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가고 꽃 지면 > 지난 칼럼


봄 가고 꽃 지면

[이서진의 살며 생각하며]

본문

“벚꽃 진 게 언제인데.”
“벌써?”
“꽃 다 졌어.”
“…… .”

닫아버린 그의 입술만 나는 물끄러미 쳐다보다 차창으로 시선을 건넸다. 꽃 다 졌어, 라는 그의 짧은 말이 외려 긴 여운으로 꽃잎이 되어 화르르, 가슴에 내려앉는 순간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휙휙 스쳐가는 차창 밖으로 봄꽃은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 진작 꽃구경을 가자고 보채는 그를 밥 한술 더 주는 심정으로 따라나설 걸…… . 웬일인지 내 밥마저 빼앗긴 심정이었다. 봄은 가고 꽃은 지고, 게다가 그의 말대로 그 꽃이 ‘다’ 져버렸으니.

때늦은 후회였다.

싹이 올라왔더라, 출근길에 보니 꽃망울이 맺혔어, 아마도 내일모레면 봉우리가 열릴 테지, 라고 그는 연실 읊어댔다. 흡사 봄바람에 그 치마를 나붓거리는 봄 처녀처럼. 응응, 그래, 그렇겠지, 나는 매번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책상 위에 수북하게 쌓인 책들을 뒤적거리면서. 이번 주 지나서, 오늘내일 마무리하고, 날도 흐린데 다음에 가자, 라고 나는 차일피일 미루었다.

말하자면 꽃구경을 나설만한 ‘여유’가 없었던 탓이었다. 언뜻 텔레비전에서 들려오는 ‘만개’와 ‘절정’ 따위 멘트마저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그러다가 무지막지한 봄비가 총알처럼 쏟아지고 봄꽃들은 죄다 몰살당하고 말았다. 때아니게 거센 바람까지 가세하는 통에 봄꽃들, 그중에서도 단연 벚꽃은 거리마다 널브러졌다. 화려했던 꽃잎들을 죄다 떨어뜨리고 벚나무는 무르춤하게 서 있었다. 목숨보다 더한 제 자식들을 일순간에 빼앗긴 어미의 표정이었다. 비바람에 그 고운 꽃잎을 내어주고 황망하고 쓸쓸하게.

봄꽃을 놓쳐버린 나 또한 다르지 않았으리라. 꽃 다 졌어, 라고 툭, 한마디 던진 그가 숫제 무심했다. 진작부터 종달새처럼 봄소식을 알려준 그의 말을 건성으로 흘려듣고 내심 그를 원망하는 꼴이었다. 사실 나는 무감각의 극치에 이른 것이었다. 봄이 오고가는지, 꽃들이 피고 지는지도 모른 채 그저 스스로의 시간과 공간에 매인 수인(囚人)과 같았다.

오감을 열어서 우주와 교감하는 고아한 지경까지는 아니어도, 자칫 곰팡이 필 몸에 따스한 한 줌 봄볕을 쬐면서 알록달록 앞다투어 피어나는 봄꽃들을 응원하는 일이 그렇도록 요원했을까? 계절을 느끼지 못하는 그 무감각의 이면에는 둔중한 삶의 무게가 엉버티고 있을 것이었다.

생의 하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에게 계절의 순환과 시간의 흐름은 때로 역류하듯 삶을 혼란스럽게 한다. 단 한 번의 비바람으로 봄꽃이 속절없이 떨어지듯. 봄이구나!, 이제 막 감격하고 천지사방을 둘러보아도 봄꽃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만 것이리라.

올곧게 피어 있으리라고, 그 고운 자태를 형형색색 뽐내며 상춘객들에게 손을 까불리라고, 한 점 의혹마저 없었는데 한순간에 찬란한 봄꽃은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허둥지둥했다. 이 봄이 다 가도록 나는 무얼 했을까? 꿋꿋하게 겨울을 견딘 나목이 순을 틔워 꽃을 피어내고 그 꽃이 다시 질 때까지…… .

