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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일상을 살아야 한다

여기는 스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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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 없었으면 난 장애인
저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안경을 쓰고 있습니다. 눈이 매우 나빠서 안경을 맞출 때 렌즈를 몇 번 압축해야 합니다. 안경을 벗으면 눈 뜬 장님이 되기 때문에 물놀이를 하는 날이면 컨택트 렌즈를 껴야 합니다. 그런데 불편함 없이 종일 끼고 있을 수 있는 컨택트 렌즈를 찾는 데에 요즘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부득이하게 안경을 끼고 물놀이를 해야 하는 날은 제대로 물놀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안경에 물이 튀는 건 당연하고, 안경을 벗고 들어가면 제대로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마다 만일 안경이 대중화되지 않은 시대에 태어났다면 시력 때문에 장애인으로 불렸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직접 요리하는 것도, 운전하는 것도 불가능했겠다 싶습니다. 어쩌면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거나 2세 계획을 세우는 데에도 주변의 우려가 앞서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라는 상상도 해 봅니다. 책을 읽을 수 없으니 교육을 받는 데에도 정규 교육 과정에서 제외되었을 거란 상상도 합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를 살고 있는 저는 안경이라는 도구를 일상에서 사용할 수 있으므로 장애인이 아닙니다. 이렇게 시대를 뛰어넘는 상상은 사실 공간을 뛰어넘을 때도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올여름 한국에서 보낸 한 달이 그랬습니다.
 
최적의 편리함 속에서 빠져있는 것들
대형 아파트 단지와 쇼핑공간, 넓은 대로가 펼쳐진 도시가 한국의 대표 이미지입니다. 어느 지인의 말처럼 한국은 굉장히 빨리 발전하고 편리한 곳이 되고 있습니다. 휴대전화 하나로 돈을 지불하고, 택시를 부르고, 음식을 주문하고, 병원 방문을 예약하고, 지인과 대화가 가능합 니다. 외부 날씨에 상관없이 적절한 온도를 맞춘 실내에서 편리하게 누군가를 만나고 쇼핑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직 매우 중요한 몇 가지가 빠져있습니다. 지적장애인이나 어린이, 노인, 유모차, 휠체어가 그들입니다. 그토록 최적의 편리함으로 채워진 장소가 사람을 만나고 쇼핑을 하는 데에 그들에게 더 적절할 텐데 말입니다. 어느 백화점에서 만나 담소를 나눈 한 장애인 분야 전문가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백화점까지 오는 길이 그들에게는 쉽지 않고, 정작 오더라도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하다는 것입니다.
 
집을 나서면 턱이 높거나 경사가 심한 인도, 건물 출입구가 그 첫 번째이고, 물리적으로 휠체어나 유모차가 타기 힘든 대중교통이 그 두 번째입니다. 외출을 하기 전에 행선지까지 오가는 여정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거리가 멀어집니다.
 
행선지까지 가는 길에는 행인의 도움이나 적절한 무관심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젊은 엄마가 유모차에 누워 우는 아기를 달래는 것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관심을 돌릴 필요가 있습니다. 엄마가 편안한 마음으로 아기를 달래야 하니까요. 또는 유모차가 안전하게 저상버스에 올라갈 수 있도록 행인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휠체어를 탄 사람이 혼자서 타고 내릴 수 있는 대중교통 수단도 필요하고, 먼저 탈 수 있도록 다른 이용객이 기다려주는 여유도 필요합니다. 스스로 이동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니까요.
 
대중교통 X, 도보 가능 성인 교통수단 O
아, 그러고 보니 저상버스가 필요하네요. 유모차도, 휠체어도, 목발을 짚은 사람도, 어르신도, 어린이도, 반려견을 동반한 사람도, 심지어는 꽉 끼는 치마를 예쁘게 차려입은 젊은 여인도 모두 손쉽게 탈 수 있는 그런 저상버스, 저상기차도 필요하네요.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성인에게만 맞게 디자인된 대중교통이 아니라, 남녀노소, 장애 여부에 상관없이 누구나 탈 수 있는 그런 대중교통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는 ‘대중교통’이 아니라, ‘도보 가능 성인 교통수단’이 되겠네요.
 
