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우들이 만든 제품을 우리 브랜드로 수출하는 것이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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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EM방식이 아닌 고유브랜드로 세계시장 진출이 꿈
전남 순천에는 신발을 만드는 장애우 복지공장이 있다.
순천장애우복지공장은 아세실업의 지원 아래 99년 5월에 설립된 신발생산 공장이다. 현재 이곳에서는 20여명의 중증장애우를 포함한 50여명이 자립의 꿈을 키우고 있다. 순천에 희망의 나무를 심은 장본인은 아세실업 대표 송정우 씨. 장애우들의 고용창출과 사회진출을 적극지원하고 있는 송정우 씨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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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천장애우복지공장 |
"제가 처음부터 장애우 복지공장 일에 뜻을 세워서 한 것은 아닙니다. 진행하다보니까 여기까지 왔고 일을 하면서 더더욱 관심을 갖게 된 상황입니다. 저와 동역자 한 분이 있는데 그분이 10년 전 아주 큰 교통사고를 당해서 거의 전신마비 상태입니다. 그 분은 신체적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사업을 일으켰는데 같이 일하면서 가급적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경험들이 좀 있고.....
그 다음에 계기가 있었습니다. 순천 쪽에 장애인 2, 30명이 모여 일을 했는데 1년 이상 일이 없어 노는 상태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봤죠. 가서 사람들 만나 보고 대화도 나눴는데 표현이 좀 그렇지만 사람들이 의기소침해 있고 안됐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무언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경험과 지식, 능력을 접목하면 도와줄 수 있는 길이 있겠다 싶어 결단을 내려서 장애인복지공장을 시작했습니다."
- 장애우 공장 얘기는 뒤에 한 번 더 해주시고. 아세실업은 언제부터 시작하셨습니까?
"86년에 설립했습니다. 30대 중반이었죠. 군대 제대 후 LG (럭키화학)에 입사했습니다. 그 당시에 일을 참 열심히 했습니다. 신앙인이라 하면서도 일요일에도 밤낮없이 일하고 그래서 능력을 인정받고 승진을 했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몸이 아팠어요. 그래서 이거 안되겠구나 해서 회사를 그만 두고 기도원 가서 금식 기도를 하면서 신앙으로 극복했습니다.
그 후에 다시 회사로 돌아왔지만 퇴사하고 신발업계에 투신했습니다. 비하인드 스토리인데 아세실업을 만들기 전에 한 1년간 화승 나이키에서 신발 일을 배웠습니다. 사업초창기에는 수출 위주로 무역을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 신발재료업 사업을 했고 산업자체가 점점 인건비가 올라가서 경쟁력이 떨어져 베트남, 중국 등지로 진출하는 과정을 거쳐왔습니다."
- 그러니까 늘 남 밑에 있으시기보다는 무언가 할 생각을 하셨군요. 대개 대기업에 들어가서 승진하고 하면 끝까지 가야지 하기 마련인데.
"제가 무언가 일 벌리기를 좋아합니다. 제 안에 어떤 것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내도 그런 말을 하는데 그렇다고 볼멘소리 하는 게 아니라 격려도 해 줍니다. 어쨌든 국내 유통 일도 하고 해외에도 진출하고 하는데 저희는 앞으로 더 큰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언제까지나 남의 상표를 붙여 생산하는 게 아니라 이제는 우리 브랜드로 해외시장을 개척해 나갈 생각입니다."
하드웨어 지원보다는 세계시장 마케팅, 판매에 대한 지원이 실질적입니다.
- 그런데, 고유 브랜드로 세계시장에 성공한사례가 있습니까?
"불행하게도 우리나라 신발업계가 아주 잘 나갈 때도 프로스펙스, 르까프 등이 세계시장서 최고라 했지만 만족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자만은 아니지만 저희가 우리 신발업계에서는 리더라 할 수 있는데 저희가 그 길을 뚫고 나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적어도 80,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운동화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우리가 세계 넘버원이었습니다. 불행히도 신발업계 종사자들이 이를 활용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기본이 있으니까 다시 세계 최고가 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이제는 얼굴없는 1위가 아니라 양적, 질적으로도 세계 최고가 된다는 믿음을 갖고 성장할 것입니다. 정부에서도 요즘 부산이 어렵다니까 지원책을 강구하고 있고 신발 정책에 많은 배려를 하고 있지만 제 시각에는 공단 분양 지원이라던가 하드웨어 쪽에서 지원을 많이 하는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세계시장서 어떻게 마케팅하고 판매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 사진을 보니 500만불 수출탑을 받은 것이 93년이었군요?
