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인으로 살기 위하여 > 지난 칼럼


자유인으로 살기 위하여

[여준민의 탈시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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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시설, 일단 한번 질러 볼 수밖에

나는 요즘 무더운 한 여름의 한가로운 휴가 계획에 부풀어있다. 일터에 복귀한 지 딱 1년 되는 지금, 솔직히 고백하자면 많이 지쳐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빨리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물론 나와 주변 동료들이 만들어가는 이 [탈시설-자립생활운동]이란 것이 호락호락 하지 않은 것이라는 것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그래도 3-4년 활동을 쉬었기 때문에 나름 의욕에 넘쳐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가난하고 장애가 있으면 시설이란 곳에 사는 게 당연하지 않아?’라는 것이 상식인 대한민국에서 [탈시설-자립생활운동]이란 그야말로 ‘바위에 계란치기’처럼 험난하고 지난하며, 딱히 눈에 보여 지는 성과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뭔가 매듭지어지는 기분으로 활동하기도 어렵다. 어떤 사건을 해결하면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법․제도의 개선과 더불어 한 인간이 성숙하고 온전한 인간다운 품위를 유지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적게는 10년, 많게는 40년 전 가난과 장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족에 의해 혹은 자신의 ‘강요당한 선택’에 의해 시설에 들어갔고, 다시 본인의 의연한 결의 결단으로 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서 보통사람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지만 여전히 높디높은 장벽은 좌절과 더불어 다시 ‘시설로의 복귀(?)’를 생각하게 만든다.

장애가 심해 직업을 구할 수 없어도 부양의무제로 인해 기초생활수급권자에서 탈락돼 그로 인한 불안정한 생계가 그렇고, 장애인의 몸에 등급을 매겨 장애 1급이 아니면 신변 및 일상에 꼭 필요한 활동보조인 시간을 줄이고 있는 현실이 또 그렇다. 더구나 밥 먹고 살기도 빠듯한데 본인부담금도 인상됐다. 시설에서 나왔어도 어디 나갈 수 없게 일상의 발을 묶어두는 거다. 게다가 주거는 일시 거주형태인 ‘체험홈’에 있다하더라도 모아놓은 돈이 없으니 임대주택 우선순위는 꿈도 못꾼다. 복권 당첨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신청서는 들이밀어 넣었지만, 글쎄 된다하더라도 임대료, 관리비는 제대로 낼 수 있을까….

그런데 어찌 보면 이런 장벽은 제도개선 싸움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은 가질 수 있다. 문제는 자유로운 삶 하나만을 바라보며 시설 밖으로 나온 이들이 학교에 다니지 못했고 고향이라는 곳에서 친구들을 사귄 적도 없고, 가족들은 연락하지 말라고 노골적으로 외면하는 상황이다 보니, 그들의 인간관계는 오롯이 시설에서 함께 지냈던 동료 거주인들과 이제 막 관계를 트기 시작한 장애인 단체나 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들뿐이라는 사실이다. 고독과 외로움에 몸부림칠 때, 그래서 술에 의존하거나 다시 시설로 들어갈 고민을 하고 있는 그들을 만날 때, 온 몸에서 기가 다 빠지는 상실감을 맛본다.

그나마 굳이 위안을 찾는다면, 글쎄…, 시설 안에 살던 사람들이 <시설 밖으로-지역사회>로 나와 산다는 것, 그 자체가 아닐까. 아니 어떻게 보면 가장 우선순위고 중요한 일이다. 일단은 나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니까 말이다.

시설 안에서는 집단생활이라는 그 구조적 모순 때문에 인간으로서 품위를 유지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항목인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설 운영자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침해되기도 한다. 그것이 현실이다. 관리와 통제가 운영의 기본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적 조건 때문이다. 그러니 시설 밖으로 나온다는 것 자체가 주체적인 삶의 시작이고, 지지고 볶든 어쩔 수 없이 가야만 하는 길이다. 인권 중에서도 자유권은 기본중의 기본이 아닌가.   

 

   
▲ 매년 탈시설 장애인들의 캠프인 이음여행이 열리고 있다

돈 없어도 관계로 살아 남는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최근 나를 가장 행복하게 만든 일이 있었다. 바로 지난 5월 동림 형님(남, 49세)과 미경언니(여, 45세)의 결혼식이었다. 돈 한 푼 없었지만 주변 지인들의 힘으로 오히려 진지하고 풍성한 결혼식을 만들어냈다. 난 이때 돈에 의지하지 않는 삶에 대해 다시 생각했고, 그 힘은 사람들의 마음, 우정과 연대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기도 했다.

