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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는 영화 <타이타닉>을……?

장애 코드로 문화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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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는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다 (The Blind Man Who Did Not Want to See Titanic, Sokea mies, joka ei halunnut nähdä Titanicia, 2021).
감독 - 티무 니키, 출연 - 페트리 포이콜라이넨, 마르야나 마이야라 외.
핀란드 | 드라마 외 | 2022.03.10 개봉 | 12세 이상 관람가 | 82분
 
 
매일 꿈 속에서 달리는 남자가 있다. 달리다 연인의 전화벨과 알람 소리에 눈을 뜬 남자. CD 재생기에서는 그가 선택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커피 추출기에 원두 가루를 넣는 소리, 원액이 내려지는 소리에, 중독성이 강한 감미로운 커피 향이 집안 가득 감돌 것만 같다. 전화기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중저음의 매력적인 연인 목소리가 그의 공간을 메운다. 그의 아침은 이렇게 오롯이 그의 선택과 움직임에 의해 나는 소리와 향만이 존재한다. 누구나 맞고 싶고 꿈꾸는, 부러운 아침을 여는 남자, 그의 이름은 ‘야코’다. 화상 통화를 하자는 연인에게, “그건 불공평하지. 난 자기를 못 보는데?”라고 말한다. 이 영화를 못 보신 분들은 이 대답에서 야코가 시각장애가 있는 건가? 싶을 것이다. 그렇다. 야코는 난치병인 다발성 경화증으로 시각장애와 하반신 마비로 기동성에 장애를 가지게 된 남자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야코가 시각장애가 있음을 분명히 드러낸 첫 컷과 이어지는 신(Scene)들을 보면서도 대부분이 “저런 중증장애가 있는 사람이 혼자 사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해?”라고 ‘영화니까 가능한 일’이라는 전제가 깔린 물음을 던질 것이다. 장애가 덧붙여지지 않았을 때의 ‘야코’라는 남자의 근사하고 부러운 아침 풍경이 장애가 덧대어지는 순간, 불가능의 장애 프레임에 갇혀 이렇게 산산조각이 난다. 물론 이런 아침을 맞으려면 장면 장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비장애인들과는 조금 다르게 스마트폰의 음성지원과 휠체어, 활동지원서비스가 필요하고 조심성과 집중력을 조금 더 필요로 하며 속도가 느리다. 이를 불가능의 범주로 인식하는 것은 너무나 닫힌 사회의 닫힌 사고이며, 다양성을 무시하는 것이 만연된 멈춘 인식이지 않나? 당사자는 또 얼마나 억울할까?
 
 
이 억울함의 정체를 서툴게 꼬집다
 
이 영화는 한 남자가 먼 곳을 바라보는 몽환적인 포스터와 도발적이고 반항적인 제목에 이끌려 보게 된 영화였다. 감독과 배우, 제작사 이름이 올라가는 화면에 점자로 표기된 이름들이 먼저 올라와 놀랐고, 핀란드 글자로 표기됨과 동시에 이를 읽어주기까지 한다. 당연하지만 당연시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기에, 다양성을 존중하는 그들의 섬세함이 돋보이고 부러웠다. 순간적으로 혹시 먼 곳을 응시하던 포스터 속 그 남자가? 하는데, 첫 장면부터 속눈썹이 긴 그 남자의 눈을 길게 클로즈업시키며 시각장애가 있음을 인지시킨다. 마지막 한 신을 제외한 모든 신은 야코의 얼굴 외에는 포커스 아웃시켜 전체적인 배경이 안개 속인 듯 뿌옇다. 야코가 보는 세상과 관객이 보는 영화 속 세상이 같도록 연출한 것이다. 이 영화는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과 주인공의 장애를, 그리고 그의 삶을 정면으로 맞대어 놓고 조우하도록 한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조금은 답답할지 모르지만, 메시지와 연결된 독특한 연출이다. 그러나 서사는 올드하고 솔직히 거슬리고 불편한 장면과 에피소드도 많다. 이는 야코가 바라보는 세상과 그의 장애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으로 겪게 되는 불편함과 불평등, 차별을 빙빙 돌려 말하거나 미화시키지 않고 정면만을 담겠다는 감독의 의도로 읽히기는 하지만, 자칫 그동안 많은 작품이 범했던, ‘사람은 사라지고 장애만 남았다’라는 지적을 되풀이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앞선 것이 사실이다. 서툴고 영글지 못한 이야기들은 의도가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달리 해석될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 애인 시르파와 통화 중에 전화기를 떨어트려 주우려다 휠체어에서 떨어지는 장면, 엎어진 자세로 담당 복지사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장면이 연출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장애에 포커스 맞추는 연출) 참 오래도 우려먹는다 싶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런 경험이 많은 듯 야코는 아무렇지 않게 여기며, 전화가 너머에서 걱정하는 시르파를 안심시킨다. 야코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부를 수 있는 긴급출동 서비스를 요청하겠다는 시르파에게, 1시간 이상 걸린다며 활동지원사가 곧 올 시간이니 차라리 기다리는 편이 빠를 거라고 차분히 설명하는 야코의 모습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을지 짐작케 하고, 그의 대처 방법을 존중하게 한다. 그래서 오히려 보는 사람이 이성적으로 현실의 문제, 핀란드의 긴급출동 서비스의 문제점과 중증장애를 가진 야코에게는 24시간 활동지원 체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까지 연결해 생각해보게 한다.
 