"저희가 5백만불 수출탑을 받은 것이 93년이었고 94년에는 1000만불이었고, 1000만불에서 다시 2천만불을 이루기까지는 5년이 걸렸습니다."
-총 매출액은 어느 정도 됩니까?
"300억에 육박합니다. 단위 업체까지 다 포함한 것입니다. 그리고 직원은 150명 정도인데 거래 업체까지 따지면 더욱 많습니다."
-결과적으로 직장 생활은 안하신 게 잘 된 것 같습니까?
"반은 잘 돼고 반은 안된 거 같습니다.(웃음) 개인적으로 저도 하고 싶은 일이 많습니다. 글도 쓰고 싶고 히말라야 트래킹도 하고 싶고, 여행도 다니고 싶고 한데 개인적인 시간이 나지를 않습니다. 많은 식구들과 함께 일한다는 책임감과 중압감이 큽니다. 잘해야 할텐데 나만 바라보고 일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라고 생각하며 짓눌리고 있습니다. 집에 돌아가다 보면 집 옆에 포장마차가 하나 있는데 술을 못해서 들어가진 않지만 문득 포장마차 주인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포장마차 주인이야 포장마차에 쌓인 음식만큼의 고민이 있지 않겠습니까?"
아이들이 너무 약해 일부러라도 고생할 계기가 있어야 합니다.
- 사업에 대해서는 어려서부터 생각이 있었습니까?
"그런 건 아니었고 어려운 환경서 자랐습니다. 부모님이 농사를 지으셨고 형제가 8형제나 되다보니까 학업조차도 계속 올라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도 다행이 진학해서 장학금을 받고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사업 생각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 그때야 생존이 문제가 아니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애들을 낳고 가르치며 느끼는 것은 아이들이 어려서는 어려운 환경에 노출도 되어보고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 있어야 할텐데 우리 애들은 너무 약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고생할 계기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 공감이 되는 얘깁니다. 저희 연구소에도 가끔 전화가 옵니다. 애들이 너무 자기중심적이라 계속 고생시키는 건 아니지만 하루, 이틀 극단적 고생을 시켰으면 하는데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없느냐고 문의를 해옵니다. 그래서 우리 장애아동가족지원센터에서 하는 장애아동 캠프를 소개해서 아이들이 정신지체 아동을 도왔던 사례들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 애들도 그런 기회가 있으면 알아서 보내겠습니다. 우리 때는 넉넉한 환경이 아니었잖습니까? 요즘 애들은 넉넉한 환경이 되다 보니까 약해요, 너무 약해. 위기상황에 처해 보지를 않아서 위기에 닥치면 쉽게 포기를 해요. 캠프 기회가 있으면 연락을 주시면 우리 애들도 기꺼이 보내겠습니다."
- 사회가 변했는데 뭐 옛날처럼 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맞지 않고 지금의 상황에서는 이런게 고민이 될 것 같습니다. 우리 애들도 뭘 줄 줄 몰라요. 우리 어렸을 때야 형제가 많았으니까 뭘 혼자 독차지해야겠다는 생각이 없고 무얼 어떻게 나눌 것인가가 고민이었는데 지금은 혼자니까 받기만 하려 합니다. 이번에 제 애가 초등학교를 들어가게 되어서 기념으로 쓰던 장난감을 연구소의 장애아동가족지원센터에 기증하려고 했더니 절대 안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억지로 데려와서 기증했는데 속으로 이거 큰일 났구나 필요도 없는 것도 나누려고 하지 않으니까. 정말 고민입니다.
"어른세대가 함께 고민을 해야할 문제이지요. 저희 아이들도 그런 면이 있어서 나름대로 안타까운 때가 많습니다."
- 고향은 어디십니까?
"전남 나주 출생입니다. 그런데 생의 반은 부산에서 살았습니다. 부산에는 군대 때문에 스물 네 살 때 왔습니다. 부산과는 인연이 많습니다. 아내도 부산 사람이고. 그래서 결혼할 때 양가에서 반대가 심했습니다. 저희 본가에서도 부모님이 반대하고 처가에서도 장인 어른이 반대를 해서 상당히 진통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정식 인사를 하고 나니까 허락을 해 주시더라고요. 그 다음부터 장인 어른께서 전라도에 대한 견해가 바뀌었습니다. 시장가실 때도 전라도 사람이 물건을 팔면 가서 사러 가시고 친구분들이 전라도 사람들을 욕하면 욕하지 마라 사람들 좋던데 왜그러냐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장기적으로 영호남 사람들이 결혼을 많이 하면 지역감정도 사라지지 않겠는가.....(웃음)"
어렵지만 어렵다는 말보다는 열심히 하고 있다라는 말을 해야 합니다.