여하튼 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장애인시설이었지만, 각기 시설에서 2-30년을, 그러니까 온전히 2-30대 청춘을 시설에서 보낸 사람들이다. 그 둘이 탈시설 한 사람들의 모임에서 자연스럽게 친해지고 가까워지면서 급기야는 부부의 연까지 맺게 된 것이다. 

앞서 간단히 언급했지만 이 둘 또한 경제적으로 어렵고 가족도 학연, 지연도 찾아보기 힘든 사람들이다.
동림 형님은 결혼식을 통해 미경언니를 가장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주고 싶어 했다. 미경 언니를 사랑하는 자신의 진심을 제대로 예를 갖춰 전달하고 싶어 했다. 돈이 없지만 합동결혼식 따위의 형식적인 요식행위로 무슨 보여주기 행사 치루 듯 그 순간을 퇴색시키고 싶지 않았다. 온전히 자신과 미경 언니가 주인공이 되길 바랐다. 그는 꽤 오랫동안 고심했던 것 같다. 좋은 조건과 상황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동림 형님은 같은 시설에서 나와 지난 3월, 최초의 마로니에 공원 야외무대에서 결혼식을 한 어느 지인의 결혼예식 도중 나에게 오더니 슬며시 아주 은밀하게, “준민씨 나도 이렇게 사람들의 도움으로 결혼식을 잘 하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어?”라고 제안했다. 활동가들의 바쁜 일상을 누구보다 더 잘 아는 형님이 그런 도움의 제안을 했을 때,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

난 그 즉시 내가 몸담고 있는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과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노들장애인야학과 함께 조직적으로 ‘결혼식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 동림,미경씨 부부

‘자알~ 산다는 것’의 의미 알게 해 준 그와 시설의 인연

실은 결혼식을 어떻게 어떻게 잘 치러냈다,고 자랑질(?)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아는, 한 따뜻한 영혼의 소유자 ‘김동림’이라는 사람을, 그 사람의 인생을 소개하고 싶어서다.

최근 난 시설에서 나와 생활하는 분들을 만나며‘잘 산다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란 생각을 자주 한다. 깊고 다양한 측면에서 생각해보지는 않았지만 이 문제는 결과적인 측면에서 정의할 게 아니라 과정 자체, 그러니까 삶의 태도이지 않을까 싶다. 동림 형님을 보면 더욱 그런 확신이 든다. 

김동림. 그는 1987년, 그의 나이 25세 되던 때, 가족 곁을 떠나 석암재단 산하의 한 장애인시설에 입소했다. 학교 가는 길이 멀었는데, 어려서 몸이 약해 멀미를 자주 하니 차를 타고 다니지도 못했다고 한다. 꼭 아버지가 자전거로 태워줘야만 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한 번도 귀찮은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중학교 1학년 어느 날 근처에 심부름을 다녀오다가 교통사고가 났다. 가뜩이나 몸이 안좋았으니 회복도 더디기만 했다. 사고 후 건강상의 문제로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는데 이상하게 치료가 안되고 몸은 더 축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다음 해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았는데, 듣고보도 못한 희귀병인 ‘뇌 위축증’이란 진단을 받게 된다. 알고 보니 외할아버지와 같은 병이었고 한 세대 걸러 유전 가능성이 있는 질병이었다고 한다.

치료법이 없는 난치성 희귀병이란 진단은 그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그 후 그의 삶은 집안의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아버지는 술에 취한 채 들어오는 횟수가 늘어났고, 술만 마시면 소리소리 지르며 온 식구들을 공포의 분위기로 몰아넣었다. 급기야 어머니에게 손찌검까지 하고, “저거 빨리 죽어 버렸음 좋겠다”고 고함고함 질렀다. ‘이 모든 게 나 때문이야…’하는 자괴감은 바닥을 쳤다.

집에서 혼자 누워있거나 책을 보거나 유일한 친구였던 TV도 날이 갈수록 지겨워졌다. 참을 수 없는 ‘존재감 상실’의 나날이었다. 장애로 인해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옴싹달싹 할 수 없는 자신에게 퍼붓는 칼날 같은 아버지의 욕설도, 일상의 무료함도, 더 이상 그를 집에 있을 수 없게 했다.

