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사람, 고(故) 지영언니를 가슴에 묻으며<br/>"우린 언니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 대학생 기자단


큰 사람, 고(故) 지영언니를 가슴에 묻으며<br/>"우린 언니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여준민의 탈시설 이야기]

본문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습니다. 최근 장애계는 함께 활동하던 사람들을 너무 쉽게 떠나보냈던 경험이 많은 터라 “누군가 아프다”라는 말만 전해 들어도 전전긍긍하며 화들짝 놀라기 일쑤입니다.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장애물없는생활환경시민연대’의 배융호 총장님이 사고로 중환자실에 계시기 때문에 사람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저와 함께하는 활동가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면회 한 번 못 간 게 죄송스러워 아침 일찍 모두 함께 만나 면회를 할 요량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침 6시부터 모바일 메신저로 또 하나의 가슴 떨리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바로 장애인야학인 너른마당의 교장 선생님이자 탈시설한 언니들의 왕언니, 지영언니가 위독한 상태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감기인 줄 알았답니다. 그런데 의식을 잃을 정도로 열이 너무 많이 나 119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후송됐는데, 갑자기 패혈증으로 의식을 잃고 중환자실에 입원했습니다. 그래도 모두 잘 견뎌내 금방 밝은 표정으로 우리 곁에 올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장애가 심한 분들은 간단한 감기에도 입원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람 목숨이 그리 간단치는 않으니까 쉬면서 치료받으면 나아질 거라 기대했던 겁니다.

그런데 오전 9시 40분경 다시 모바일 메신저로 문자가 하나 떴습니다. 지영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이해할 수도 믿기지도 않는, 뜬금없이 어이없는 문자였습니다. 한동안 멍하게 앉아있는데 눈물이 흘렀습니다. 서러운 눈물이었습니다. 먹먹해지는 가슴을 어찌할 수 없었지만 가족이라곤 남편밖에 없고 남편 정혁이형도 심한 장애를 안고 있어 장례 준비를 할 사람이 필요할 터이니 서둘러 장례식장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10여 년 전 최옥란 열사의 장례식장에서 많은 눈물을 흘리던 저에게 한 선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애 쪽에서 활동하다 보면 이런 일은 앞으로 더 많아질 수 있어. 익숙해질 필요가 있지.” 몸이 불편하거나 그 장애 때문에 지병을 안고 면역력이 약해져 있으니 질병에도 쉽게 노출될 수 있고, 어떤 위험한 상황에 부닥쳐질지 모를 가능성이 높다는 거였습니다. 이해 못 할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10여 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이런 상황은 전혀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럽고 서러운 느낌은 더 커져만 갑니다.

특히 지영언니의 죽음은 그녀가 살아생전 보인 당참과 밝음, 힘 있는 모습이 겹쳐져 더더욱 그렇습니다. 10여 년 전 활동보조나 주거 지원이 전혀 없었을 때 탈시설을 감행(?)한 용기 있는 사람이고, 시설에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조금이라도 개선하기 위해 두 눈 크게 뜨고 싸움으로 변화시켜, 사람들에게 신뢰와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그녀였기에 더욱 그랬을 겁니다.

 

   
▲ 故 지영 장애인권 활동가

 

탈시설한 사람들의 영웅, 지영

그녀는 탈시설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왕언니로 통합니다. 아무리 비장애인 활동가들이 탈시설-자립생활에 대한 정보를 주고 신뢰를 준다고 해도 결국 ‘선택과 결정’에서는 자신과의 싸움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재한 무기력, 낮은 자의식, 세상에 대한 두려움 등에 맞서지 않으면 탈시설은 요원한 이상일 뿐이죠. 하지만 그렇게 망설이는 사람들도 지영언니를 만나면 모두 탈시설을 결심했습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시장을 가보고 미용실을 경험하면서 말입니다. 지영, 그녀는 그런 힘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신기하리만치 사람들 마음을 잘 헤아렸고 때로는 강하고 당당하게 삶을 헤쳐나가는 모습을 주문하며, 그렇게 힘과 용기를 주고 함께한다는 신뢰를 몸으로 보여주며 사람들을 시설로부터 이끌어낸 사람이었습니다.

소식을 듣고 장례식장으로 들어오는 탈시설한 사람들의 눈빛은 허공을 맴돌고 있었습니다. 서로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믿기지 않는 상황에 침묵으로 하늘을 원망할 뿐이었습니다.

 

부당함과 권력에 싸운 그녀

지영, 그녀는 29살 감기바이러스가 척추를 손상하고 온몸으로 퍼져 몸 전체가 마비되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3년 동안 병원 신세를 지다가 결국 자신을 돌봐 줄 가족이 없어 시설에 들어가 6년을 살아야 했지만, 그 이전 삶은 ‘자유로운 삶’ 그 자체였다고 합니다.