- 다시 공식적인 얘기로 돌아가겠습니다. IMF를 탈출했나 싶은데 다시 경제적으로 어려운 조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일선에 계신 분으로서 어떻습니까?
"저희는 수출쪽이 90%여서 불안하다고 하는데 체감은 되지 않는 편입니다. 다만, 10%의 국내 유통 쪽에 매기가 떨어졌는데 저희는 그래도 안정된 편이지요. 개인적인 인생관이지만 그러고 보면 개인이나 기업이나 어려운 것은 항상 현재가 어려운 것입니다. 설사 잘 되었다 하더라도 현재가 어렵기 마련입니다. 여러 직원들과 대화를 할 때 누가 IMF 때문에, 불경기 때문에 힘들다는 얘기가 나오면 어떻게 대답을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대부분은 "힘듭니다." "어렵습니다" 라고 말한다고 하더군요. 그 얘기를 들을 때마다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얘기합니다. 그보다는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라고 합니다. 안되는데 잘된다고 하면 오히려 부정적인 대답이니까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고 어느 정도 하느냐면 "잘 됩니다. 잘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라고 합니다. 말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회현상이라는 것도 항상 현재가 어려운 것이니까 그렇게 생각해 나가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 IMF가 닥치니까 갈 데 없는 장애우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아버지, 형제가 실직하고 나니까 더 이상 집에 있기 어려워 나오는 겁니다. 당시부터 전 연구소 건물에 장애우 쉼터를 만들었는데 하루 백 명이 몰려오는 겁니다. 그래서 하루에 5천원씩 밥값과 차비를 지원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법이나 정책 말고 실제적으로 하는 일도 하자 해서 직업센터도 만들고 사업장도 만들고 우리가 일자리도 구하자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다시 경제가 어려워진다고 하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아주 고민이 많습니다.
"IMF가 오면서 가진 사람은 더 많이 가지려 하고 없는 사람은 더 어려워지고 해서 안타까운 점이 많은데 제가 볼 때는 결국은 불황을 극복할 수 있는 상황은 있지 않겠는가 싶습니다. 비즈니스로 여러 나라에 가보고 사람들 만나 보면 한국 사람들은 다른 나라 사람에 비해 저력이 있다는 걸 느낍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 적극적으로 뭘 해보려는 것 등이 한국 사람의 장점입니다. 사업가 입장에서 보면 중국사람의 상술이라던가 일본의 정확성이라던가 우리가 따라가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만 우리는 열심히 하려는 그런 점들을 잘 살리면 회복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장애우복지공장에서 만든 제품이 세계시장에서 호평받도록 노력할터
- 장애인공장을 운영하며 마냥 편한 건 아니잖습니까? 모범적으로 돼야 보람이 될 것 같습니다만.
"그렇습니다. 운영하겠다는 결정은 쉬웠지만 진행하면서 계속 유지해야 하느냐 그런 결정을 내리기가 더 힘들었습니다. 정부에서 정책적으로 고용 장려금이 나오지만 사업이란 측면에서는 생산성이나 기능이 빨리 따라오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어 결국 같은 단위 공장에 비해 가격경쟁력이 떨어지는 상황이 되고 있습니다. 공장은 기업활동입니다. 실습생도 많이 나와야겠고 투자도 계속 늘리고 더 많은 장애인을 고용하려는 계획과 목표를 갖고 있는데 1년 7, 8개월이 지났지만 손익분기점을 아직 못 넘기고 있습니다.
단순히 장애우들이 만드는 제품을 판다는 것은 의미가 없고 적어도 순창의 장애우복지공장에서 만든 제품이 품질 면에서 소비자에게 인정을 받는 수준이 되어야 하는데 현재 저희들도 그런 단계를 밟아 나가고 있습니다. 제품을 특화해서 국내 유수 백화점에 내놓아 소비자의 평가를 받은 후에 "이 제품 좋은데 어디에서 만든 것입니까" 라고 물었을 때 장애우복지공장에서 만들었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한다면 순창장애우복지공장이 빛이 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단계에 올라설 수 있도록 준비하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 그들이 만든 제품을 수출해서 미국, 일본 등 선진국 시장에서 평판을 받고 그 사람들이 그 신발을 신고 다닌다고 하면 장애우들도 자부심을 가질 것입니다. 그런 각오로 노력을 하려합니다."