그는 “어느 날 TV에서 장애인들이 매스게임도 하고 체육경기도 하는 모습이 보이더라구. 나 같은 장애인들이 그렇게 많이 모여 있는 건 처음 봤어.”

아마 4.20 장애인의 날 행사 방송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떤 사람이 인터뷰를 하는데, 집에만 있지 말고 시설에 오는 것도 괜찮다고 말하는 거야. 그래서 저렇게 나 같은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면 좀 몸도 마음도 편하지 않을까 싶었어.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 날 이후 그는 “나도 장애인들이 사는 그런 곳에 보내줘요”라며 가족들을 졸랐다. 가족으로부터의 탈출이 그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것이다.

1987년, 25살이던 그는 가족으로부터 장애인시설로, 독립 아닌 독립을 강요받아 선택했다. 

 

   
▲ 탈시설 장애인활동가 대회에 참가한 김동림 씨(오른쪽)

‘시설-창살 없는 감옥’의 실체를 확인하다

불안과 공포로 기억되는 집에서 벗어났으니, 기대와 설렘이 있는 시설에서의 첫 날이었다. 게다가 첫 날 원장이 “여기는 돈이 필요 없는 곳이다”라며 자신감 있게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어머니가 꼬깃꼬깃 쥐어주신 1만원이 전부였지만, ‘아, 여기는 모든 걸 다 해주는 곳이구나’싶었단다.

하지만 하루가 못 가 현실을 알게 되었다. 눈에 보이는 것들로 충분히.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사람들이 이상해. 남녀 할 것 없이 다 똑같은 스포츠형 머리모양에 같은 모양, 색깔의 츄리닝을 입고 있는 거야. 우리 방에는 5명이 있었는데, 거의 5-60대 였고 삐쩍 말라 있었어. 하루 종일 멍하니 있거나 내내 누워있었지. 도와주는 사람도 없어. 지적장애인은 많이 먹으면 똥, 오줌 못 가리고 막 싼다고 밥도 적게 먹이고 욕하고 때리고. 정말 무슨 감옥에 온 기분이었어.”

하루하루 지낼수록 이상한 나라에 온 듯 한 불길한 예감은 계속 이어졌다.

사람들은 5시 꼭두새벽에 일어났다. 혼자 거동이 되는 사람들은 재빨리 씻더니 빨래를 했다. 그는 ‘여기서 한꺼번에 하는 거 아닌가? 자기 빨래를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하나? 나 같이 몸을 잘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지?’싶어 동료에게 물어봤다. 그 동료는 “세탁을 한꺼번에 하지. 그리고 그 옷들을, 심지어 속옷까지 아무거나 갖다 줘. 그러니 속옷이나 내가 아끼는 옷은 내가 빨아야지, 안그러면 어디 가서 누가 입었는지도 몰라”라고 대답했다.

기가 찬 상황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식사시간이 되어 식당에 갔더니 반찬은 딱 3가지 였다. 고기반찬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반복되는 국에 허옇고 오래된 김치, 마늘쫑 3-4개, 검은 콩 조금. 그런데 그나마 아무리 먹어도 한 번도 배가 부르다는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맛없고 똑같은 반찬이라도 이상하게 허기가 졌다.

하루는 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저녁 7-8시 되면 한번 내려와” 하시더란다. 그래서 갔더니 뭔가를 신문지에 잔뜩 사서 안겨주는 것이다. 이게 뭐냐고 했더니 “누룽지인데, 밤에 배고플 테니 사람들이랑 나눠 먹어”하더란다. 정말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고마웠다고 한다. 없는 사람 형편, 없는 사람이 안다고, 그렇게 참혹한 현실 속에서도 연민의 마음과 우정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간식(?)은 매일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5시 이른 저녁식사는 밤새 사람들을 허기지게 만들었고, 급기야 그를 비롯해 시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장발장’으로 만들었다. 시설 내에는 후원물품들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는데, 거기에 과자나 옷 등이 쌓여있다는 소문이 돈 것이다. ‘후원물품인데 주겠지’싶었지만 언제나 돌아오는 건 유통기한이 지난 과자부스러기였다.

급기야 어느 날 몇몇 사람을 거사(?)를 준비했다. 창고 탈취작전에 돌입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처음이자 마지막, 게다가 절반의 성공으로 끝났다.

