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 때문이라고요? > 칼럼


장애 때문이라고요?

장애코드로 문화읽기 / 드라마 <프로보노> 3회·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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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프로보노> 스틸컷 ⓒtvN
 
“사회적 책임과 시대의 변화, 이런 거 놓치면 재미없죠.”
 
드라마 <프로보노> 속 대형 로펌 ‘오앤파트너스’의 대표 오정인이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사회적 책임과 시대의 흐름’, 이 드라마의 기획 의도를 함축하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국민판사’로 불리며 출세 가도를 달리던 강다윗이 뇌물 사건에 휘말려 판사직을 그만두고, 어쩌다 대형 로펌의 공익변호사가 된다. 드라마는 강다윗과 ‘프로보노’ 팀이 맡게 되는 공익 소송들을 통해 동물을 비롯해 장애인과 성소수자가 받는 권리 침해와 차별, 여성의 재생산권 등 불평등의 감수를 지향하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시대적 주제들을 내보인다.
 
이 과정에서 반려견의 짖음 방지 목걸이를 직접 착용해 보고, 판사와 변호사가 휠체어를 타고 버스와 도로를 체험해 보기도 한다. 또 퀴어 문화 축제를 비추며 사회구성원으로서 이들의 존재를 인식시키고 겪고 있는 차별과 어려움을 시각화한다. 다양화된 시대 변화와 사회적 책임 사이의 논쟁적 주제를 직접 목도하고 겪어보는 모습을 통해 당사자의 목소리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은 분명 의미 있는 지점이다. 문제는 오정인의 “재미없죠.”라는 끝말에 배인 가벼움(누구에겐 생존 문제)이, 풀어가는 과정에서 들켜버리는, 틀리고 낡은 인식들과 엮이면서 어긋나 버리는 방향성이었다.
 
왜 하나님을 고소하나?
영화 <가버나움>을 본 아이는 ‘자신을 장애인으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을 고소하겠다’라며 프로보노 팀의 ‘강다윗’ 변호사를 찾아와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의뢰한다. 영화 <가버나움>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이 에피소드(3, 4회)의 이 대목이 전하려 한 것은, ‘장애가 있어도 생명은 존엄하며 태어날 권리가 있다’는 근원적 명제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되묻고 싶어졌다. 전제가 ‘장애가 없어도’로 바뀌어도 자연스러운가를. 왠지 입에 착 달라붙지 않는다. 왜일까? 존엄이 애초에 장애가 없는 몸에만 자연스럽게 귀속되어 왔기 때문이다. 어떤 생명은 여전히 변론의 대상이라는 전제가 되풀이되는, 매번 존엄의 이유를 설명하고 설득해 입증해야만 하는 위치에 장애를 밀어 넣는 서사의 반복이며, 장애를 원죄적 관점으로 보는 연장일 뿐이다. 시작부터 위험했고 구차했다. 결국 이 소송은 성립할 수 없으므로 판결, 기각되지만, 강다윗 변호사는 고소인 김강훈을 출산한 웅산 병원을 상대로 태아 상태에 대한 고지의무위반과 여성의 재생산 권리 침해로 항소한다. 결국 장애를 가진 생명의 존엄성은 여성의 행복권과 충돌하며 또다시 저울질당한다.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연스럽게 약자 대 약자의 프레임으로 선회하며 존엄의 순서를 매기는 오만한 정서를 내비친 것이다.
 
△ 드라마 <프로보노> 포스터 ⓒtvN
 
‘학교 다닐 권리’의 존중이, 특수학교 설립?
우리나라는 성별, 장애, 건강 상태, 사회적 배경 등과 관계없이 모든 학생이 안전하고 평등하게 교육받을 수 있도록 ‘학교 다닐 권리’를 보장한다. 그 하위에 교육받을 권리, 건강권, 재해․환경적 장애극복을 보장하고 있다. 그러나 평등권인 이 ‘학교 다닐 권리’조차도, 장애를 가진 학생은 우선 “나 너희에게 피해 안 줄 테니 나도 함께 공부하면 안 될까?”(집 근처 학교들 대부분이 장애 편의 시설, 특수교사나 수업 지원인력 등이 미흡함)를 사전에 허락받아야 하는 불평등이 존재하며, 문제가 생기면 전후 사정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장애학생은 바로 아웃인 경우가 태반이다. 그래서 보이나, 보이지 않는 존재로, 하루 종일 구석에서 조용히 있어야 하며, 조금의 다른 행동이나 소리를 내면 비장애 학생들의 수업에 방해가 된다며 특수반으로 분리시키고, 체육뿐 아니라, 모든 수업에서도 ‘포함’이 아니라, ‘배제’가 기본 매뉴얼로 정착한 곳, 그러면서 너의 장애 때문이니, 어쩔 수 없다는 곳. 이것이 현재 우리나라 교육 현장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일들이라면 믿을까?
 