그녀는 가족과 함께 살았지만 무슨 연유인지 6살에 보육원에 들어가 살았습니다. 19살 성인이 되면서는 구미공단의 어느 공장에서 50명을 관리하는 생산설비의 책임자로 일하기도 했고 노조활동도 열심히 했다고 합니다. 보육원 생활에서 벗어나 그 누구의 터치도 받지 않고 일한 만큼 벌고, 저축하고, 여행하고, 사람들과 잘 지내는 평범한 생활이 그녀는 너무도 좋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3년 동안 병원 신세를 지고 장애를 갖게 된 후 그녀는 삶의 의욕을 잃고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자포자기했다고 합니다. 한 차례 자살을 시도하면서 나아지는 것 없는 삶에 대해 일단 포기하고 의사가 알려준 3~4곳의 시설 중 가장 멀고 찾아오기도 어려운 철원의 은혜요양원을 선택하게 됩니다. 아무도 모르는 시설에서 그냥 평생 살아야겠다는 것이 막다른 골목에서 취할 수밖에 없는 제일 나은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시설에 들어간 첫날, 그녀는 생각을 바꿉니다. 자신이 보는 앞에서 버젓이 남성 장애인의 옷을 벗기고 기저귀를 채우고, 덩그런 냉면 그릇에 형편없이 초라한 밥과 반찬을 말아 꾸역꾸역 먹이는 것은 보통이고, 구타에 막말을 서슴지 않는 모습을 보며 분노하고 경악했던 것입니다. 30살 이전까지 사회생활을 했으니 어렸을 때부터 시설에서 살아 무기력이 일상화된 거주인들과는 다른 민감한 감수성으로 시설생활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항의했고 사무실에 내려가 개선을 요구하며 외부의 자원봉사자들에게도 부당한 처우를 고발(?)하며 억압받는 거주인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그런 활동 때문에 문제를 일으킨 직원은 해고되거나 징계를 받았고 직원들 밥과 같은 식단으로 개선되기도 했습니다. 욕설도 줄었고 구타도 줄었습니다. 직원들은 그녀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사람들과 돈을 모아 자장면, 치킨 등을 외부로부터 시켜 먹고 방안에서 라면도 끓여 먹고, 늦은 밤까지 TV도 보면서 그동안 시설에서 볼 수 없는 풍경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녀의 당당한 모습은 너무나 매력적이었을 겁니다. 상상만 해도 신 나고 희열이 느껴집니다. 지역 사회에서 활동할 때도 언제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지위와 권력에 굴하지 않는 당당한 모습을 봐왔던 터라 그 상상은 어렵지 않죠. 그러니 그녀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2살 연하의 정혁이 형도 그녀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키워나갈 수 있었을 겁니다.

언니는 시설에서의 자유를 위한 싸움을 혼자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투쟁했고 함께 만들어간 것이라며 늘 동료에게 공을 돌렸습니다. 넉넉한 품성과 배려하고 사람을 먼저 챙기는 모습은 늘 고개 숙이게 하고 언니 옆에 있음을 감사하게 했습니다.

지영과 정혁, 두 사람은 시설에서 사랑을 키우며 시설 밖으로의 삶을 함께 계획했습니다. 정혁이 형이 먼저 나가 자리를 잡았고, 그 후 지영언니가 탈시설을 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희영언니, 경남이… 이렇게 시설에 살던 사람들은 언니의 당찬 모습에 영향을 받아 시설 밖 생활을 결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지영, 그녀는 존재 자체로 빛이 나는 사람이었습니다.

 

진정한 자유인, 지영

지영, 몸은 비록 자유롭지 못해도 그 누구보다 자유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를 추도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기분 좋은 사람” “힘 있는 사람” “유쾌함이 저절로 전이되는 사람” “보기만 해도 위로가 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늘 맛있는 음식을 챙겨주고 본인보다 사람들 건강을 더 챙기고, 하나를 받으면 열을 주는 사람, 베푸는 것이 몸에 배어 가끔은 과분한 배려에 몸 둘 바를 모르게 했던 사람이었죠. 그러면서도 늘 권력에는 과감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쳤고, 주변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때로는 올곧은 방향을 제시하며 부당한 관행에 맞설 것을 주문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임대아파트로 가게 되어 보증금 1천만 원이 생기자, 자신과 남편의 손발인 전동휠체어를 새롭게 구매하고는 나머지 돈은 거의 사람들에게 썼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 우리 사무실에 와서는 조용히 제 앞자리로 와서 “준민아, 나 회비 오천 원이지? 그거 만 원으로 올려” 하시더군요. “언니 그래도 되겠어요? 생활비 많이 들지 않아?”라고 했더니 대번에 “괜찮아, 그런다고 굶어 죽지 않아. 진작에 올리고 싶었어”라며 언니 특유의 화끈함을 보여주시더라고요.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 한마디는 일상의 감동이고 힘이지요. 언니는 주변에 그런 좋은 기운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슨 무슨 기념일에는 꼭 선물을 주셨고, 먹을 것이 생기면 나누었고, 가끔 직접 재래시장에서 싱싱한 재료들을 사와 풍성한 음식을 만들어주기도 했습니다(물론 활동보조와 함께).