“조심스럽게 들어갔는데 글쎄 정말 팔뚝만한 쥐들이 막 날라다니는 거야. 얼마나 놀랐는지. 가장 가까이 있는 무슨 상자를 들고 나왔는데, 쵸코파이 몇 상자였지. 그 다음부터는 무서워서 가지도 못했어.”

시설의 허락 없이 어딘가를 가거나 심지어 물건을 훔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단 내가 먼저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생존의 본능은 그를 그렇게 과감하게 만들었다.

 

   
▲ 이음여행에서의 박옥순 활동가와 미경 씨

따뜻한 영혼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렇게 시설에서 23년을 살았다. 아니 시간을 보냈다. 전동휠체어도 없어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외출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고, 돈은 구경도 못했다. 1년에 한번 사회적응훈련이란 이름으로 소풍 정도를 다녀올 뿐이었다. 시설에서 같이 사는 사람들, 직원들, 가끔 오는 자원봉사자들, 후원자들이 그가 만난 사람들의 전부였다. 관계형성도 제대로 안되는, 왔다 스쳐지나가는 인연들이….

그는 2008년 그가 있었던 석암재단이 부정과 비리와 족벌운영체제, 장애수당 갈취, 후원금 착복, 폭행, 인권침해 등 시설 비리의 종합선물세트라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덩달아 세상을 알게 됐다.

내부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보다 내부사정을 뻔히 알고 있으니, 몇몇이 용기를 내어 노조와 장애인단체들과 함께 시설 측에 문제제기를 시작한 것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그는 원장이 최고인 줄 알았다고 한다. 폐쇄된 곳의 제왕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 비리문제가 심각하게 불거지면서 사람들은 서울시 감사를 요구하며 서울시청 앞에서 몇 날 며칠 노숙투쟁을 했었다. 날씨가 너무 추워 입이 얼 정도였지만 언어장애가 있는 그는 힘주어 선전전, 서명운동에 참여했다. 그리고 “시설에서 나올테니 이 사태의 책임이 있는 서울시가 나에게 집을 달라”고 마로니에 공원에서 36일간의 천막농성과 노숙투쟁을 감행했다. 자신보다 더 장애가 심한 사람들도 전동휠체어를 타며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목소리를 높이는 본 후 용기가 생긴 것이다. 돈 없고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시설에서 고립돼 살거나 방구석에서 조용히 생의 마감을 기다릴 하등의 이유가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때 참 행복했어. 비록 시청 앞에서 잠을 자고 하루 종일 사람들에게 서명해 달라고 하다보면 입이 얼고 몸이 아팠지만. 시설은 따뜻하긴 했지만 나를 구속시켰지. 그런데 여기는 먹고 살기 힘들어도 자유가 있어. 시설 밖으로 나가는 건 물론이고 심지어는 방에서 나올 때도 어딜 가는지 보고해야 해.”

그는 이제 아무도 자기에게 뭐라 하는 사람 없고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는 이 자유가 무엇보다 신난다고 한다. 자신보다 더 장애가 심하지만 웃는 모습이 아름다운 아내를 가졌고 늦었지만 야학을 다니면서 공부도 하고 사회도 알아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교회를 다니며 사람들도 많이 사귀게 되었고, 장애인단체 활동을 통해 사회모순과 싸울 내적 힘도 강해졌다. 탈시설 한 선배로서 시설에서 갓 나온 분들을 주변에서 챙기기도 하고, 얼마 안되는 돈이지만 차곡차곡 적금을 넣고 있기도 하다.

아주 평범한 일상을 차근차근 알차게 채워가며 그는 어떤 꿈을 새롭게 꾸고 있을까?

이런 생각이 미쳐 안부 전화를 했더니, 이런! 머리가 깨져 병원에서 4바늘을 꼬맸다고 한다.

“집에서 미경이랑 쭈쭈바를 먹는데, 이게 안따지잖아. 이빨로 확 물었는데 그만 내가 힘이 없어서 무게중심 못잡고 뒤로 넘어졌지. 근데 모서리에 부딪친 거야. 에그, 그래서 오늘 집회에도 못나갔어.”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 지….

그런데 나는, 이런 소소한 일상을 그와 더 많이 나누고 싶다. 

 

작성자여준민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상임활동가)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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