자 모두 성소수자로서 자긍심을 갖고 있고, 스스로를 긍정할 때까지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하지만 한국수어로는, 적어도 그 당시로서는 내 정체성을 부정하고 자긍심을 해치는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는 수어였다. 레즈비언이라는 나의 정체성은 그렇게밖에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수어가 없어 결국 「한국수어사전」에 등재된 그 혐오수어를 그대로 사용해야 했다. 당시에 인권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고, 농인과 특히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 속에서 내 정체성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은 당연히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쩌다 페이스북에서 스스로 농인성소수자로 소개하는 지양 활동가를 만나게 되었다. 농인성소수자가 나뿐만이 아니라니, 반가운 마음으로 바로 연락했다. “혹시 농인성소수자 모임도 있나요?”
그때 지양 활동가가 함께하자고 권유해 준 덕분에 한국농인LGBT+와 함께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작은 연결은 내게 큰 용기와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한국농인LGBT+는 농인 성소수자들의 안전한 소통과 연대를 위해 2019년 12월 설립 준비를 시작하고, 2020년 6월 공식 활동을 시작한 단체이다. 처음에는 지양 활동가와 연결되어 운영위원회 활동을 시작했다. 청인 중심 사회에서 수어가 배제되거나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 농인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 현실 속에서, 농인 성소수자가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고 목소리를 사회에 알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왔다.
한국농인LGBT+는 공식 출범 전부터 ‘언어투쟁’을 선언했다. ‘장애자’와 ‘장애우’가 ‘장애인’이 되었듯이, 그리고 ‘동성연애자’와 ‘호모’가 ‘동성애자’와 ‘게이’가 되었듯이, 우리도 우리의 언어에서 우리를 표현하자는 데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2019년 말, 설립준비위원회가 모여 “존재를 지우는 언어 대신, 존재를 드러내는 언어로 살자”는 목표를 세웠다. 그 결실로 2020년에는 약 1년간의 연구 끝에 성소수자 관련 수어 37개를 새로 만들거나 수정했다. 기존 한국수어에서 성소수자를 가리킬 때 혐오적 표현이나 성행위 중심의 표현을 이끌림과 존중, 다양성을 담은 새로운 표현으로 대체했다.
한국농인LGBT+가 그렇게 새롭게 제시한 대안수어에는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와 같은 사회적으로 가시화된 성소수자뿐만 아니라, 논바이너리, 무성애자, 범성애자와 같은 상대적으로 비가시화된 성소수자에 대한 수어도 포함하였다. 특히, 농사회를 포함한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를 대상으로 가장 큰 혐오의 대상이 되는 HIV/AIDS 수어에서도 혐오와 부정적인 뉘앙스를 제거하여 제시하였다. 이는 단순한 언어 작업이 아니라 농인성소수자의 존재를 농사회, 그리고 한국 사회에 새기는 인권운동이었다.
▲퀴어퍼레이드에서 한국농인LGBT+ 깃발을 휘날리며 우리의 존재를 알렸다. (사진출처. 한국농인LGBT+)
한국농인LGBT+의 활동은 대안수어를 제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농당사자 참여의견’ 프로젝트를 통해 각종 공연과 인권 행사에서 농접근권이 얼만큼 보장되고 있는지 그 실태를 파악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단체 내 통역활동가와 함께 공연과 인권 행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대안수어를 바탕으로 한 농접근권 실천 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다.
인권의제를 다양하게 접할 수 있는 청사회와 달리, 농사회에서는 언어차별로 인하여 그 담론을 접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이에 성적권리와 재생산, 청소년 인권, HIV/AIDS 감염인 인권, 동물권 등에 대한 카드뉴스와 수어 콘텐츠 제작을 통해 농인과 농인성소수자에게 인권의제를 알리는 활동도 병행했다.
총 열한 명의 농인성소수자와 만나 농인 그리고 성소수자의 교차적 정체성을 논의하는 『2023 실태조사 보고서: 농인성소수자와의 대화를 제안하다』를 내놓기도 했다. 농인성소수자는 존재한다는 점을, 그리고 언어적·구조적 장벽과 차별로 인해 청인성소수자 커뮤니티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음을 전하고자 했다.
한편, 대안수어가 농사회에서 실질적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국립국어원에 성소수자 혐오수어를 삭제하고 대안수어를 등재할 것을 요구하였다. 계속된 노력 끝에 올해, 국립국어원에서 한국수어 내 혐오수어에 대한 연구를 내년부터 진행하여 한국농인LGBT+가 제안한 대안수어를 비롯한 대안표현을 검토해 이를 사전에 등재할 것이라고 알려오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즉, 한국농인LGBT+는 농인성소수자가 자신을 부정하는 언어로 자신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농사회에서 고립되지 않으며, 농인이라는 이유로 청사회에서 타자화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인권 단체이다. 농정체성과 성소수자 정체성의 교차성을 바탕으로 농인 성소수자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농사회에 부재한 농인 인권운동을 만들어 간다. 또한 청인 중심 인권운동에 비판적으로 개입하고 연대하며, 농사회와 청사회를 잇는 인권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이러한 한국농인LGBT+의 활동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또 당사자로서 활동하며, 이건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확신을 얻었다. 수어로 나의 경험을 나누고, 다른 사람들이 수어로 “저도 그래요.”라고 답해주는 순간, 나의 존재와 정체성을 완전히 이해받는 느낌을 받았다.
다양한 워크숍과 캠페인에 참여하며 서로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 공존하는 언어의 가능성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한국농인LGBT+에서 나의 존재 그 자체가 나다운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내 안에 있던 수치심을 없애주었다.
이제 나는 수어로 나의 정체성을 말하는 것이 더 이상 두렵지 않다. 농인이자 레즈비언으로, 그리고 활동가로. 나는 수어로 나를 새기며 한국농인LGBT+에서의 걸음을 이어 나가고 있다. 애인인 담이 활동가 역시 한국농인LGBT+에서 새싹활동가로 함께 활동하고 있다.
나의 이야기는 단지 내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에 그치지 않는다. 농인성소수자의 권리, 언어권, 그리고 존재를 사회에 드러내는 일은 우리를 알리는 인권활동이며, 앞으로 계속해서 나아갈 길이다. 요즘도 계속 활동하고 있지만, 가능한 한 오래오래 이 길을 함께 걷고 싶다.
작성자글. 애란 한국농인LGBT+ 활동가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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