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3주년을 맞으며] "어떻게"에서 "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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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불평등 구조에 대항하는 모습이 우리 연구소 초기의 분위기였다. 특히 장애문제 등 소외문제에 대해서는 그 정도가 심했다고 기억된다. 우리 연구소가 왜 존재하는지, 왜 장애운동을 하는지, 나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든 현상에 대해 본질적인 물음을 했다.
월간 "함께걸음"을 발행하는 의미도 당위적이었다. 얼마나 많은 재정이 투입될 것인지, 이 잡지를 받아 보는 독자의 취향에 맞는 편집인지, 혹시 광고를 싣고 있는 기업의 홍보효과는 있는지, 잡지를 계속해서 발행할 수 있는 이러 저러한 조건을 갖추는데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당시 우리 장애문제를 일반언론이 왜곡하고 있다는 점에서, 너무 불쌍하고 이상한 존재로 부각시킨다는 점 때문에 우리의 시각을 가지고 우리의 문제를 올바르게 알려낼 수 있는 대량생산체계가 필요하다는 오직 한가지 이유 때문에 매년 아파트 한채를 팔아 치웠다. 현재의 외형을 갖춘 잡지로 변신하기까지 거르지 않고 발행할 수 있었던 힘은 재정문제를 문제삼지 못 할만큼 장애를 가진 독자들의 열화와 같은 반응이었다. 한달에 단돈 천원을 낼 수 없을 만큼 가난한 독자였지만 우리 운동 방식을 적극 지지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속에 속해 있는 이상 자본의 논리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원하는 모든 장애우 독자들에게 책을 무료로 보낼 형편이 되지 못했고, 무가지를 더 이상 고집할 수 없었다. 광고를 유치하기 위해서 64페이지 교과서 크기의 얇고 조그만 책자에서 두배나 큰 크기의 판형으로 바꿨고 유가지로 전환했다. 그리고 장애관련 주간신문 등 다양한 매체가 생겨나면서 함께걸음이 누려왔던 독점적인 지위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 저러한 변화된 상황은 함께걸음을 왜 발행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할 수 없게 했다.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예산으로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갖가지 방법들을 생각해야 했다.
오늘 함께걸음의 모습은 창간 십삼주년 146호다. 십여년전의 분노는 없지만 작은권리찾기는 계속되고 있다. 새로운 법제도를 요구하는 모습은 없지만 전문적인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요구는 자주 등장한다. 장애우를 짐승 취급하는 시설을 고발하는 기사 찾기는 어렵지만 시설 내에서의 성폭력문제, 시설의 개방화, 사회화를 주장하는 글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사회적인 잦대로 보면 성공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나름대로 소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평범한 장애우들의 삶의 진솔한 향기를 느낄 수도 있다.
다만 아직도 생존권의 위협 당하고 있는 장애우들이 있고, 일할 기회가 영원히 올 것 같지 않아 방황하는 청년 장애우들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결혼해서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고민에 고민을 더하고 있는 여성장애우들의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릴 것 같은 절망의 상태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통합교육을 반대하지는 않는다면서도 일반교육현장에서 뇌성마비장애학생에게 특수학교로 전학할 것을 강요하는 교장선생님의 당당한 목소리가 현장에서 끊임없이 들리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러 저러한 삶의 현장에서 우리 장애우들에게 가해지는 여러 형태의 차별은 계속되고 있음을 알려야 한다.
이제 함께걸음은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왜 함께걸음을 만드느냐"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분명한 이유를 찾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해대야 한다. 여기에 하나의 바람을 덧붙이면 컴퓨터만 켜면 모든 사람들이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함께걸음을 볼 수 있었으면 한다. 이글을 끝까지 읽으신 독자중에 웹진을 만드는데 지원해주실 분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글/ 김정열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장,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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