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차별의 대단한 甲 놀이공원
본문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지금까지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꿈꿀 수 있는 사람들이다."
-존 F.케네디“
장애인에게는 30년이 지나도 놀이 공원들은 회전목마만 허락되는가?
그 동안 장애인으로 살면서 수많은 차별과 멸시를 받았지만 매년 5월이 되면 심장 밑이 아릿해오는 아프디아픈 차별의 기억이 하나있다. 필자가 갓 십대에 들어선 어느 5월의 화창한 봄날 어린 마음에 기대만발로 놀러갔던 놀이공원에서 놀이기구 탑승을 단칼에 거부당했던 경험이다. 그 수많은 놀이기구 중에서 목발을 이용하는 필자에게 허락된 것은 진행 속도를 대폭 낮춘 회전목마뿐이었다. 이 슬픈 추억들은 30년이 지나서 대학교를 상대로 소송도 하고 장애인 시설비리 문제로 10년을 넘겨서 싸울 수 있었던 필자에게도 여전히 놀이기구의 이용 거부에는 다소 무력하게 했다. 그러나 이 슬픈 트라우마도 국가인권위원회의 설립과 장애인차별금지법의 깃발아래 옅어지고 놀이공원들의 장애인 우선 탑승제도가 활성화되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사그라지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강의하고 있는 복지관에 봄 소풍을 놀이공원으로 다녀온 장애인 청년들에게서 분노에 찬 일련의 하소연을 들을 수 있었으니, 대부분 놀이기구 탑승을 거부당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눈에 띄는 신체장애도 문제 행동도 일으키지 않은 경기도 장애인종합 복지관의 가온누리대학 3학년 학생들이었다.
더욱 우스운 것은 이들이 단체로 탑승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장애인 카드를 제시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탑승했을 경우에는 그 어떠한 제지도 받지 않았을 뿐더러 놀이공원 담당자가 그렇게도 걱정하는 위험천만한 일도 물론 발생하지 않았다. 그들은 장애인 카드를 발행받긴 했지만 오락과 문화를 위해서는 더 이상 보호자가 필요 없는 성인들이었으니까. 엄마의 잔소리로부터 사회복지사들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그들은 이미 수차례 개인적으로 연인과 함께 친구와 함께 놀이공원을 이용한 놀이기구의 달인들이었다. 그들이 더욱 분노한 것은 놀이공원 관계자가 그들에게 일행 4명에 보호자 3명 동승을 요구했다는 사실이다. 스무 살이 넘었고 이미 놀이기구를 잘 타는 팀과 별로 즐기지 않는 팀으로 엮어서 움직였는데 말이다. 삼십 년이 지나고 장애인차별금지법이 통과되어서도 놀이공원의 놀이기구 탐승 거부의 논리는 어찌 필자가 열 살일 때와 한치도 다름이 없는지 놀랄 뿐이다.
놀이기구를 위험할 줄 알면서 목숨을 걸고 다치려고 타는 사람은 없다. 백보 양보하여 놀이기구 탑승이 일부 장애인에게 위험할 수는 있다하더라도 모든 장애인에게 위험하지는 않다. 놀이기구 사고 중에 정작 장애인 당사자가 사고의 중심에 있었던 사례가 얼마였던가? (물론 2008년 울산의 모 장애인 재활원에서 실시한 사회체험 프로그램에 참가했던 30대 정신지체장애인이 놀이기구에서 자의로 추락해 부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하기는 했다. 문제는 그런 돌발 행동이 그의 장애때문인지 또 다른 문제인지 입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놀이공원 측이 그렇게도 고객들의 안전에 신경 쓴다면 입장하는 모든 고객들에게 의료검진을 실시하고 의료보험카드를 제출받아야 하지 않을까?