드라마는 이런 현실을 재현이라도 하려는 듯, 휠체어를 탄 강훈이가 어렵게 간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짝꿍을 좋아하는 마음을 들켜 온갖 폭언과 폭행을 당하며, 체육수업에서 배제된다. 그래도 눈엣가시였는지, 부모들이 항의로 결국 학교를 그만두게 한다. 바둑 게임 세계에서 강훈이는 ‘바둑천재’, ‘바둑고수’로 불릴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지만, 현실에서는 차별을 차별로, 부당함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무조건 자신이 잘못했고, 장애 때문이라는 말만을 거듭하는 아이였다. 아이의 이런 태도는 사회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와 시선, 비장애 중심의 사회구조와 무관하지 않음에도, 드라마는 ‘장애 때문’이라는 사회 통념의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강훈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다. 아들이 억울하게 학교로부터 자퇴 요구를 받는데도, 상대 변호사가 강훈이가 이런 소송을 하게 된 것도, 교육도 못 받는 열악한 환경에 방치되는 것도 어머니의 바르지 못한 생활과 우울증 때문이라고 인신공격하는데도, 그저 울고만 있다. 심지어 우울증을 들먹이며 1심을 담당했던 시각장애를 가진 판사의 어머니와 비교해 책망하는데도, “강훈이를 낳은 걸 후회하시죠?”라며 선 넘는 무례에도 한 번의 반박을 못 하고 눈물만 흘린다. 강훈이가 ‘장애를 가져서’, 자신이 ‘가출 팸 출신’이어서, 또 ‘자신이 잘못 살아온 업보’ 때문이라 보는 틀리고 낡은 세상 시선에, 동의하는 것인 양 말이다. 드라마 역시도 그저 극적, 감정적 요소로만 소비시킬 뿐이며, 이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 모든 순간 사회적 책임, 즉 학교나 교사의 외면과 회피, 사회와 복지의 개입과 지원의 부재 등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드라마는 우리 사회, 우리 대중의 장애인식과 방향을 대변하며 정조준하고 있었다.
 
드라마는 이 모든 문제와 갈등을 ‘통합교육의 한계’로 각인시킨다. 자연히 분리교육의 정당성과 합리화로 프레임은 전환되고, 이것의 해법으로서 특수학교 설립을 말하는 무리수를 둔 것이다. 물론 특수학교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이 지향점인 사회나 교육은 이미 불평등함과 부패함을 용인한 것이다. 이런 사회는 강훈이가 학교에서 당한 폭력과 배제, 그로 인한 피해들을 학생인권 침해나 비장애 학생 중심의 학교와 교육제도, 시스템에 의한 차별이 아니라, 그저 특수한 경우나 개인의 문제로 인식될, 그리고 모든 아이에게 동등하게 주어지는 ‘학교 다닐 권리’가 장애를 가진 아이에게는 조건부나 특혜로 전락하는 배경이 될 여지를 만든다. 이 드라마는 결국 장애를 가진 학생을 함께 공부할 권리를 가진 주체가 아니라, 다수의 학습권을 침해할 수 있는 위험 요소이자 분리교육의 정당화를 주장하는 이들의 근거를 재현시켰을 뿐이었다.
 
권리가, 시혜로 이식되는 현장 재현, 쳇바퀴 미디어를 다시 목도하다
결국 강훈 어머니의 죄의식과 모성애를 불러 와 특수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주민들 앞에 무릎을 꿇린다. 장애학생의 권리가, 선의와 배풂, 시혜로 이식되는 참담한 현장을 또다시 목도하게 했다. 우연히 이 장면을 목격한 피고 최웅산 회장은 재판정에 등장해 강훈어머니를 입양하겠다는 폭탄 발언을 하며 특수학교도 지어주겠다 한다. 그 순간 최 회장은 피의자에서 영웅으로 탈바꿈하고 졸지에 감동의 기립박수와 탄식으로 가득해진 재판정, 결국 웅산병원의 불법들은 은폐된다. 불법을 단죄가 아닌 면죄로, 장애학생의 ‘학교 다닐 권리와 자유’를 시혜로 이식하면서까지 특수학교 설립이라는 한쪽 면만을 향해 직진하는 것이다.
 
물론 이후의 강훈이와 어머니의 삶이 최 회장의 선의로 안전하고 편안해지길 바란다. 특수학교 하나가 설립되어 중증 장애 학생들이 교육받을 수 있는 공간이 늘어나는 것 또한 드라마지만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최 회장이 강훈이네를 지원해도 학교가 비장애중심의 인식과 구조라면, 휠체어를 탄 강훈이는 여전히 체육시간에 교실을 지키며 창문 너머 아이들을 부럽게 바라보고 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또한 비장애중심에서 설계된 도시에서는 여전히 강훈이뿐 아니라, 이동에 어려움이 있는 시민들은 학교와 건물, 도로를 자유롭게 거닐 수 없으며, 대중교통을 이용해 혼자 이동할 수 없다. 무엇보다 특수학교 설립 반대 역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개인의 선의와 자선에 기댄 해법에는 한계가 있으며, 한계가 있다는 것은 장애문제는 장애 때문이 아니라는 반중이다.
 
이 드라마는 애초에 장애가 있는 몸을 주신 하나님을 고소하며 장애를 전면에 내세우는 무리수를 두며, 장애를 개인 영역에 가두어온 기존 인식을 재현할 위험성을 안고 시작할 것이 아니라, 장애 때문이라며 사회적 책임을 회피해온 국가와 지자체, 장애차별을 은폐하고 조장해 온 언론과 미디어, 그리고 차별과 혐오를 일상적으로 재생산해 온 시민사회를 고소하는 사회 고발 서사였어야 했다. 그동안 장애를 가진 시민들이 감수하는 불평등은 장애를, 장애로 고착화하고,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학습시켜 온 사회와 교육, 시민사회의 역할이 컸으며, 특히 미디어의 역할이 컸다.
 
이 드라마 역시도 그 역할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장애 때문’이라는 억울한 꼬리표는 언제쯤 떼어질까?
작성자글. 백수정 대중문화비평활동가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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