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은 스스로 포용을 만들지 않는다
인권 / AI와 장애
본문
디지털 접근성은 왜 표준과 제도, 그리고 법이 필요한가
디지털 기술과 인공지능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모바일 서비스, 키오스크, 온라인 금융, 그리고 인공지능 기반 서비스는 이제 우리 사회의 일상적인 인프라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기술이 발전하면 자연스럽게 모두에게 편리한 사회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기술의 발전이 항상 포용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일상에서 이러한 장면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식당과 카페에서 흔히 사용하는 키오스크는 많은 사람들에게 편리한 도구이지만, 시각장애인에게는 이용이 거의 불가능한 기계가 되기도 한다. 모바일 금융 서비스 역시 빠르고 효율적인 서비스로 평가받지만, 화면 구조나 인증 방식이 복잡할 경우 장애인이나 고령자에게는 큰 장벽이 되기도 한다. 기술이 편리함을 만들어낸 동시에 새로운 격차를 만들어내는 장면이다.
최근 빠르게 확산하고 있는 인공지능 서비스 역시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음성 인식 기반 서비스나 챗봇 상담시스템은 많은 영역에서 인간의 역할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음성 인식 기술은 발음이나 음성 패턴, 언어 특성에 따라 인식 정확도가 달라질 수 있다. 특정 사용자 집단의 데이터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은 인공지능 시스템은 의도하지 않게 새로운 배제와 차별을 만들어 낼 가능성도 있다. 기술이 발전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포용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러한 사례는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보여준다. 기술은 스스로 포용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술은 단지 도구일 뿐이며, 그것이 누구에게 편리하고 누구에게 어려운지는 기술이 설계되고 구현되는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대부분의 디지털 서비스는 평균적인 사용자를 기준으로 설계된다. 그 결과 장애인이나 고령자, 혹은 다양한 사용 환경을 가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서비스 이용에서 배제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래서 디지털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기술을 설계하는 원칙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접근성 표준이다. 접근성 표준은 특정한 집단만을 위한 특별한 기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용자가 동일한 정보와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기술을 설계하는 기준을 제시한다. 웹 접근성 지침(WCAG)이나 모바일 콘텐츠 접근성 지침과 같은 접근성 관련 표준들은 이러한 원칙을 구체적인 기술 요구사항으로 정리하고 있다.
표준이 중요한 이유는 접근성을 개인의 배려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기준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만약 접근성이 단지 기업이나 개발자의 자발적인 노력에만 의존한다면, 어떤 서비스는 접근성을 고려하고 어떤 서비스는 그렇지 않은 상황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표준이 존재하면 기술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접근성을 고려해야 할 명확한 기준이 만들어진다. 이는 디지털 서비스가 특정 집단을 배제하지 않도록 하는 중요한 장치가 된다.
하지만 표준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표준이 방향을 제시한다면, 제도와 법은 그 방향을 사회 전체가 따르도록 만드는 역할을 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시행된 디지털포용법은 이러한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디지털포용법은 디지털 기술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정보 접근의 격차를 줄이고, 모든 시민이 디지털 환경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정책적 기반을 마련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최근 제정된 인공지능 기본법 역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인공지능 기술이 사회 전반에 확산되는 상황에서, 해당 법은 인공지능 개발과 활용 과정에서 안전성, 신뢰성, 그리고 사회적 책임을 함께 고려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특히 인공지능 기술이 특정 집단을 배제하거나 차별하지 않도록 하는 책임 있는 설계와 운영에 대한 논의는 앞으로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이러한 논의 속에서 접근성과 디지털 포용의 관점은 인공지능 정책에서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디지털 환경이 점점 더 필수적인 사회 인프라로 자리 잡은 지금, 접근성은 더 이상 선택적인 기능이 아니다. 행정 서비스, 금융 서비스, 교육 서비스, 의료 정보 등 많은 영역이 디지털 환경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서비스가 특정 집단에게 접근이 어려운 구조로 만들어진다면, 이는 단순한 불편을 넘어 사회 참여 자체를 제한하는 문제가 될 수있다.
이러한 이유로 접근성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권리의 문제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누구나 정보에 접근하고 사회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중요한 기본 권리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기술의 발전과 함께 표준과 제도가 발전해야 한다.
국제 사회에서도 이러한 논의는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디지털 기술이 국가 간 경계를 넘어 확산되는 상황에서 접근성 역시 국제적인 협력과 표준을 기반으로 논의되고 있다. 국제전기통신연합(ITU)과 같은 국제기구에서는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스마트시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접근성 요구사항을 표준으로 정리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은 특정 국가의 정책을 넘어 글로벌 디지털 환경에서 포용성을 확보하기 위한 중요한 기반이 된다.
또한 유럽연합(EU)에서 시행되고 있는 유럽 접근성 법(EAA, European Accessibility Act)은 모든 유럽연합가입국에게 디지털 서비스와 제품에 대한 접근성 요구사항을 법적 의무로 규정하며, 접근성을 시장과 정책 구조 속에서 구현하려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이러한 국제적인 흐름은 기술 발전이 포용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표준과 함께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기술의 발전 속도는 앞으로도 계속 빨라질 것이다. 인공지능과 자동화 기술이 확대되면서 우리의 일상은 더욱 디지털 환경에 의존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질문이 있다. ‘기술은 누구를 위해 만들어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기술은 스스로 포용을 만들지 않는다. 포용은 설계되고, 표준을 통해 구체화되며, 법과 제도를 통해 사회 속에 자리 잡는다. 디지털 사회가 진정으로 모두를 위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기술의 발전과 함께 이러한 구조를 함께 만들어 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정책 결정자, 기술 개발자, 기업, 그리고 시민사회가 함께 접근성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표준의 확산과 법·제도의 개선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려는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다. 접근성은 특정 집단만을 위한 과제가 아니라,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디지털 사회를 만들기 위한 사회 전체의 책임이자 권리이기 때문이다.
작성자글과 사진. 손 학 서울시장애인재활협회 회장 cowalk1004@daum.net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