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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 청소년에게 방황과 반항의 깃발을

[김형수의 세상보기]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접하는 장애청소년 부모님들에게 드리는 편지

본문

부모부터 ‘장애’에 대한 정체성과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어머님, 40대를 바라보는 중증 장애인당사자로서 저의 사춘기 시절을 되돌아 보는 것은 생각 밖으로 큰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저도 학교생활에서 많은 괴롭힘과 놀림에 시달렸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춘기 중학교 시절은 무척 힘든 때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부모님이나 담임선생님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당신들의 반응은 사뭇 의외였습니다. 부모님은 공감하고 분노하고 걱정하셨으나 전면에 나서서 막아주시거나 보호해주시는 않으셨습니다.

나와 다른 신체를 가진 다른 사람들을 제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설명해 주셨고 나아가 제가 스스로 제 장애에 대해 타인들에게 설명하고 설득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부모님들이 보면 잘 용납이 안 될 수도 있겠으나 당신이 그렇게 하셨던 하나의 근거는 부모나 교사가 아무리 노력해도 매 순간 필자가 받는 놀림과 괴롭힘, 나아가 차별을 다 막아 줄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저는 자라면서 가족 안에서 측은한 장애인이었던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오로지 뇌병변장애를 가진 집안을 일으켜 세울 ‘막내아들’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이후에도 친구들의 괴롭힘은 언제나 있어 왔지만 그 놀림이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배우고 깨닫는 순간, 그러한 비장애인 학생들을 이해하는 순간, 저의 존엄은 내 스스로 더 이상 훼손되지 않았습니다.

내 장애가 내 고통과 열등감이 아니라 내 자신의 여러 면의 신체적인 물리적인 정신적인 일부분일 뿐이고, 내 인생의 일부분이고, 내 자긍심이며, 내 정체성이 되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를 낳아준, 나의 장애를 가장 아파하시는 당신들이, 부모님이 제 장애를, 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서러워하지 않으셨으니까요.
이렇게 부모님은 장애인 자녀에게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너를 차별하고 괴롭혀도 너와 함께 할 가족들이 있다’는 확신을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장애인 부모님들은 그 반대로 표현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특히 지적·자폐성 장애인에게 더욱 도드라지는 듯합니다. 장애인 자녀가 태어났다는 것을 스스로 수긍 못해 자신의 혈족 5촌까지 피검사를 해보았다는 분들도 계시고 뇌병변 장애나 자폐성 장애를 여전히 유전적 질환이라고 믿고 계시며 공언하시는 부모님들도 많이 계시더군요.

누구나 건강하고 일반적인 자녀를 바라고 꿈꾸는 것은 본능적인 희망이지만 자녀들이 부모를 고르지 않는 것처럼 부모님들도 자녀분들을 고를 수는 없는 노릇 아닐까요? 세상에 태어난 이후로는, 아니 자궁안에서 착상되어 피가 흐르는 그 이후에는 부모님들은 의지적 선택을 하셔야 합니다. 자신의 자녀에게 장애가 발견되었을 때 그 장애를 불쌍하게 만들건지, 멋지게 만들건지 부모님은 선택해야 하고 그 선택을 평생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라 할지라도 원래부터 장애 감수성이나 인권 감수성이 뛰어나다고 할 수 없으니까요. 어쩌면 당신의 자녀분이 장애인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자신의 공동체에 장애인 학교나 생활시설이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였을 개념 없는 비장애인일 수도 있을 테니까요. 잔인한 말이지만 장애인을 자녀로 둔 부모님 스스로 각성해야 합니다. 부모님들의 신뢰와 각성이 없다면 다른 지역 주민들도 당신들의 자녀들을 신뢰해주고 각성하고 포용하기는 힘들테니까 말입니다.

장애인의 사춘기를 일반적인 것, 편하게 받아들이려면 장애인을 일반적인 것 편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당사자 입장에서 다른 부모님을 바라보면 제게는 다 같은 사춘기인데, 장애인의 사춘기를 부모님들은 더욱 힘들게, 더욱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 같습니다.

