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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목소리

느림보 엄마의 성장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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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부모이다. 세 아이 중 둘이 자폐성 장애가 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서희는 우리 집 둘째다. 얼마 전 서희의 담임선생님과 학기 말 상담을 했었다. 선생님이 말씀해 주시는 서희의 모습이 낯설고 신기하고 기특했다. 친구들이 울고 있으면 다가가서 안아주고 등을 두드려 주고. 싫어하는 것도 참고 끝까지 하는 모습이 예쁘다고.
 
서희가 부족한 부분도 많을 텐데 장점을 골라서 이야기해 주시는 것, 강점을 중심으로 서희를 보고 있다는 점이 너무 감사했다. 또 부모로서 가장 염려하는 부분인 독립과 취업에 대한 부분도 선생님의 경험에 비추어 자세히 설명해주시고, 지금처럼 서희가 교육 을 꾸준히 받는다면 적절한 도움을 받아 이룰 수 있으리라 말씀해 주셨다.
 
상담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서희와 보낸 지난 시간이 떠올랐다. 서희가 자폐 진단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자폐성 장애인 것만으로도 앞이 깜깜한데 서희는 그중에서 도 중증이다. 월 200만 원이 넘는 돈을 3년 넘게 쏟아부었어도 서희에게 별로 변화가 없었다. 어떤 치료사들은 치료 효과가 보이지 않는 서희가 부담스러워서 치료를 먼저 포기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어린이집에서는 거절당했고, 받아준 곳에서도 언어적 표현이 어려운 서희가 ‘소리를 지르거나 우는 것을 받아주기 힘들다’라는 말을 여러 번 들어야 했다.
 
기관과 사설 센터에서 거절당하는 일을 자주 겪으면서 이 사회에는 서희와 내가 설 자리가 없다고 느꼈다. 지금도 이렇게 거절을 많이 당하는데,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이 거절당하게 될까. 서희는 장애가 있어서 하나를 배우려면 더 많은 기회가 필요한데, 이렇게 매번 거절당한다면 어떻게 배우고 성장할 수 있나. 아무 곳에서도 서희를 받아주거나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나 혼자만의 힘으로 서희를 건강하게 키울 수 있을까.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극심한 고립감 속에서 서희를 볼 때마다 불안과 부담이 쌓여갔다. 마치 서희가 아무리 물을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밑 빠진 독 같은 존재로 느껴지기도 했다. 몸은 기계적으로 움직여서 살림하고, 아이들을 돌보고, 서희의 치료 일정에 맞춰 왔다 갔다 했지만, 마음은 차게 얼어서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있던 시기였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서 여느 때와 같이 빨래를 널러 베란다로 나가는데,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니 뛰어내 리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거다. 살던 집에 18층이었는 데, 여기서 뛰어내리면 다치지 않고 확실하게 죽을 수 있겠다 싶었다. 죽겠다는 생각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하고 있다니. 내가 지금 제정신이 아니구나. 뭔가 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할 때 보았던 유방암 환우회가 떠올랐다. 나는 지금 암에 걸린 것만큼 인생을 좌지우지할만한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이 위기를 혼자서 이겨내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렇다면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 같이 이겨내 보면 어떨까. 환우회 분들처럼.
 
가입해 있던 네이버 ‘거북맘’ 카페의 지역 게시판에 당장 글을 올렸다. 내가 사는 고양시에 내 또래의 발달장애 아이를 키우는 부모님이 있다면 만나고 싶다고. 아이들도 친구를 만들어주고, 우리도 서로 마음을 나눠 보자고. 생각보다 많은 부모님이 만나자고 댓글을 달아 주셨고, 그렇게 발달장애 아동을 키우는 엄마들의 자조모임을 시작했다.
 
혼자 아이를 데리고 다닐 때는 아이의 독특한 행동 때문에 쏟아지는 시선에 숨이 막혔는데, 여러 명이 함께 다니니 그런 시선을 받아도 덜 동요하게 되었다. 아니, 사실은 우리끼리 수다 떨기 바빠서 시선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아이들 키우면서 받은 스트레스를 수다로 풀고, 유용한 정보들은 나누고, 비장애 아이만 키우는 엄마들이 보면 잘 모르겠지만, 천천히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의 성장을 서로 칭찬해주고…. 그런 시간을 몇 년 보내니 마음이 매우 튼튼해졌다.
 