이 외에도 연인이 당장 만나고 싶어도 담당 활동지원사의 일정이 안 되면 만날 수 없고, 활동지원사의 편견과 무시, 차별의 시선에서 비롯된 말들, 자기 얼굴도 본 적 없는 옆집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장애에 대해 멋대로 말하고, 심지어 “나 같으면 자살한다”라는 모욕까지도 당해야 하는 현실을 직설적이고 거침없이 전한다. 너무 거침이 없어 살짝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어떤 장면에서는 통쾌했고 시원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보인 야코의 태도였다. 시르파와 통화할 때 유머러스하게 정곡을 찌르는 말솜씨는 어디 갔을까 싶을 정도로 고개 숙인 과묵한 남자가 되는 것이다. 활동지원사나 옆집 사람들의 혐오와 무시, 인신공격성의 말들을 그저 자신이 겪어야 하고 감내해야 할 말들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넘어가는 모습은 공감할 수 없었고, 가장 걱정스러웠던 것은 장애에 대한 편견과 부정적인 인식이 보편적인 현실에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할지였다.
 
분명 감독은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 대한 세상의 시선과 인식을 그대로 옮겨와 ‘당신들(비장애인들)이 이래’라며 꼬집어주고, ‘당신들의 모습이 어때?’라고 되물으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야코와 같은 장애 당사자들이 잘못되고 틀린 것을 그냥 넘어 가면 이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지도, 생각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며, 잘못된 인식은 쌓이게 된다. 더욱이 현재 장애인식이나 인권 감수성 수준에서 표현되지 않은 것들까지 헤아리며 보는 관객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택시 두 번, 기차 한 번’이, 장애가 있는 야코에겐 왜 이리 어려운 것인가?
 
이 영화는 핀란드 영화다. 핀란드는 장애인복지정책이 간략한 나라로 유명하다. 이는 핀란드에서 장애인은 보호받아야 할 소수가 아니라, 정신이나 신체에 불편함을 가진 사람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인식이 공간, 교통, 노동환경 등 사회 전반에 녹아 있어서, 모든 것에서 장애인이기에, 혹은 장애로 인해서 특별하거나 소외되지 않는 생활환경을 지향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대중교통수단으로, 우리나라 서울의 주요 교통수단이 지하철이라면, 핀란드 헬싱키의 주요 교통수단은 트랩이다. 이곳의 트랩은 휠체어를 타거나 유모차와 동반하거나, 이동 보조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안전하고 편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모든 공간이 넓고, 트랩과 트랩 사이 정류장에 턱이 없어서 타고 내림이 자유롭다고 한다. 버스 역시 모든 버스가 저상이고 내부 바닥이 이동하기 편하도록 비스듬히 되어 있으며, 결정적으로 휠체어나 유모차 등을 탄 사람들이 타고 내리는 동안 버스 안에 어느 누구도 눈총을 주거나 불평하지 않고 기다린다는 이야기는, 우리나라와 너무 대조적이어서 들을 때마다 부럽고 인식의 중요성이 새삼스레 새겨진다. 핀란드에서는 교통수단뿐 아니라, 모든 시설이 ‘모두에게 불편함이 없는 공간’을 지향한다고 한다. 그래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이동을 기준으로 공간을 설계하고 결국 이것이 유아부터 노인까지 ‘모든 사람에게 최상의 공간’, ‘모두를 위한 공간’을 만드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영화 속 야코의 현실은 이곳이 핀란드가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르다. 야코의 연인 시르파는 혈액암을 앓고 있는데, 통화 중 의사가 치료 약을 쓰면 죽을 수도 있다고 했다며 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울고 있는데, 당장 뛰어가 안아 주고 함께 있어 주고 싶은 건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러나 야코는 이조차도 활동지원사의 일정을 우선 생각해야 하고 용기를 내 혼자 가겠다 하면 온갖 걱정을 들어야 한다. 만류하는 활동지원사에게 택시 두 번과 기차 한 번만 타면 되는, 어린애도 갈 수 있는 곳이라 말하지만 “어린애는 앞이 보이지요”라며 어린애보다 보호받아야 함을 재차 확인시키는 대답만이 돌아온다. 이렇게 의지와 자존심을 밟아버리며 만류하는 가족들이나 주변인들을 설득해 허락받아야 하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나가기 전에 진이 빠져 포기하고 싶지만, 결국 아무도 모르게 혼자 애인을 만나러 가기로 결심을 한 야코. 장애인 콜택시를 불러 타고 “Freedom!!”을 몇 차례 외치며 해방감에 감격해하는 모습은 나도 모르게 묘한 카타르시스와 동지애를, 그리고 연대감을 다지게 했다. 그러나 비장애인 중심의 세상에 혼자 나온다는 것은, 그것도 처음 가는 낯선 길에서 낯선 사람을 소리와 촉감만으로 만난다는 것은 극도의 두려움과 공포를 감수해야 하며, 그 공포감이 어느 정도인지 야코의 눈빛과 행동에서 역력히 보인다. 이런 사람을 이용해 돈을 훔치려고 납치와 협박을 하는 세상과 사람들, 이런 극단적 상황과 올드하고 다소 작위적이기까지 한 전개를 통해, 이 영화는 무엇을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일까?
 
