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극장: 우리가 만약 미국 동부 지역에서 살았다면(下)
정신장애 이야기
본문
▲스프링필드 보웬 센터의 커뮤니티 공간으로 이 곳에 앉아 이용객들은 자유롭게 휴식을 취하거나 대화를 나누고 음식을 먹는다.
척박한 정신건강 지반의 우리나라 환경을 조금씩이라도 개척해 가고자 하는 모임11)에 대해 소개한 바 있다. 우리는 정신장애 및 정신질환 당사자들이 희망하는 지역 환경을 직접 경험하고자 7월 12일 아침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곳에서 짧게나마 경험한 미국 동부 지역에 사는 먼 나라 동지들의 일상을 지난 호에 이어 소개해 보고자 한다. 마찬가지로 ‘미국 동부 지역에 살고 있다면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 상상해 보았다.
만약에 극장 2부: 내가 지역에서 생활 하던 중 위기를 경험하는 당사자라면?
나는 미국 동부, 특히 메사추세츠주 지역에 살고 있는 당사자 A이다. 평소 나는 Wildflower Aliance2)가 운영하는 커뮤니티센터를 자주 이용하고 있다. 와일드플라워 연맹은 여러 커뮤니티센터를 운영하고 있는데, 특히 나는 Springfield Bowen Center(이하 보웬 센터)에 가장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 이곳을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하나씩 소개해 보려고 한다.
먼저, 나는 미국에 처음부터 살던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주거가 불안정하고 미국 시민권자로 아직 인정받지 못한 탓에 때때로 경찰의 감시망으로부터 보호가 필요하다. 나와 비슷한 상황의 당사자들이 매우 많은 점은 미국의 특징 중 하나로, 이는 나만 경험하는 어려움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보웬 센터의 정문은 늘 굳게 닫혀 있는데, 갑작스럽게 들이닥칠 수도 있는 경찰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센터의 전략 중 하나이다. 나와 동료들은 늘 뒷문을 통해 자유롭게 센터를 드나든다. 이렇게 보웬 센터는 우리가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고 있다.
가끔은 나의 신분이 ‘도망자’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보웬 센터에 발을 디디는 순간, 나는 안전함을 느낄 뿐 아니라 내가 ‘환영받는 공간’에 왔다는 것을 매일 같이 체감한다. 내 권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또 그 권리를 보장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 역시 게시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 지역에서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자원에 대해 안내받을 수 있고, 센터의 활동이나 공지사항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스프링필드 보웬 센터 게시판에 많은 정보와 자원들이 홍보되고 있다.
보웬 센터의 장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앞서 밝힌 것과 같이 나는 주거가 불안정한 탓에 가끔 샤워를 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이곳에서는 따뜻한 물로 씻을 수 있고, 옷까지 세탁해서 입을 수 있다. 이 밖에도 우리 지역에는 운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찾기가 힘든데 센터에서는 운동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컴퓨터도 이용할 수 있다. 가끔은 사색에 잠기고 싶어 책을 읽기도 하고, 동료들이 기부한 옷을 둘러보다 마음에 드는 옷을 발견하면 옷을 갈아입으며 기분을 내기도 한다.
특히 보웬 센터에 내가 정을 붙이는 이유는, 가족들과 편지를 주고 받을 때 마땅한 수신처가 없는 나의 상황을 고려해 편지를 이곳으로 받을 수 있게 허용해 주는 점 때문이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동료들이 보웬 센터를 통해 편지를 주고 받는다. 또 예전에 나는 잠시 마약에 손을 댄 적이 있었는데, 센터에 비치된 해독제 덕분에 응급 상황을 안전하게 넘길 수 있었던 경험도 있다. 이처럼 보웬 센터는 내 일상에서 너무나도 소중하고 안전하며,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는 의미 있는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하고 싶은데, 이렇게 보웬 센터를 이용하던 중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위기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일전에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나는 모든 자율성을 잃었고, 그때의 기억으로 인해 다시는 병원에 가고 싶지 않았었다. 이런 내 상황을 듣던 보웬 센터의 활동가는 와일드플라워에서 운영하는 위기 쉼터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병원 외에 갈 곳이 있다는 점에서 큰 위안을 받았다.
덕분에 나는 Afiya Peer Respite에 머물며 위기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이용 인원이 모두 차 있어서 바로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모바일브릿저(동료지원인)가 입소 일주일 전부터 꾸준히 나와 소통하며 불안과 공포스러운 심정에 대해 털어놓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차가 없어 장거리를 이동하기 어려웠던 나를 위해 쉼터 입소 당일에는 모바일브릿저가 직접 데리러 와주었고, 나는 편안하게 쉼터에 들어갈 수 있었다.