- 사업적으로는 기업인 능력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을 하는 장애우들은 어떻습니까?
"장애우들의 마음이라든가 협조라든가 하는 부분은 높이 평가합니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열심히 하는 모습들, 특히 마음들이 참 좋습니다. 그러나 제약 요소 때문에 기능이 부족하고 손놀림도 능숙하지 못해 생산성이 미흡한데 시간이 걸리는 문제이지만 풀어나가야 할 문제입니다. 지금 현재 직원 20여명입니다. 앞으로 저희 비전은 어떻게 해서든지 장애우들이 50~100명 이상 많이 고용하는 사업장을 만드는 것입니다. 신발 일이라는 게 일손이 많아야 하는 일이거든요. 사람이 많아지면 생산량을 늘리면 되는 것이고 좋은 제품을 만들어서 많이 팔리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 이태리에 가서 신발을 산 적이 있는데 값이 싸더라고요. 2만원인데도 보기가 아주 좋더군요. 물가는 다 비싼데 신발값은 싸고 다양하고 그 이유가 뭘까요?
"운동화가 세계 1위지만 이태리는 구두, 피혁제품 신발 산업이 발달되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제품 단가가 싸다면 인건비가 좌우를 합니다. 그런데 이태리는 인건비가 우리나라의 두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수출국입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이태리는 각 부품 단위 회사들이 생산성이 강합니다. 부품을 만드는 회사들은 유행을 선도하고 완제품 회사들은 부품 만드는 회사들로부터 공급을 받아 완제품을 만드는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도 부품회사들은 있지만 어디까지나 완제품 회사들이 주체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품 단위회사 중에 패션이나 유행의 리더는 없습니다. 모든 것을 완제품 회사들이 하는 실정입니다. 각 단계별로 투자를 하고 연구를 하다보니까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한국도 이런 부분들을 고쳐나가면 될 것으로 봅니다."
- 그렇다면 우리 순천장애우복지공장도 특화된 제품을 만든다면 하청 공장 수준이 아니라 무언가 특별하다면 장애우 직업개발에도 희망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희도 그런 쪽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순천 공장을 경쟁력 갖춘 공장으로 만들것이냐, 특히 수제화 공법으로 만들어 비싸도 제값 받고 파는 그런 것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신체장애를 새로운 도전의 기회로 활용하십시오.
- 마지막으로 장애우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십시오.
"제 자신 장애우는 아니지만 어려운 환경들이 있었고 고비 고비마다 어려운 시기도 많이 있었습니다.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 시련이고 어려움이지만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정신적 시련이란 것도 일종의 정신적 장애가 아닙니까? 신체장애든 정신장애든 그것은 극복을 해야 하는 것이고 하나의 도전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다른 사람과 같다면 도전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 것이겠지요. 우리가 살아가다보면 정신적으로 장애요인이 얼마나 많습니까. 거기에 비하면 신체장애는 크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저희는 처음 사업 시작했을 때 이런 생각까지 했습니다. 우리가 기업을 운영하는 것은 우리가 가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육체를 하나님으로부터 빌렸듯이 청지기가 되어서 어떻게 충실히 관리해서 보다 좋게 잘 쓰는 것이 중요하다. 저희가 회사를 처음 설립했을 때 신앙적으로 두 가지 꿈을 꾸었었는데 사업체로 선교를 하고 싶다. 우리가 국제적으로 선교문화에 한 역할을 담당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또 하나는 고난에 닥쳐서 어려운 시기를 붙들고 명상하고 묵상하고 기도한 것은 선한 사마리안 같은 사람이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이 쓰러진 강도를 도울 수 있던 것은 물질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갖고 돕고 싶은 생각이 있었어도 물질적 여유가 없었으면 돕지 못했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저도 물질적인 여유가 있다면 누군가를 돕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짧은 시간이지만 얘깃거리가 참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소중한 이야기를 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품을 특화해서 소비자의 평가를 받은 후에 장애인복지공장에서 만들었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하고 싶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이 만든 제품을 수출해서 미국, 일본 등 선진국 시장에서 평판을 받고 그 사람들이 그 신발을 신고 다닌다고 하면 장애인들도 자부심을 가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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