한국의 저상버스 도입이나 저상고속버스 운행에 대한 논의는 많았지만 아직 현실과는 멀어 보입니다. 한국에 장애인, 어린이, 노인 인구가 특별히 적은 것은 아닐 텐데 말이죠. ‘대중’이라 함은 대량 생산, 대량 소비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 사회를 구성하는 대다수의 사람을 말하며 엘리트와 상대되는 개념으로, 수동적, 감정적, 비합리적인 특성을 가진다고 정의되어 있습니다(네이버 국어사전). 사회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사용 가능한 교통수단이 바로 대중교통이며, 전체의 비용 효율성에 떨어지더라도 최대한 다양한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최대한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를 만나고 섞여야만 합니다.
 
가장 중요한 자원은 사람
왜 유모차를 미는 젊은 엄마와 아기,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 반려견을 동반한 사람들이 더 대중 시설에서 보여야 하는 걸까요? 타인에게 소음, 기다림의 불편함, 심지어는 시설, 설비 교체 및 유지보수로 인한 세금 부담이 늘게 되는 결과를 떠안게 되면서까지 말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람이 가장 중요한 자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이나 형평성에 대한 담론은 이미 지난 몇십 년 동안 거론되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한 사회의 존립과 경제상황에 대한 손익을 따져봐야 할 때입니다. 한국은 인구감소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출생한 인간 한 명 한 명의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비용 효율성이나 외모 논란, 장애 여부 등을 따질 때가 아닙니다.
 
 
 
 
출산율이 급격히 떨어지는 지금 노키즈존에 대한 담론이 아니라, 유·아동의 일상 독립성 교육을 위해 유·아동이 보호자와 다양한 장소에 갈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야 합니다. 장애인의 이동권에 대한 요구가 언론매체에 악에 받친 장애인의 모습이나 대중에게 불편함을 가져오는 이기적인 이익단체로만 비치지 않고, 그들의 자유로운 이동으로 인한 교육과 고용 가능성에 대한 요구로 비춰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도, 다운증후군 배우 정은혜도 더 많이 나와야 합니다. 장애는 위궤양이나 감기 같은 단순히 진단명에 그쳐야 합니다. 그들이 한국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이나 가족만의 노력 외에도, 일상생활이 가능한 환경이 있어야 합니다. 한국은 지금 장애 여부에 따라 사람을 가릴 때가 아닙니다.
 
장애인학교가 우리 동네에 들어온다고 해서 막을 것이 아니라 환영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동네의 도보 환경이 누구에게나 편하게 다닐 수 있는 곳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건물 유지보수, 교육 보조인력, 식당 인력 등 지역사회에 다양한 일자리가 제공되기 때문입니다. 길거리 안전과 일자리 제공이 가능한 지역사회는 우리 모두가 원하는 생활환경 아닌가요?
 
취리히 미술관에 앉아서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미술관 입구 건너편 버스정류장에 유모차를 밀고 온 엄마 둘이 버스에서 내립니다. 제 옆에는 반려견을 데리고 나온 할머니 한 분이 커피를 마시고 있고, 좀 전에는 휠체어를 탄 여성분이 미술관 입장 티켓을 구매하고 지나갔습니다. 신체조건이나 장애 여부, 동반자 여부와 상관없이 본인의 일상을 살 수 있는 환경은 이 사회의 인프라와 대중 인식,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책이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장애가 장애로 남아 온전히 타인의 도움을 받기만 하는 사람을 양산할지, 아니면 장애를 비장애로 만드는 장치를 통해 자립이 가능한 사람을 키워낼지는 온전히 우리의 선택입니다.
 
 
작성자글. 황효빈/스위스 사회복지사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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