가끔 정혁이 형의 도시락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기가 막히게 예쁘고 맛깔난 반찬들로 채워 도시락을 예술로 승화시키기도 했습니다. 가난해도 어떻게 삶을 풍성하고 행복하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영원히 잊힐 수 없는 그녀의 삶

며칠 전 탈시설-자립생활 정책토론회가 열리는 장소에서도 사람들은 그녀의 빈자리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장추련의 박김영희 국장님은 “지금 이 자리에 지영이 있었으면, 긴말이 왜 필요해? 시설은 무조건 안 돼. 지겨워”라고 말했을 거라며 안타까워했고, 420 거리 행진에서도 “그녀의 혼이 함께 있을 것”이라며 내내 아파했습니다. 그리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박경석 대표는 아래의 편지를 SNS에 올렸더군요.

지영언니 가시는 길… 우리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은 박경석 대표의 편지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아직도 귓가에 생생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당당하게 살았던 고인의 삶,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겠습니다.

 


                             지영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대표)


지영 동지….잘 가시오!
사람은 죽는다는 것을 그대 때문에 또다시 가슴에 새겼소이다. 사람이 죽지 않으면 얼마나 지겹겠소.
죽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소중하고 아름답고 애틋하고 그립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대의 죽음은 너무나 갑작스러운 벼락처럼 다가와 모든 것을 단절시켜버리고 너무나 ‘so cool’ 하게 안녕하고 가버리시니 그 이별을 감당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대는 아직 장애인 시설이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살겠다고 탈시설한 중증장애인들을 위해 생활의 여백에 함께 써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은데 그렇게 가버리시니….
내 다시 만나면 지영 동지에게 무책임한 그대를 너른마당에서 자르라할 거요.
그대 때문에 시설에서 살아야만 했던 많은 중증장애인이 지역사회로 나올 결심을 하고 나와서
어떻게 할지 몰라 어쩌지 못하는 생활의 여백을 그대와 함께 채워나갔는데….
당신이 그들의 멘토를 하면서 탈시설한 중증장애인들에게 많은 용기를 주었는데….
그것을 다하지 못하고 무엇이 그리 급해서 가버렸나요.
그리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어차피 가야 할 길이었는데….
장애인운동은 내가 그대 선배이지만, 하늘나라세상에서 무엇이 있는지 나는 모르겠지만, 그곳에서는 당신이 나의 선배요. 하나 부탁이 있소. 모두 버리고 그렇게 먼저 떠난 당신은 아마 하늘나라에서는 당신이 이승에서 만나지 못한 장판(장애인운동판)에서 활동했던 많은 선배를 만나겠지요.
기억하잖아요. 올해도 3월 26일 광화문광장에서 그 추운 밤에 장애해방열사 추모제 할 때 열사동지들 모두 앞에서 손가락 걸고 장애해방의 그날까지 열심히 투쟁하겠다고 했는데….
그 동지들 만나면 안부 좀 전해주오.
내 사랑하는 동지 태수와 흥수형님 만나면 안부 전해 주시구려.
그리고 옥란 언니에게도 동민에게도 주영이와 파주 어린 남매인 지우, 지훈에게도….
나는 여전히 그들이 내게는 열사가 아니라 형님이요 동생이요 후배요 선배인데….
하늘나라 선배들께 안부 전해주소.
안부를 전해주는 우편요금은 정혁동지에게 술 한 잔으로 때우리다.
그곳에 가면 나도 할 말 있소. “미련 없이 투쟁하다가 선배님을 만나러 왔다”고 말하고 싶소.
그리고 또 한마디만 더 전해주오. 특히 태수와 흥수 형에게  “나를 외롭게 두고 간 대가는 준비하고 있으라” 전해주시오. 꼭 전해주소. 부탁이요. 하늘나라 선배님. 나는  내게 남은 삶의 여백을
살아있는 동지들과  장애해방의 투쟁을 잘 쓰다가 만나러 가겠소.
하늘나라에서 만날 때 맛있는 안주에 (참고로 나는 회를 좋아하오) 소주 한잔 주소.
그러니까 그곳에서는 제발 가난하지 말고 상처받지 말고 장애 때문에 차별받지 말고
장애인이라도 부끄러워하지 말고당당하게 평안히 쉬면서 돈도 좀 많이 꼬불쳐 놓으시오.
잘 가시오.
지영 동지….

 

 

 

작성자여준민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상임활동가  dung7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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