▲ 스프링필드 보웬 센터 내 기부의류가 비치된 공간으로 한켠에 는 세탁기가 있어 옷을 세탁할 수 있다.
이곳도 보웬 센터처럼 게시판에 게시된 나의 권리들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 게시물을 보면서 나는 더욱 안도할 수 있었다. 위기를 겪을 때,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 덩어리가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사람들과의 연결을 끊어버리곤 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쉼터를 이용하는 것이 나의 권리라고 말해주는 게시판을 보며 ‘아 이곳은 나를 환영하는구나, 이런 나를 반겨주고 지지하는 곳이 있구나’라는 마음을 느꼈다. 실제로 쉼터의 활동가들은 입소한 나를 크게 환영해 주었고, 자신들의 역할이 나와 함께 머무르며(being-with) 지지하는 것임을 자주 말해주었다. 그 덕분에 나는 부담 없이 편안하게 쉼터 생활을 이어가며 충분하게 나의 위기 상황을 다룰 수 있었다.

▲아피야 하우스에 게시된 권리 목록
또 쉼터 지원 인력이 모두 동료지원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이미 안전함을 느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경험하고 있는 위기 상황에 대해 털어놓으며 충분한 위로와 공감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병원에서 약물이 강제됐던 것과 달리, 아피야 하우스에서는 오히려 내가 약물로 인해 느끼는 부작용에 대해서도 편히 이야기할 수 있었고, 약을 복용하는지 여부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뿐만 아니라 바깥 활동도 매우 자유로웠는데, 차분한 영화를 보며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 하는 나를 위해 모바일브릿저가 극장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기도 했다.
아피야 하우스에서 충분한 휴식과 안전한 위기 지원을 받은 뒤 퇴소할 시간이 다가왔는데, 잠깐이었지만 정이 든 쉼터를 퇴소하는 것이 퍽 아쉬웠다. 아피야 하우스에서 지내면 대부분의 당사자가 극심한 위기 상황이 완화되고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지만, 나처럼 퇴소가 가까워지면서 아쉬움을 느끼거나 다시 위기가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불안을 느끼는 경우들이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을 지원하기 위해 모바일브릿저는 퇴소 후 한 달 동안 꾸준히 연락을 취하며 다시 안정적으로 지역에 돌아갈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나 역시 퇴소한 날부터 모바일브릿저의 안부 연락을 받았고, 한 날은 보웬 센터로 직접 찾아와 시간을 보내주기도 했다.

▲ 아피야 하우스 1층 거실 공간으로 쉼터에 대한 안내문을 비롯해 이용자를 위한 책이나 악기들이 비치되어 있다.
보웬 센터와 아피야 하우스 모두가 와일드플라워에서 운영하는 곳이다 보니, 나는 이 공동체 안에서 더욱 연결됨을 경험하고 안전함을 느낀다. 앞으로 또 다른 위기가 찾아오더라도 이제는 병원에 끌려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까지 생겼다. 와일드플라워라는 단체가 있는 지역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참 다행스럽다. 예전에 홀로 낙담하고 고립되어 지냈던 나도 와일드플라워를 만나고 달라질 수 있었던 것처럼, 이런 서비스가 미국 전역을 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가길 늘 기대하고 있다.
아, 이 글을 보고 있을 사람들에게 새로운 쉼터도 소개하고 싶은데, 와일드플라워가 최근 세계 최초로 트랜스젠더 및 성소수자를 위한 쉼터를 개소했다. 바로 Anemoni LGBTQ+ Peer Respite라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히 수용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성전환 수술 이후 찾아오는 신체적인 고통을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회복할 수 있도록 리클라이너 의자 겸 침대를 갖추는 등 세심하게 공간을 구성했다고 한다.
지역에서 지내며 위기를 잘 다뤄냈던 나의 경험은 당사자 주도(peer-led) 모델이 왜 필수적이어야 하는지를 몸으로 깨닫게 해주었다. 억압이나 강제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해 주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당사자들이 잘 알고 있기에, 기존 제도에서는 볼 수 없던 새로운 시도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당사자 기반 모델이 미국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뿌리내려, 누구든 위기 속에서도 존엄과 선택권을 지키며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 Anemoni LGBTQ+ 쉼터에서 활동가들과 함께. 이곳의 활동가 는 퀴어 정체성을 갖고 있는 동료지원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
1) 해방정신보건연구회는 ‘정신적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사람들이 제도와 담론에 의해 억압받고 있는 현실에 대항하며, 우리 모두의 해방을 위해 토론하고 고민하는 지식공동체’이다. 이번 연수 참여자로는 이용표(가톨릭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김치훈(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소장), 배진영(애리조나주립대학교 Postdoctoral Researcher), 위은솔(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센터장), 이한결(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사무국장), 권재은(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총괄팀장), 유기훈(경북대학교 의과대학 조교수), 도여옥(대구재활센터 정신건강사회복지사), 정유석(관악동료지원쉼터 부센터장), 전아영(관악동료지원쉼터 활동가)이 함께 했다.
2) 미국 동부, 특히 메사추세츠주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당사자 기반(peer-led) 및 비 의료모델(non-clinical)을 지향하는 당사자 조직이 다. 동료지원뿐 아니라 교육 및 훈련, 옹호 활동을 전개하며 조직 구성원은 모두 살아있는 경험(lived experience)을 한 당사자이다. 2025 년 7월 기준, 약 75명이 활동 중이다.
작성자글과 사진. 위은솔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센터장 cowalk1004@daum.net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