아아, 나는 나의 무감각과 무심에 더럭 겁이 났다. 왠지 내 가슴에 단단한 방패를 찬 기분이었다. 외부의 그 어떤 것도 차단해버리는. 투명한 봄볕이며 화사한 봄꽃인들 어찌 그 방패 속을 비집고 들어오랴!

“어디든 한군데라도 피어 있겠지. 아직은…”

상심한 내 얼굴이 가여웠던지 그는 자동차를 돌렸다. 그는 한달음에 국도변으로 나왔다. 반시간도 지나지 않아 자동차는 도시를 벗어나 산과 들과 이름 모를 하천을 지나고 있었다.

“그럼 우린 때늦은 상춘객?”

벼룩도 낯짝이 있다고 그에게 미욱해진 나는 상춘객을 핑계 삼았다. 맞는 말이었다. 때늦은 게 아닌, 때를 놓친 상춘객.

구불구불한 농로를 지나자 야트막한 야산에 둘러싸인 동리가 나타났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시골집들이 봄볕을 받고 있었다. 마을로 들어가는 초입에 야산의 진입로가 가리마처럼 하얗게 드러나서 상춘객을 맞았다. 우리는 차를 세우고 진입로로 들어섰다.

“여기서 기다리는구나!”

몇 무더기의 철쭉 앞에서 그는 환하게 웃었다. 연분홍 꽃잎이 무리지어 봄바람에 살랑거렸다. 저쪽 완만한 경사 너머 비탈진 구석에서 산수유 또한 우리를 기다려 주었다. 그 샛노란 빛이 숲의 전령사처럼 노란 깃발을 흔들어대는 듯했다. 나는 자라목을 하고 산수유를 바라보았다.

기다리는구나!, 그의 감탄사가 이명처럼 들렸다. 한바탕 휩쓸고 간 비바람에 살아남은 봄꽃들이 여간 대견스럽지 않았다. 그 기다림이 나를 안심시켰다. 봄날의 끄트머리에서라도 봄꽃을 만났다는 안도감. 그러므로 이 봄을 거저 보낸 것은 아니라고, 봄꽃들은 내게 속삭였다. 그때, 속삭임의 실체이듯 그의 발치에서 보랏빛 제비꽃이 그 작은 키로 우리를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아아, 이렇게도 고운 것이…… .”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땅바닥에 붙어있는 가녀린 풀꽃을 그저 우두커니 내려다보았다. 오죽하면 앉은뱅이 꽃이라는 별칭을 얻었을까? 꽃잎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풀숲에 납작 엎드려야 할 터였다. 나는 허리를 구푸리고 고개를 숙인 채 한동안 제비꽃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봄볕이 보랏빛 꽃잎 다섯 장을 시시각각 비추었다.

진보라 잎 속에 가는 핏줄처럼 그물맥이 드러난 채였다. 너무 작아 가련하기까지 한 연약함 속에 어찌 그리 왕성한 생명력이 있었을까? 양지바른 곳이면 제아무리 척박한 땅이어도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워 올린다는 바이올렛. 그 겸허와 성실을 봄의 끄트머리에서 배우길 원했다. 나는 작은 들꽃과의 만남이 흐뭇했다. 은은한 울림을 그 가녀린 제비꽃이 전해주었기 때문이었다. 화려함을 넘어서는 정제된 아름다움을.

구불텅구불텅, 운전대를 잡은 그의 손등에 정맥이 불거졌다. 매양 힘을 주고 고무줄을 당기듯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살아야 하는 도심 속으로 자동차는 다시 들어가고, 우리는 또 이 봄날을 보내면서 남은 꽃들이 마저 제 목숨을 스스럼없이 내놓는 것을 증인처럼 목격해야만 한다. 봄 가고 꽃 지면…… 또다시 명년의 새봄을 기약해야 할까? 그땐 흥겨운 봄노래라도 한 곡 부르게 될지도. 차창으로 봄볕이 사방에서 튀어들었다. 보랏빛 바이올렛은 내년에도 그 자리에서 피어나리라.  

 

작성자소설가 이서진  walktour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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