야코의 말처럼 어린애도 갈 수 있는 그곳. 고작 택시 두 번, 기차 한 번만 갈아타면 갈 수 있는 그곳을, 성인인 야코는 왜 ‘천신만고 끝에’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목숨까지 위협받는 여정이어야만 하는 것인가? 영화는 다수 중심의 세상에서 다수 중심으로 설계된 도시, 그 속에 설계된 다수만을 위한 건물들과 공간들도 문제지만, 이런 세상을 만든 다수 중심의 인식과 사고, 이들이 다양한 이유로 소수가 된 이들을 인정하지 않는 편협함이 문제의 본질임을 세련되지 않은 화법과 연출로 말하고 있다. 핀란드처럼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이동하고 교육받고, 노동이나 생활환경에서 비장애인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며, 불편함을 최소화하기 위해 고민하고 연구하는 나라에서조차도 이런 영화가 만들어진다? 소수 특히 장애가 있는 사람에 대한 보편적 인식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되는 지점이지 않나?
 
 
덧붙임
 
이 영화는 주연 배우인 ‘페트리 포이콜라이넨’의 의지로 만든 영화라 한다. 그는 실제로 주인공 야코처럼 다발성 경화증으로 시각장애와 지체장애를 가진 배우다. 영화는 허구였지만 영화 속 그의 연기는 그 자체가 야코였다. 같은 장애가 있는 배우가 표현하는 행동 하나하나, 감정 하나하나만큼 실제와 같고 진정성 있는 연기가 또 있을까? 이 영화는 그의 연기와 그가 느끼고 겪는 불편함과 세상의 불평등한 시선에서 비롯된 차별이 볼 가치를 만들어냈다.
 
우리나라 영화나 드라마에서 장애를 가진 배우가 출연했던 작품을 떠올려보면 2014년 드라마 <갑동이>에서 주인공 ‘하무염’의 아버지 ‘하일식’을 연기한 ‘길별은’ 배우가 떠오른다. 당시 이 배우의 연기는 진정성이 느껴져 인상적이었다는 반응이 많았다. 그러나 그가 그외에 출연한 영화로는 두 작품이 전부였다. 이렇게 장애를 가진 배우가 활동하기 어려운 것은 결국 인식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 연기를 어떻게 해’라는 인식.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인식’ 무엇보다도 비장애인이 연기로 커버할 수 있다는 오만과 착각이 장애를 가진 배우의 연기 활동에 제약과 배제의 차별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장애를 가진 전문배우가 연기하는 장애캐릭터들을 보면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일상적으로 장애캐릭터를 구현해내는 스토리텔링과 다양한 인물들이 출연하는 드라마나 영화들이 많아져야 함은 물론이고, 인식이 낮다면 권고와 의무규정으로 인식을 끌어올리는 방법도 있다.
 
실제 미국은 흑인배우를 반드시 출연시켜야 하는 쿼터제가 있고, 영국은 장애를 가진 방송인, 배우, 스텝 등을 교육시키고 대중예술인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제도화시켜 보장하는 ‘BCDIN’이 있다. 실제로 이 규정들과 제도들이 흑인이나 장애인들의 예술활동을 보장해주고 있다. 미국과 영국은 현재 다양성을 가진 대중문화 예술인들이 드라마나 영화, 다양한 TV 프로그램에서 보편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고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다양성을 인정해야 함은 당연하고도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다. 우리나라 대중문화와 예술계도 다양성을 가진 예술인들을 인정하고 이들의 활동을 보장하기 위한 방법들을 고민하고 실천해야 할 때다. 
작성자글. 백수정/대중문화 비평 활동가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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