 

멋있는 장애인 청소년이고 싶습니다. 나의 장애는 그 멋진 부분의 일부이어야 합니다

부모 스스로 장애에 대해 죄의식을 벗어나지 못하거나 장애를 가진 자녀 자체를 긍정적으로 수용하지 못한다면 그것 자체가 자녀에게 폭력적이며 결국 그 감정은 부모로서의 자존감을 무너뜨리고, 자존감이 무너진 부모는 가족 간의 소통에서, 장애인 자녀와의 의사소통에서 심각한 잘못을 저지릅니다. 장애를 긍정 받지 못하는 자녀는 부모 앞에서 끊임없이 불신과 좌절과 싸워야 하며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부모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장애 유형을 막론하고 사춘기 시절 호르몬이 분출되는 시기 장애인 청소년들은 괴롭습니다.
대부분의 가족들이 ‘성’적으로 성장하는 자신들을 격려해주거나 그 혼란스런 시기 그 호르몬과 고민을 풀어낼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장애인 청소년들의 성장은 걱정과 한숨일 뿐입니다. 생리를 시작했다고 수염이 나기 시작했다고 축하 파티를 열어주기는커녕, 모든 상황은 CCTV 마냥 부모에게 녹화되고 중계됩니다. 다른 아이들은 자기 방문이라도 꽝 닫고 시위를 벌이고 가출이라도 할 수 있지만, 부모님께서 장애인 청소년들의 이동권과 결정권을 모두 쥐고 있는데 어느 사춘기 청소년들이 문제행동을 하지 않겠습니까?
재미있는 것은 비장애청소년들이 이런 것에 저항하면 청소년의 당연스러운 사춘기 성장통을 겪는 방황과 반항이지만 장애인 청소년이 하면 교정해야할 문제 행동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장애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근본적으로 사춘기를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으면 의사소통을 할 수 없으며, 의사소통이 안 되면 부모님들은 종국, 가장 효율적이지만 일방적인 폭력이나 약물에 의존하여 장애인 청소년에게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안타까운 경우도 종종 발생합니다. 장애 자체를 긍정하지 못하면 객관적으로 볼 수 없으며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으면 효과적인 대화법을 발견하기가 매우 어려워집니다.
장애인 자녀 당사자의 입장에서도 가장 가까운 부모가 자신의 존재 자체를 신뢰하지 못하는데, 자신의 표현을 알아들으려 하지 않은데 얼마나 화가 나고 짜증이 날까요? 그런 상황에 덧붙여, 장애인 자녀 주변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온 삶을 요한스럽게 하는 호르몬도 분출하는 시기인 그들에게 혼자 있을 기회도, 반항할 수 있는 기회도, 방황할 수 있게도 해주지 않으니 얼마나 부글부글하겠습니까? 
부디 사춘기 청소년을 만나면 부모님들은 장애인에게 스스로 선택할 기회라도 주셨으면 좋겠군요. 무엇을 먹을지 안 먹을지 씻을지 안 씻을지 선택 할 수 있어야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 책임질 수 있고, 책임지는 선택을 할 수 있어야 성장할 수 있으니까요. 자신의 부모가 자신의 성장과 어른이 되는 것을 기뻐해야 자신도 성장하고 싶고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을까요? 이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성교육 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적·자폐성 장애인들이 스스로 인형극을 통해 성교육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제 지적 자폐성 장애인도 독립하고 자립을 고민하고 꿈꾸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현실이 어렵다 하더라도 꿈이라도 꾸고 해야 발전하지 않겠습니까? 사회와 환경은 변화하는데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님 당신들은 변하고 계십니까?
장애청소년 우리들에게 부디 더 많은 믿음을 주시고 실수와 실패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이 불타는 호르몬을 불태울 수 있는 시간을 주시길 바랍니다. 

 

작성자김형수 장애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국장  dung7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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