문제는 탑승을 거부하는 법적 근거도 객관성도 결여됐다는 것이다
지난 4월 10일, 국가인권위원회의 장애인차별금지법 시행 5년 평가 자료에 따르면 2008년 4월 장애인차별금지법 시행 후 접수 된 진정사건 5,230건 중 식당이용 거부, 놀이기구 이용 제한 등 '재화ㆍ용역 일반' 항목의 차별이 16.3%(851건)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이와 같은 차별은 비교적 강력한 장애인차별금지법을 가진 미국에서도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내세우는 논리는 탑승안전전문가들의 검증을 거쳤다는 주장인데 이는 장애인 당사자들의 자신의 장애에 대한 경험과 노하우 통제력을 염두에 두지 못한 관점이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탑승관계전문가들은 비장애인들이 자신의 신체에 대해 통제력을 상실했거나 장애를 입은 경우에 대한 안전의 문제를 다룰 뿐, 장애인 능력과 통제력에 대한 전문가들은 아니지 않는가? 어제 다리를 다쳐 목발을 이용하는 비장애인과 필자처럼 걸음마도 목발로 배운 이중에 누가 더 목발 이용에 전문가인가? 또 작년 6월에는 동대문 근처에서 놀이기구를 운영하는 시설이 안내원의 지시사항을 듣지 못하여 위험하다며 청각장애인들의 이용을 거부했는데, 이는 청각 장애인들이 듣기 어렵기 때문에 주변 상황에 더욱 집중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지극히 비장애 중심의 사고이자 편견이다(더구나 동대문을 방분하는 그 수많은 외국인 이용자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올해 한국발달장애연구소의 인형극단 단원들이 제주도에 초대받아 공연을 마치고 승마 체험과 카트라이더 체험을 할 때도 관계자가 어떠한 근거 조항의 제시 없이 말들이 놀란다면서, 운전면허증 제시를 요구하는 촌극이 벌어졌었다. 장애가 있기 때문에 말들이 놀란다면 재활 승마는 어떻게 존재하며 카트라이더는 간단한 교육을 마치면 유치원생들도 운전하는 것이다. 결국 몇몇 단원들이 멋지게 카트를 운전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 모두에게 탑승을 허락했다고 한다.
장애인에 대한 놀이기구의 탑승 거부가 고객의 안전을 위한 조치가 아닌 장애인의 차별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장애인 고객이자 소비자인 자기 결정을 놀이공원 관계자들은 절대로 신뢰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결국 장애인들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여야 돈을 지불한 놀이공원에서 놀이기구를 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차별도 어떤 일관성 없이 직원 개개인의 주관적, 자의적 판단에 근거하는 경우가 허다하므로 장애인 소비자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장애인이 처음으로 운전면허증을 획득하려고 했을 때도, 장애인이 처음으로 일반학교에 진학하고자 할 때도, 장애인이 처음으로 교사가 되고자 했을 때도, 그들의 논리는 위험이었고 보호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들의 논리는 장애인에게 여전히 애틋한 것이다.
아마도 놀이공원의 시장은 장애인 고객의 수가 대폭 늘어나거나 장애인의 소송이 줄을 이어 장애인의 탑승거부로 인하여 이윤 손실이 심각해지면 긍정적으로 변해갈 것이다. 그러면 장애인들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탑승만 시켜달라고 비굴하게 요구할 필요도 없이 놀이공원의 장애인에 대한 전반적인 접근성도 개선되고 휠체어가 쑥 들어가는 자이드롭도 개발할지 모른다. 또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문자 전광판도 설치하고 놀이기구 운영자들이 기본적인 수화와 활동 보조 교육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와 우리 장애인 당사자들은 열심히 진정하고 물러섬 없이 싸워야 할지 모른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내 돈 내고 내가 즐기기 위해서 내 능력을 증명하고 투쟁해야 한다는 사실이 진정한 차별이며 말도 안 되는 갑의 횡포라는 점이다. 요컨대, 이제 인권위가 좀 나서서 여론화라도 시켰으면 좋겠다. 요즘 유행이 ‘을’의 시대 아니던가?
“지금까지 존재하지도 만든 적도 없는 것들을 꿈꾸고 현실로 이루어낸 사람들에게 감사해. 그들처럼 되고 싶고, 그들처럼 꿈을 현실로 만들어야지.”
-린다 피콘《365매일 읽는 긍정의 한 줄》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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