 
내 마음이 건강해지니, 할 수 있는 일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우선은 공부를 시작했다. 서희가 자폐성 장애 진단을 받은 병원에서 들은 말은 특수교육의 개입이 들어가야 하고, 주 20시간 이상하면 좋다는 말이었다. 특히 ABA(Applied Behavior Analysis) 치료를 받으면 도움이 많이 될 거라고 했다. 그런데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하려면 치료비로 월 300~400만 원 정도는 써야 했다. 집 팔고 전세에서 월세로 갈아타면서 하는 집도 있다고는 들었는데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우는 것만 해도 힘든데, 가난해지기까지 하면 얼마나 더 힘들겠어. 그래서 그냥 내가 배워서 해주면 되지 뭐, 난 뭐든 새로운 걸 배우기 좋아하니까’ 하는 마음으로 ABA와 관련된 학과에 편입했다.
 
그런데 자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ABA에 관한 공부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아동의 발달, 자폐성 장애를 포함한 발달장애의 특징, 특수교육 전반에 관한 것들을 두루두루 공부하게 되었다. 공부할수록 내가 모르는 부분이 아직도 많다는 것을 느껴서 막막하기도 했다. 그래도 아이에게 무엇을 해 줘야 할지 몰라 무력감을 느끼며 삶을 견딜 때보다는 모든 것이 쉬웠다. 그리고 내가 놓치고 있던 부분을 파악하고 서희의 행동을 점점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어 행복했다.
 
그동안 나는 서희가 말을 못 하기 때문에 나는 “말하는 것”에만 집착하면서 아이가 눈빛과 표정,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들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그런데 그런 단서들을 놓치지 않고 반응해 주니 그 다음부터는 서희와 나 사이에 소통이 이루어졌다. 서희는 더 많이 표현하고, 나는 더 반응하고. 몸은 가까이 있어도 마음은 서로 다른 차원에 있는 느낌이었는 데, 이제 비로소 서희와 내가 한 공간에서 함께 있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아마도 서희는 내가 반응하지 않았던 많은 순간에도 계속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거는 말에 대답하지 않고, 슬프고 우울한 표정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엄마 곁에서 아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새삼 눈물이 난다. 엄마니까 조금만 힘내자고 생각하면서 버텨왔던 시간이, 실은 내가 자랄 때까지 서희가 기다려 준 시간이었다.
 
서희가 하는 모든 행동은 의미가 있다. 서희가 어떤 상황에서 반복적인 행동(상동행동이라고 보통 표현한다)을 할 때는 보통, 낯선 자극이 너무 많아서 스스로 진정시키기 위해서일 때가 가장 많고, 졸리거나 피곤해서 스스로를 깨우기 위해서다. 힘들거나 피곤하다는 표현을 한 셈인데, 아이를 쉬게 하기는커녕 행동을 그만두라고만 했으니 소통이 될 턱이 있나. 그런 상태로 몇 년을 보냈으니 서희가 얼마나 답답했을지…. 그저 미안할 뿐이다.
 
지금도 서희와 나 사이에 소통이 완벽하지는 않다. 서희가 먹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을 표현할 때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서희의 몸짓만으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그래도 사진이나 그림을 통해 고르게 한다든지, 또는 실물을 앞에 두고 고르는 식으로 서희가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나는 서희가 특정한 분야에 재능이 있는 사람, 인지능력이 뛰어난 자폐인으로 키우는 것은 자신이 없지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열심히 키우고 있다. 아니, 그런 사람으로 서희가 열심히 자라고 있다.
 
앞으로 나는 서희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더 많은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고, 외칠 생각이다. 따뜻한 눈길과 마음으로 서희와 같은 자폐인들의 목소리를 들어 주려는 이가 많아졌으면 그네를 타며 웃고 있는 서희의 모습 좋겠다. 
 
작성자글과 사진. 이정화 자갈자갈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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